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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이 있음.
imagine49@hanmail.net
시계
저건 가기만 한다
오는 것은 알 수 없고
가는 것만 보이는 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지만
숙명인 양 가는 뒷모습만 전부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열차의 맨 뒤 칸에서 뒤를 보고 있다
마치 기계노동의 습관처럼
도무지 누가 앞에서 운전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얼굴이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린
모든 걸 배웅하기에 바쁘다
가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부피에 가득 찬 실타래가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칠 뿐이다
그건 마치 그림자를 어둠이라고 생각하는 것
태양을 가리기만 하면 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시계는 뒷모습만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맞이하지 않고 보내기만 한다
사냥을 떠나지도 않고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몸에 피를 바르지도 흙을 밟지도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내세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존재를 헌신하지도 않는다
순환의 절반을 버림으로써 얻은
이 엄청난 질주와 쾌락
우리는 어떤 재생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숙명을 발견하지 않고 발명했을 뿐이다
숙명이라는 쏟아지는 별들의 시간을
봄날에 꽃을 들고
봄을 기다리던 때가 언제였던가
겨울을 좀더 붙들어두고 싶어
안달을 해온 때가 또 언제부터였나
어릴 적엔 깊고 으스스한 겨울밤이 좋아
아득히 꾸던 꿈들이 흩어질까봐
그 멀고 먼 나라로 데려가던
눈부신 설원이 사라질까봐
그러나 날이 풀리면
정든 이들 살길 찾아 뿔뿔이 떠났기에
땅이 풀리면 고된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펼쳐지는 것은 화원 아니라 화흔이었기에
풀려나온 것들은 심장을 찢는 비명이었기에
흩날리는 것은 꽃향기 아니라 피비린내였기에
애도의 회한들이 얼음 풀리듯 터져나오고
아픈 기억이 짓뭉개진 손톱에 핏물 적시기에
겨울을 오래 붙들어두고 싶었네
꿈은 더 깊어졌으면 했었네
하지만 꽃잎 여는 소리를 듣던 두 귀도
잎새 흔들던 바람에도 기체처럼 타오르던 심장도
이제 영영 내 것이 아니네
꽃들 난분분한 이 봄날에 한 손에는 꽃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쫓기는 짐승 같은 내 심장을 만져보네
불에 거멓게 덴 심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