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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학중 金鶴中
1977년 서울 출생. 2009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창세』 등이 있음.
pulza23@hanmail.net
번역가
당신의 문장은 여기에선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이군요.
그 문장은 그가 내 작품의 번역가가 되고 싶다고 보낸 편지의 첫 문장이었다. 내 옛 주소로 보낸 그의 편지는 오랜 이웃이던 옆집 사람이 내게 다시 부쳐주지 않았다면 받아보지 못했을 편지였다.
K씨. 저는 K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대해 좀 망설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당신의 문장은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지금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편지와 같은 것이죠. 지금 시대에 편지라니,라고 당신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든 좋은 번역은 착오적 시대여야 하므로 저는 앞으로 당신과 편지란 번역을 주고받고자 합니다. 야생적이고 서툰 저의 작문 때문에 제가 전하고자 하는 말이 잘 도착될지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읽게 되면 저에게 꼭 답장을 주십시오. 이 편지야말로 작품 번역의 시작이므로 우리는 이 불편함을 감내해야 합니다.
나는 그의 주소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단지 밸리라고 쓰여 있어 어느 나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골짜기인 것은 분명했다. 그가 나의 작품을 어떻게 접했고 나의 옛 주소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주소라고는 믿기지 않는 그의 계곡으로 이 편지를 받은 일과 번역에 관해 답장을 써 보냈다.
답장은 내가 그의 편지에 대해 까맣게 잊은 몇년 뒤에야 왔다. 나는 늘 이사 중이었고 그날도 전 주소로 보내진 편지를 집배원이 챙겨서 현재의 주소로 보내주어서 받을 수 있었다.
당신에겐 이웃이 있군요. 이웃이야말로 멋진 번역입니다. 우리는 서로 마주 보는 산들을 사이에 둔 좋은 골짜기를 가졌군요. 이런 긴장감이야말로 시적인 것이지요. 당신 나라의 어떤 시인이 그의 시의 비밀은 번역이라고 했다던데 그야말로 놀라운 골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좁은 협곡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물이 어딘가로 건너가기 위해 태어나듯이.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편지였지만
그의 답장에는 번역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몇년 후 완성된 번역본을 가지고 당신에게 출발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을 때, 나는 편지를 읽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입국한다고 알려준 날짜는 오늘이었고 나는 허둥지둥 공항으로 갔다. 공항에 갔지만 나는 그를 만날 수 없었다. 그의 비행기는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고 그는 공항을 빠져나간 뒤였다. 실패한 마중이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편함에는 그가 직접 두고 간 우편물이 있었다. 우편물 안에는 한권의 책과 동봉된 편지가 있었다.
당신의 나라에 올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우리의 만남이 이와 같이 엇갈리는 일이라면 내가 당신에게 드리는 이 한권의 책은 분명 좋은 번역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놀라운 건 누구도 자신의 번역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에요. 꼭 누군가가 필요해요. 우리의 나란히. 펼쳐진 아름다운 계곡이. 그것이 설령 무한히 다른 언어라 할지라도. 그것이 마주할 때 텍스트가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지요. 번역이란 참 놀라운 텍스트랍니다.
그가 두고 간 책을 펼쳤다.
나는 한 문장도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쓴 문장을 벗어난 문장들이 페이지를 채우고 있었다. 물론 그 문장들은 분명 언어였다. 언어라서 문장인 문장들은 거기 놓인 채 페이지를 흘러가듯 이어지고 있었다.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 그가 내게 말하고자 했던 바로 그 계곡이 펼쳐져 있었다. 그 계곡 사이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나는, 아마 그도 그럴 것이겠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부드럽게 웃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는 계곡의 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돌아가 다시 그는 한편의 산과 다른 한편의 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같이, 물이 태어나는 어딘가에서 깊어지는 말들을 매만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물가를 적시는 속삭임 속에서 또다른 엇갈린 만남을 기다리며.
판
아내는 숙소를 집이라 불렀다
아내의 말을 따르자면
판 위에 숙소를 삼은 오늘은
판도 집이었다
집이 다만 하나의 판이라니
조금 서글프기도 하지만
우리가 묵어온 모든 자리가
서로 다른 장소였다 할지라도
단 하나의 집이라고 생각하니 따듯했다
그 온기가 지나온 숙소를 이으면
하나의 판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과학자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사실
액체 위에 떠 있는 판과 같아서 끝없이 움직인다는데
그렇다면 아내와 나는 이 판의 진실을 살아내는
집의 가족이 아닐까
그녀가 하루의 노동을 마치고 잠드는 곳에
나 또한 이미 도착해 있다는 느낌
밀가루 반죽이 한켠에서 숙성되는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으나
나는 잠시 하나의 판에 몸을 맡긴다
그러곤 집이라는 거대한 판의 이미지를 덮고 잠든다
지금은 그 이미지의 이불을 함께 덮는 우리이겠으니
다음은 늘 간단하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이튿날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일어나
커다란 빵 반죽에서 알맞게 떼어낸 빵들을 오븐에 넣을 뿐이다
여러개의 판에 담아
층층이
빵이 오븐에서 알맞게 부푸는 동안
열기를 견디는 빵 아래 판도 은밀하게 익어갈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판이 있는 곳이면
우리가 짐을 풀어둔 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