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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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陳恩英

1970년 대전 출생. 2000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일곱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 『훔쳐가는 노래』 등이 있음. dicht1@daum.net

 

 

 

죽은 마술사

 

 

죽은 마술사, 내 사랑 너는 붉은 철책의 발코니 무의미의 실내악

나의 악보가 놀라서 내게서 도망쳤다

너에 대한 사랑과 슬픔에 빠져 내 귀는 익사할 지경이 되었으니까

소금을 진 당나귀를 걷어찼지

눈 속에 잠든 네 입술의 동네 근처로

내 심장은 얼음 위 맨발처럼 추억 속을 뛰고 있고

모든 기쁨을 잠들게 하는 종소리가 어두운 언덕 위로 지나갔다

저녁의 탁자

알 수 없는 시구들이 파란 연필처럼 길게 드러눕는다

단어 속의 기억을, 깜박이는 속눈썹을 흰개미들이 갉아먹고 있다

 

이봐, 슬픔의 좁쌀을 가득 채우라고

이제 내 인생은 구멍 난 주머니야

 

 

 

Agnus Dei, Samuel Barber

내가 아는 한 노동운동가에게

 

 

밤이여, 너의 긴 팔에 몇개의 못 구멍을 내라

뿔피리처럼 맑은 눈을 떠라

당신이 집을 떠나 공장에서 썼던 일기의 첫줄은 명랑했을 거라

상상합니다

 

진보라니, 언제나 그 말은 아득하게 들립니다

꿈속에서 누군가와 알몸으로

사랑을 하고 빵을 나누는 일처럼

 

자면서 벌어진 입술로 새어나오는 잠꼬대 같은 진실들

그런 걸, 믿으라는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묻곤 했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을 지우면서

당신은 스스로 답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나 결코 욕심부리지는 않았죠

한낮이 아니라

별들이 아니라

용접기 불꽃이 만든

한개의 반짝이는 구리 반지를

벽보 속에, 슬픔 속에, 한 노동자의 얼굴 속에 넣어뒀을 뿐)

 

당신은 확신했습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이다

나는 약간의 소금, 나를 넣어주세요

(그렇다고, 역사의 바다가 더 짜지지는 않을 테지만)

모든 것은 둥둥 떠오를 것입니다

거짓은 생각만큼 무겁지 않다고, 나는 확신합니다

염도의 합법칙성이 아니라 소금 한알

 

흰 깃털의 어둠 속에서

얼굴을 씻는 나무들

 

어쩌면, 높은 데서 딴 열매는

빛의 밤송이 같은 것, 배가 고프고 따갑습니다

때때로 빈속에 삼킨 정직은 우리의 창자를 찢으며 내려갑니다

 

나는 완벽한 사실의 평면, 혹은 고통이라고 믿는 벽에 뚫린

아주 작은, 단 하나의 구멍

나는 그것을 통과해서 나갈 거니까

앞으로

앞으로

마지막 순간에 당신은 중얼거렸습니다

 

……

……

 

나는

그 순간에 덧붙일 정치철학적 논평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질문으로

다시 질문을 지우며

당신과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념으로

어제까지 신이 머물렀다 막 떠난 도시처럼

이곳이 아직 따듯한 것이라고

조용히, 당신처럼, 비유로 말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