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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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하 車圖霞

1999년 출생. 2020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review_-_@naver.com

 

 

 

요절복통

 

 

갑자기 터지는 웃음처럼

강간이라는 단어가 생각나

 

그녀는 그와 그녀를 구분할 수 있었고

그녀는 섹스와 강간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한올씩 뜯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머리는 풍성하고

검고

길었지

 

검고 길다는 말은

죽음을 꾸밀 때도 어울리는 표현이지

 

그러나 꾸민다는 건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이니?

 

언젠가 그녀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나는 흰 국화를 도무지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장례식장에 있는 꽃들은

모두가 잠든 밤에,

모두가 잠들었다고 했는데 어떤 여자들은 깨어 있는 밤에

 

일제히 떠올라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흙 속으로

조경되지 않은

풀밭 사이로

 

갑자기 터지는 웃음처럼

왜 여기 피어 있을까 싶게

 

뜬금없이 흰 꽃

 

 

 

놀이터에 혼자 앉아 있는 어리고 건방진 신

 

 

태초에 의자가 있었다 나는 그 의자에 앉았다 그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의자의 다리를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빛이 나를 감쌀 때

내 발밑엔 그림자도 없고

어쩌면 내가 빛일 수도 있겠다,

시소도 미끄럼틀도 작은 오두막도

내가 있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의자가 나를 앉힌 게 아니라 내가 의자에 앉았다고 착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초에 빛이 없었고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등받이를 찾아냈을 때

거기에 빨려 들어가듯 등을 기댔을 때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았다

 

의자를 부러워했다는 걸

다리가 부러지면 못 쓰게 되는 점을 특히

 

빛을 튕겨내면서

길게 뻗은 그림자를 보면서 나는

그것이 키가 아니라 시간을 나타낸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기다렸다

 

저녁이었고

나는 식구가 없어도 앉아서 밥을 먹어야 했다

해가 완전히 진 후 어둠 속에서 의자를 삐그덕대는 짓을 그만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