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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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택훈 玄澤勳

1974년 제주 출생. 2007년 『시와 정신』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지구 레코드』 『남방큰돌고래』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등이 있음.

traceage@naver.com

 

 

 

온주

 

 

내가 귤 두개로 저글링을 하니까

아내는 귤 세개로 묘기를 부린다

 

이 섬에서는 오래전부터

귤 저글링을 전수해온 것이다

 

눈 내리는 밤

아랫목에 둘러앉으면

엄마는 서커스 단원 같았다

 

공중으로 던진 귤 중에 몇개는

다시 손으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칠머리당 근처 풀밭에서 놀다보면

봄바람이 불어와

우리의 몸을 안아주었는데

 

귤꽃 핀 밤엔

하얀 새가 울었다

 

숙대낭을 흔드는 이야기가

돌담처럼 쌓여 물결을 만들었는데

 

눈 내린 아침에는

강생이처럼 벵듸로 나갔다

살아 있는 것들이 주왁거리면

나뭇잎에 쌓였던 눈이

한번 더 내려주었다

 

 

아무도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한 사람이 병나고

또 한 사람이 병수발을 든다

 

골골대는 저녁 파도 소리에

샛별이 뜬다

 

오늘의 처방전은

수평선을 바라보는 일

 

휴양지에서 요양하는 사람들은

여행객과 구별하기 쉽지 않다

어깨에 힘을 빼고

숨 들이마시고

 

바닷게가 문병객처럼

왔다가 간다

 

아무도 낫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눈동자가 알약, 아니

약병 뚜껑을 닮아간다

빙그르르 돌다 툭 열린다

 

그곳에 스며드는 언어가 있었다

햇살이었다

 

병수발을 들었던 사람이

병나고

 

수평선 너머로 갔던 배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