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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주민현 朱民賢
1989년 서울 출생. 2017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1003jmh@naver.com
오리들의 합창
저녁반 수영장에 오는 사람들은
열심히 사는 오리들 같군요
배가 나오거나 가슴이 납작하거나
하나같이 물속에서 음, 하고 숨을 내뱉는군요
삼개월째 월급을 밀리는 사장이거나
고시 실패로 조용히 방문을 닫게 될 사람이거나
오리가 내는 소리는 참으로 다양하다,
물속에 고개를 넣고서야 알게 되었는데
삼킨 물이 염소 맛인지 수염 맛인지
코를 쥐면 메에에, 소리가 나는 것도 같고
수영의 기본은 호흡이에요
무릎이 아니라 허벅지를 쓰는 겁니다, 여러분
먹이를 꿀떡꿀떡 받아먹으면서 한발씩 나아갔어요
수영복에 딸려 온 싸구려 수경은 세상을 많이 왜곡하고
그러나 수경을 벗어도 진짜 세상이 보이는 건 아니에요
이 세상이 실은 거대한 어항 속이라면
언제나 벗을 수 없는 수경을 한겹 쓰고 있는 거죠
수영장 바닥에서 가끔 환상처럼 반짝이는 걸 보지만
떨어진 주화 같은 게 있을 리 없고
다른 행성에서 본다면 우리는
지독히도 춤을 못 추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생일날 집에 온 이모는 밥을 먹으면서
자기가 아는 별별 보험사기를 풀어놓았지요
잔뜩 마신 물이 수염 맛인지 양떼 맛인지
나의 말소리도 앞사람의 기침 소리도
모두 기포가 되어 뽀글거리는 물속에서
어느땐가 내 차 앞으로 뛰어든 자전거를 생각했고
눈을 꼭 감아야 했던 새파랗게 젊은 사람의 자세 같은 걸 생각했어요
오리는 단순히 꽥, 꽥, 하고 울지 않는다,
가라앉거나 떠오르는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다양한 소리가 들려왔던 것인데,
반짝이는 건 앞사람이 만드는 정신없는 물보라뿐인
물속에선 밖에서의 규칙들은 잊어도 좋아요
계속 나아가세요, 물장구치세요, 멈추지 마세요,
밖에서 마신 호흡과 안에서 마신 물이
한꺼번에 들이닥칠 때
눈을 감고 두 팔을 휘휘 저으면
해변의 플라밍고들 가느다란 물음표처럼 서 있고
눈을 뜨면 초보 오리들은
어둡고 둥글게 휘어진 수경 안의 세계로
한발씩 전진하고 있네요
하권부터 시작되는 이야기
언젠가 햇빛이 만들어내는 작은 궁전 같은
플랫폼에 앉아서
연착되는 열차를 기다리며 천천히 책을 펼쳤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하』,
주인공은 반짝이던 유년 시절을 지나
마흔살, 쉰살, 예순살
그리고 잃어버린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문학은 기본적으로 뒤돌아보는 자를 위한 것이로군,
체스판 위의 말들을 옮기듯이 중얼거렸다
회고하는 인간은 흥미롭고도 지루한 인상을 남기기 마련이지,
영원 속에서 눈을 감기까지
단막극은 시시한 에피소드를 끊임없이 필요로 하고
주변인물이 하나둘 떠나가고 난 어느날엔가
젊은 시절엔 고난에 대해, 슬픔에 대해, 살아갈 일들이 한참이나 남은 지루함에 대해
너무 쉽게 말해왔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동전을 넣으면 반드시 하나의
소중하고 둥근 것이 굴러 내려오던 어린 날을 생각하는데
로아나 여왕도, 신비로운 불꽃도 없지만
이제 막 시작된 줄 알았던 이야기가
아무래도 조금씩 끝나가는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되는
삼십대, 몰래 극장을 빠져나오는 주연배우의 기분으로
나는 뒤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