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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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경 徐大炅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세계』로 등단. 시집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가 있음. foodrobber@naver.com

 

 

 

술꾼들

 

 

별들이 한쪽으로 환하게 기울어 있는, 얼어붙은 밤하늘. 도시의 네온사인 간판들이 허공에서 춤추는 전기뱀장어처럼 점멸한다. 눈으로 뒤덮인 광장을 느릿느릿 가로지르던 전차가 전깃줄에 파란 불꽃을 일으키며 멈춰 선다. 「왜 또 멈추는 거야.」 술 취한 세명의 사내가 전차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선 채 투덜거리며 노면 궤도를 따라 쌓여 있는 반짝이는 눈 더미를 바라본다. 「선로가 얼어붙었나봐. 차장이 곡괭이를 들고 내려서는군.」 사내들은 부르르 몸을 떨며 옹송그린다. 그들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김이 그들의 붉은 얼굴을 지우고 다시 드러내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말이야, 이 도시의 길들은 이상하기도 하지. 광장 건너편, 사창가로 통하는, 저 어둡고, 좁고, 중얼거리는 길들 말이네.」 한 사내가 말한다. 「자네들도 가봤는지 모르겠네만, 어쨌든 저 중얼거리는 길들을 조심하라고. 내가 에헴, 재미를 좀 보려고 저 길로 들어섰다가 귀신에라도 홀렸는지 번번이 쓴맛을 봤거든. 이제는 저 길들이 실제로 있는 건지 없는 건지도 잘 모르겠어. 너무 취해서 그랬을지도 모르지. 저 길로 들어서면 어쨌거나 취해버리고 말거든.」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네. 그날 밤도 다른 곳에서 한잔 걸치고는 이번엔 반드시 찾아가보리라 마음먹고 사창가의 어두운 불빛을 바라보며 저 길로 들어섰지. 더러운 눈 무더기가 양쪽 벽에 쌓여 있는 좁은 골목을 걷고 있는데, 별안간 어둠 속에서 울긋불긋한 서커스 광대 옷을 입은 난쟁이들이 나타나더니, 나리, 술 한잔합쇼, 그러면서 나를 잡아끄는 게 아니겠나. 그래서 내가 뭐라고, 이놈들, 뭐라고, 호통을 놓다가는 어어 그럴까, 그럴까 하고 따라나섰지. 그놈들이 이끄는 대로 못 보던 모퉁이를 돌아가니 담장을 따라 환한 백열전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길이 나오더군. 길바닥은 눈 녹은 물로 질척거리고, 웬 다리 없는 병신 꼬마애가 목에 껌통을 맨 채, 배에는 타이어를 대고 기어다니고 있었어. 난쟁이가 서커스 분장실에서나 쓸 법한 이상야릇한 거울이 앞에 붙어 있는 간이의자 위에 나를 앉히더니 꼬챙이에 꿰인 고기와 술을 가져오더군. 거울 속에는 어딘가 뒤틀린 얼굴의 내가 비쳤는데, 뭐 내가 술에 취해서 그렇게 보였는지 모르지, 그런데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았어. 거울 속의 나는 분명 나인데, 또 내가 아닌 게 분명했지. 왜냐하면 거울 속의 나는 타오르는 혀처럼 붉은 서커스단 조끼를 입고 있었거든. 아무튼 나는 마셨지. 마시고, 또 마셨다네. 그러는 동안 거울 속의 나는 나한테 말을 걸기도 하고, 혼잣말을 하기도 하고, 고개를 돌려 술을 더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더군. 손에 들린 검은 채찍을 바닥에 내리치면서 말이야.」

어디선가 호각이 울리고 멀리 시계탑에서 어둡고 둔중한 소리가 한번 짧게 울린다. 「벌써 한시야.」 다른 사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한다. 「물론 나도 난쟁이들을 따라가봤다네. 자네들도 알겠지만, 난 매사에 자제력이 있는 편이잖나, 그래서 이놈들 어디 날 실컷 속여보라지, 하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서도 술은 마시지 않았지. 왜냐하면 나는 이놈들의 속임수를 훤히 알고 있으니까. 거울 속의 나도, 형씨, 우리 같이 저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리려는지 한번 두고 봅시다 그러면서, 팔짱을 끼고 빙그레 미소를 짓더라고. 아 그래, 한잔 정도, 한두잔 정도는 마신 것 같네, 하지만 아예 안 마신 것이나 다름없어. 아무튼 그러고 있으려니까 거울 속에서 막대기 위에 접시를 올려놓고 빙글빙글 돌리는 묘기를 부리는 난쟁이가 나타났는데, 그 난쟁이를 보더니 어째선지 거울 속의 내가 벌컥 화를 내더군. 그러더니 벌떡 일어서서 그 난쟁이를 와락 밀어버리는 거야. 접시가 와장창 박살이 났지. 그 순간 거울 속 천막 휘장이 들어올려지더니 경찰 놈들이, 그래 맞아, 그놈들과 한통속인 것인지, 손에는 술병을 들고서, 비틀거리며 무슨 일이냐, 무슨 놈의 사달이냐, 그러면서 걸어나오더라고. 그 참에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 바짓단을 부여잡는 껌팔이 꼬마 놈을 걷어차고는 그 골목을 떠났지.」

「나도 그때 접시 돌리는 놈을 밀어버릴 걸 그랬지.」 전차 난간 밖으로 오줌을 갈기고는 바지를 추켜올리며 사내가 말한다. 「별들이 사라진 걸 보니 또 눈이 오려나본데. 이놈의 쇳덩이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군. 차장이 올라탔나? 아무튼 난 그때 그냥 계속 마셨어. 그쯤에서 일어서야 했는데. 형씨, 난 먼저 일어서겠소, 어느 순간 거울 속의 내가 검은 모자를 머리에 쓰면서 그러더군. 날 엉망으로 취하게 만들어놓고는 혼자 재미 보러 가겠다는 거였지. 괘씸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몸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더군. 난쟁이들이 담장에 붙은 백열전구들을 뜯어 상자에 넣고 있었어. 어느새 날이 희부옇게 밝아오고 있었지. 난 고래고래 욕을 퍼붓다가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번쩍, 떴다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눈발이 희끗거리기 시작한다. 줄곧 말이 없던 마지막 사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금속성으로 번득이는 어두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친구들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흩어지는 입김 사이로 그의 잿빛 눈이 천천히 드러난다. 「자네들도 알다시피, 난 아무리 마셔도 제대로 취해본 적이 없어. 꿈속에서든, 꿈밖에서든 마찬가지지. 그러고 보면, 사창가 골목에서 거울 속 자네들을 본 것도 같군. 난 그곳의 쇼윈도 앞에 서 있었네. 검은 모자를 쓰고 서커스단 조끼를 입은 거울 속 자네들이 텅 빈 가게 안에서 검은 채찍을 휘두르며 욕설을 퍼붓고 있었지. 물론 난 자네들이 내 꿈의 영역으로 들어섰다는 걸 알고 있었어. 난 자네들의 채찍이 자줏빛 조명 속에서 대가리를 치켜든 두마리 뱀처럼 서로를 겨눈 채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네. 그리고 돌아서서, 거리를 가득 메운 음울한 난쟁이들의 대열을 헤치며 천천히 그 골목을 빠져나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