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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현승 李炫承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등이 있음.
tuplos@naver.com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마치 백년 전에도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처럼
오늘 거리에는 노인들이 많다.
개항과 자주가 붙었다 떨어졌다 했던 백년 전처럼
태극기 옆에는 유대의 깃발들이 보이고
박근혜 석방, 문재인 OUT을 앞뒤로 새긴 피켓을 향해
박근혜 ×××! 인도 쪽에서 누가 쏘아붙이자
노인의 눈에서 다시 화염이 일었다.
백두산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다.
천년 전에 한반도를 1미터 두께로 뒤덮었던 화산재조차
어떤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죽은 풍뎅이를 잘라 나르는 개미떼를 보듯
자연의 편에선 다 합리화가 가능하고
잘못된 선택과 행동조차 교훈을 남긴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허기보다 착잡한 진실로 남는다.
지난 백년 동안
제국주의와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지만
싸우며 가난과 무지를 건너왔지만
마침내 맛집 앞에 줄 선 사람들처럼
우리를 무너뜨린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워서 먹고 화가 나서 더 먹어치웠지만
먹어서 배가 부르고 살 만해지면
주려 욕이 비어져 나오는 맞은편 사람도 보인다.
보인다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된다.
무너진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그 사람도
뭘 봐? 화난 사람 첨 봐? 한번 더 소리쳤지만
화난 사람이 화내면서 더 화나듯이
우리는 부끄러워서 울고 울면서 부끄럽다.
아무리 그래도 뭘 먹으면서도 화내는 사람을 보면
아직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봄처럼
마음이 춥고 외롭다.
호모 사케르
아우슈비츠엔 정신병과 감기가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은유가 무섭다.
정신병이나 감기가 없는 곳이 다 아우슈비츠 같기 때문이다.
뭔가 없어져야 해서 결국 없애버린 곳은 다 강제수용소 같다.
한덩어리의 빵을 위해 누군가를 벼랑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면
부모가 제 자식을 때려죽여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겠지만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자칫
무슨 일이든 다 하면 그건 안 한 것만 못한 것인데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는 열정이
되려는 것을 막으려는 힘과 맞붙는,
혁명은 너무 뜨거운 사랑이어서
혁명 이후는 권태도 그만큼 깊다.
더이상 혁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란
한두번 달려보고 나서는 전력질주하지 않는
선착순 달리기의 뒷무리들 같다.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우슈비츠에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쪽에 인간은 있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서 최소한 인간이 필요하다.
—
* 쁘리모 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