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박세미 朴世美
1987년 서울 출생.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내가 나일 확률』 등이 있음.
smp0615@naver.com
밤의 인터체인지
옆에 한 사람이 서 있고 우리는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함께 담배를 태우고 있다
한모금…… 깊게 마셨다가 내쉬며
저렇게 자동차들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둥글게 빠져나가는 도로를 뭐라고 불러요? 물으니
인터체인지, 하고 옆 사람이 단답한다
손가락으로 콘크리트 고리를 끊는 시늉을 하니까
옆 사람이 연기를 후 불며 훗 웃는다
견고한 구조물 위로 흐르는 불빛을 나는 보고 있을 뿐인데
옆 사람은 내게 묻는다
무슨 생각해요?
아무것도
불빛을 단 두 손이 허공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평면 교차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돌아서니까
옆 사람이 돌아선다
자욱한 연기가
누구의 속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하여도
살아 있는 작은 안개1가 하는 일
책 빌딩을 무너뜨리는, 책을 줍다가 빈 책꽂이를 보게 하는, 책과 책의 제목을 이어 붙이는
거꾸로 세워진 반투명 컵에 빛을 따라두었다가, 오후 다섯시에 홀짝 마셔버리고, 휘청거리며 컵의 둘레를 따라 걷다가, 몽롱한 저녁이 된다
얇은 비밀이 있다면, 네모나게 굳은 어둠이 있다면, 잃어버리기에 좋은 작은 기억이 있다면, 서랍 속에 넣어두는 것
손과 손잡이가 어긋날 때, 열고 닫힘이 모자랄 때, 살짝 옮겨줄 때, 제작하는 손과 사용하는 손이 악수하게 될 때
작은 서점의 작은 창문 너머로 눈이 되어 내린다,
작은 빌딩과 큰 빌딩 사이로 눈이 되어 내린다
—
- “그러나 은그릇을 보고 있는 동안에도 은그릇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앞섰고, 그의 시선 뒤에는 살아 있는 작은 안개가 꿈틀거리고 있었다.”장 폴 사르트르 「어느 지도자의 유년 시절」, 『벽』, 김희영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5, 2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