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정말이지 요새 같아선 ‘격동의 현대사’라는 관용구가 턱없이 부족해 보일 정도다. 민주화 이후 지난 한 세대 동안은 말할 것도 없이 최근 탄핵정국을 전후해 우리 사회가 보여준 역동적 변모만 해도 세계사적 예외성을 지니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문학의 역사적 지반 또한 이 독특한 복잡계 위에 놓인 것이거니와 여기에 어떻게 응하느냐는 문학의 여러 장르 중에서도 특히 규모있는 서사와 개성적 시야를 두루 요구하는 장편소설에서 관건적이다. 창비장편소설상 공모에도 우리 현실의 이러한 역동성을 해명해줄 실마리를 새로운 장편소설에서 찾아보자는 취지가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모두 231편의 응모작을 검토한 올해의 다섯 심사위원들 또한 이 점을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지난 3월 말까지 진행된 예심을 통해 본심에서 4편을 집중검토하기로 했다. 개성이나 완성도, 문체 등 여러 면에서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을 지닌 작품이 생각보다 드물었지만 본심에 오른 『Without Fear』 『택수의 세계』 『작별인사』 『6. 부상자』 등 4편은 서로 다른 장점으로 기대를 갖게 했다. 수상권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것은 『Without Fear』와 『택수의 세계』였다. 4편 사이에 압도적 차이가 있었다기보다는 서로의 장단점이 비교적 명확해 보이는 상황에서 『작별인사』와 『6. 부상자』의 장점이 앞의 두 작품이 지닌 그것을 넘지 못한다는 데 공감했기 때문이다.
『작별인사』는 일종의 미스터리 서사다. 일정한 호흡을 유지하며 끝까지 읽게 하는 데에도 미스터리적 요소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을 대신해 희생당한 인물과 그로 인해 트라우마를 경험한 주인공이라는 기본설정이 충분한 설득력까지 확보하지는 못했다. 이는 결말의 모호한 처리에서 유독 두드러지는데 사건의 진실에 대한 작가 자신의 입장 또한 불명확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물론 결말의 불명료함이 그 자체로 문제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명료함은 충분히 의미 있는 불명료함이었어야 했다. 플롯의 작위성도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보였다.
『6. 부상자』도 과거의 상처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인물들 간의 관계를 그리되 선형적 시간을 거스름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는 절차를 지연시키며 궁금증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앞의 『작별인사』와 일정한 유사점이 있는 작품이다. 수미일관하게 짜인 이야기의 완결성이 눈에 띄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자기탐닉적인 문장들이 가독성을 떨어뜨려 작품의 이러한 장점마저 가려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과거에 일어난 사건, 기억 속의 상처라는 서사적 핵심이 기대만큼 신선하지 않았던 점도 이 작품을 제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Without Fear』는 자신만의 영감과 재능을 갖춘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택수의 세계』는 완성도와 가독성, 서사적 설득력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특히 전자는 이런저런 이유로 외국에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생활상과 문화적 감수성을 비교적 신선한 필치로 그려 보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이민자나 유학생이 아닌, 인물의 독특한 위치선정이 주효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반부로 갈수록 서사적 초점이 무너진다는 인상을 버리기 어려웠다. 현실에서 초현실로 넘어가는 계기에도 초현실 나름의 ‘현실성’이 뒷받침되지 못한 면이 있고 묘사나 대화 등 극적 제시로 이뤄졌어야 할 대목을 서신이나 진술문으로 손쉽게 마무리한 점도 걸렸다. 한마디로 긴 이야기를 감당할 뒷심이 아쉬웠다.
『택수의 세계』는 운동권 출신의 어느 남성 교사와 그 가족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이 지닌 상대적 강점은 한 인물의 삶을 진득이 파고드는 집중력과 독자를 설득하는 상황전개의 리얼리티였다. 특히 1부의 인물과 배경 형상화는 작가의 내공을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낯익은 구성과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서술의 톤은 생동감이 있어서 오히려 세련된 느낌을 주는 대목도 여럿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에선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라는 자의식이 도드라져 보였는데, 이 점은 작품이 발휘하는 진정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르시시즘처럼 보일 수도 있다. 『택수의 세계』가 후자의 문제를 시원히 해결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Without Fear』에서 엿보이는 참신한 재능과 『택수의 세계』가 보여준 원숙미 사이에서 선택의 고민이 깊어졌지만 끝내 수상작을 고르지는 못했다. 전자의 완성되지 못한 낯설음과 후자의 완성된 익숙함 양자에 공히 딛고 나와야 할 한 걸음이 더 필요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응모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는 말로 아쉬움을 대신한다.
강경석 권여선 윤성희 한기욱 황정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