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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바꿈청년네트워크 기획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 들녘 2019
냉전·분단 속에서 형성된 성별 질서에 대한 물음
강인화 姜仁化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객원연구원 suha0420@gmail.com
하마터면 필자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고백’하며 시작할 뻔했다. 『나는 분단국의 페미니스트입니다』는 그런 책이다. 독자들에게 스스로가 페미니스트임을 자각하면서 이전까지 “세상을 봤던 그 시선으로는 세상을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들을 반추하고, 페미니즘의 시선에서 “내 주변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닌, 오래되고 거대한 구조적 문제”(189면)를 분석해보기를 독려한다. 조금은 서툴고 거칠더라도 말이다. 이 책에서 세명의 저자(수지, 추재훈, 영민)가 공통적으로 주목하는 ‘오래되고 거대한 구조적 문제’는 바로 ‘한반도의 분단’이다. ‘분단’은 한국사회와 북한사회의 성별 질서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해온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회적 힘으로 지목된다. 따라서 ‘한반도 분단’과 함께 형성되어온 특정한 양식의 성별 질서 및 여/남성성들은 페미니즘의 분석 대상인 동시에 사회적·정치적인 해결 과제라고 주장된다.
흔히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 냉전의 ‘부산물’로 이야기되곤 한다. 그러나 국제적 전쟁과 민족 내부의 내전이 얽혀 형성된 “분단이라는 요소는 냉전이라는 요소에 환원되지 않는,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현상”(정근식 「동아시아 ‘냉전의 섬’에서의 평화 사상과 연대」, 『아시아리뷰』 5권 2호, 2016, 217면)이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첫번째 정상회담에 이어, 올해 6월 30일 트럼프 미 대통령의 트위터 제안을 계기로 성사된 남북미 ‘판문점 회동’은 한국전쟁이 정지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 사실상 종료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가 여전히 냉전·분단 체제를 살고 있음을 상기시켜주었다. 냉전과 분단 속에서 유지된 남과 북의 “적대적 상호 의존”(박명림 「한국분단의 특수성과 두 한국: 지역냉전, 적대적 의존, 그리고 토크빌 효과」, 『역사문제연구』 13권 2004, 238면) 관계는 남한과 북한 정권이 사회 전체와 더불어 국민 또는 인민을 일상적으로 동원할 수 있도록 하는, 심리적·물리적 기초로 작용해왔다.
무엇보다 ‘남성(성)’과 ‘여성(성)’에 관한 규범을 주조하고 성별에 따른 역할을 할당하는 사회질서로서의 ‘젠더’는 남북 적대 속에서 진행된 군사화된 동원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이를 구조화하는 힘이었다. 끊임없이 “체제 우월성을 선전해야 하는 분단국”(45~46면)에서 여성과 남성은 성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동원되었다. 남한에서 ‘기지촌 여성’들은 “한미동맹을 강화해 정치·군사력을 높이”(30면)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북한정부가 체제의 내·외부를 향해 “남녀평등이 ‘완전히 실현되었다’”(45면)고 선전하는 가운데, 북한의 여성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이중노동’에 시달렸다. 한편 남과 북의 남성 대다수는 징병제하의 군인으로 동원되었다. 그런데 “군 복무를 의무화하는 데 대한 정당성을 얻기 위해 남성들에게 정치·경제적 인센티브”(49면)가 주어지면서, 불평등한 성별 질서가 고착되었다. 그런데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과 이성애에 기초한 성별 규범은 비단 분단체제의 유지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탈분단 시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목격되고 있다. 일례로 정상회담 장면에서 리설주가 등장한 것도 “정상국가로 거듭나고자 하는”(207면) 북한의 의중 때문으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정상국가’로 인정받는다는 것이 이성애 규범에 기초한 ‘정상가족’ 개념에 그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 책의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저자들은 “젠더와 한반도 분단 문제가 서로 관통하는 지점을 찾고 싶다는 열망”(8면)을 좀처럼 숨기지 않는다. ‘분단국 여성성’(수지, 1장)과 ‘분단국 남성성’(추재훈, 2장)에 대한 개념 정의는 이러한 ‘열망’에 기초해 있다. 우선 ‘분단국 여성성’에 대한 개념 정의를 살펴보자. 저자는 분단국에서 여성들이 “2등 시민으로 전락하”고, “이분법적 젠더 질서에 순응할 것을 요구”받으며, “이성애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 극도로 취약해진다”고 이야기한다.(55~56면) 그런데 이같은 여성의 위치와 여성에 대한 성역할 규범은 단지 ‘분단국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것이 아니다. 한편 남성성에 대한 정의에 있어, 저자는 ‘승자남성’과 ‘패자남성’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분단국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남성·남성성 논의들이 노정한 불명확성을 해소할 수 있다”(84면)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쉽게 ‘불명확성을 해소’한 결과, ‘승’과 ‘패’를 누가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위치 확보가 불가능해지고, ‘남성’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는 어려워지고 만다. 이처럼 저자들이 제안하는 분단국 여성성과 분단국 남성성 개념은 여/남성성들이 지닌 구성성의 측면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하고, 성별 질서를 형성하는 데 작용하는 사회적 힘이 ‘온전히’ 분단이었다고 설명할 우려가 있다. 결과적으로 ‘분단’과 ‘젠더’를 교차하여 보려는 시도와 달리, ‘젠더 문제’를 ‘분단 문제’로 환원한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된다. “이분법적이고 폭력적인 젠더 이데올로기를 통해 우리를 겹겹이 억압하고 있는 분단구조에서 탈피”(58면)하기 위해, ‘한반도 분단’과 ‘성별 질서’ 그리고 ‘세계 냉전’에 대한 역사화·맥락화가 필요한 이유다.
끝으로 저자들은 이 책이 “기성세대의 담론이 아니라 청년의 목소리로 한반도의 젠더를 분석하려는 첫 시도”(11면)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들이 자신을 ‘청년’으로 정체화하는 동시에 페미니스트 분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책의 기획은 분명 몰성성에 기초한 기존의 청년 담론에 “색다른 시선을 보탤 것”(11면)이다. 더불어 이 책은 독자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돌아보도록 장려하고, 개인에게 끊임없이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사회구조와 정치질서라는 거대 구조에 대한 질문과 분석으로 나아가게끔 독려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선언’ 이상의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