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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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金素延

1967년 경북 경주 출생. 1993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i에게』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누가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열고 운동화를 벗던 그 순간에. 가방을 책상 옆에 두고 옷을 갈아입고 세면대 앞에 서서 화장을 지우는 순간에. 나는 혜림이가 되어갔다. 혜림이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혜림이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 혜림이의 표정을 좋아했고 혜림이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좋아했지만 혜림이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

 

나는 혜림이가 되었는데 저녁밥으로 비빔국수를 먹어도 될까. 많이 맵게 양념을 해도 될까. 비빔국수에 삶은 계란을 올려도 될까. 얼음을 넣어도 될까. 나는 혜림이가 되었는데 좀비가 나오는 미드를 보아도 될까. 이 밤에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혜림이처럼 일찍 일어나려면 일찍 잠들어야 할까. 나는 혜림이가 되었지만 혜림이를 잘 알지만 혜림이답지 않아도 될까. 나는 혜림이니까 지금 혜림이의 생각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혜림이니까 오늘 밤에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았으며 혜림이답게 아침 일찍 알람을 맞추고 일찍 잠이 들었으나…… 혜림이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혜림이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 몸이 좋지 않니? 왜 여기서 이렇게 오래 누워 있니? 방문을 열고 혜림이를 들여다보아도 될까. 혜림이가 눈을 비비며 나오면서 밥 먹자고 말할 때에, 혜림이는 나였다는 걸 기억해낼까.

 

혜림이와 내가 마주 앉아 아침식사를 할 때 누군가 혜림이의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왔다. 답장은 누가 보내야 하지? 혜림이와 나는 젓가락을 든 채로 잠시 마주 보았다. 혜림이는 나에게 제안했다. 토마토를 먹고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나는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더 잘 지운 날

 

 

바람 불고

창문 열려 있고

그게 전부다

 

이런 오후가 나에게 조금 더 많았더라면

아빠다리를 하고 의자에 앉아 가려운 발바닥을 긁는

내 오른손을 톡톡 치는

 

땡볕이

내 옆에 앉아 있다

 

빨래가 마르면

빨래를 개야지

 

내가 펼친 공책의 빈 페이지를

야구공이 가로질러 날아간다

외야수는 팔을 길게 뻗어 마침내 그 공을 글러브 속에 담는다

나는 공책을 덮는다

 

끝낼까

지금 끝내고

호숫가 옛날통닭집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챙모자를 쓰고 커다란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외칠까

 

거긴 비가 온다는데 여긴 아무렇지 않다

여기는 거기와 그다지 멀지 않다

이상하구나

벗어나는

기쁨

 

내가 하지 않았던 일들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었던 일들이라는 게

정말로 그렇다는 게

 

나의 얼마 안 되는 비밀을 불시에 덮칠 생각은 하지 말기를, 나의 편지를 찾더라도 읽지 말기를, 내 사진들이 보이더라도 쳐다보지 말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닫힌 것을 열지 말기를 그들에게 간청한다. 진정한 애정에서 나오는 무지와 자발성을 발휘하여 그들이 무엇을 폐기하는지 모른 채로 모든 것을 폐기하기를 간청한다.*

 

따가운

거짓말을 이끌고

느릿느릿 밤이 찾아온다

 

공책을 다시 펼친다

야구공이 발아래로 후두둑

쏟아진다 구석구석 굴러간다

 

야구공을 주우러 다니고

빨래를 개고

나는 바쁘다

 

 

* 모리스 블랑쇼 『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2011)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