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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한성훈 『인민의 얼굴』, 돌베개 2019
무대 뒤에서 바라본 가면 속 얼굴
예동근 芮東根
부경대 중국학과 교수 99yegen@hanmail.net
한번에 쭉 읽을 수 있는 북한 관련 책 한권을 오래간만에 쥐게 되었다. 『인민의 얼굴: 북한 사람들의 마음과 삶』이다. 국내외의 방대한 자료를 엮어냈음에도, 군데군데 사진 자료로 현장감을 더해가며 지루할 틈 없이 ‘오늘날’의 북한을 담아냈다. 무엇보다 실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한 점이 인상적이다.
1부 ‘흔들리는 인민’은 김일성 주석의 장례식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날의 풍경을 따라가다보면, 북한 인민들이 목 놓아 슬퍼하는 바탕에 “충성과 효성”(37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모습이 나는 책의 첫 페이지에 자리한 “평생 몸 쓰는 일을 하다 떠난 어머니 류칠영(1930~2018)을 추모하며”라는 헌사와 포개어져 읽혔다. ‘나의’ 어머니를 깊이 기리는 마음과 ‘우리’의 아버지를 애도하는 마음은 얼마나 다를까. ‘인민의 어버이’를 경험해보지 못한 남한 사람들의 눈에 거리에서 통곡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쩌면 ‘리얼리티 쇼’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과 그 장례식 장면을 남한 박정희 대통령과 소련 스딸린 서기장의 사망 당시와 비교하며 북한 인민의 눈물이 쇼가 아니라 ‘진심’임을 읽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3대 세습과 권력승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파헤친다.
흔히 북한은 ‘왕조국가’ ‘극장국가’로 인식된다. ‘독재’ ‘잔인’ ‘로봇 같은 집단체조’ ‘똑같은 표정’ ‘리춘희 아나운서’ 등의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조선중앙 TV에서 호랑이 같은 표정으로 산이 흔들릴 듯 큰 목소리를 내는 리춘희 아나운서가 홍콩매체와 인터뷰할 때는 점잖게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걸 보았다. 마치 이웃집 할머니 같았는데, 남한 사람 대부분은 그런 무대 뒤 모습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의 의의도 북한 인민의 일상적인 민낯을 보여주려 한 데 있다. 저자는 북한의 정치적·경제적 모습도 스케치하지만 탈을 벗은 인간의 모습에 집중했다.
그런데 2부 ‘인민의 일상생활’에서는 이 자연스러움마저도 통제되고 조직되었음이 드러난다. 저자는 일상생활 공간에서 나타나는 구호와 슬로건 등을 관찰하고 북한 인민의 일상이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공포와 충성심이 인민의 내면에서 어떻게 재조직되는지를 밝혀낸다. 그런데 저자가 협동농장의 모습, 선전선동의 구호에서 발견해 북한의 특수성으로 제시하는 ‘일상의 정치화’ ‘속삭이는 사회’ 등은 지나치게 전쟁사회에 집중한 감이 있다. 북한의 문학, 영화, 드라마 등을 폭넓게 살폈다면 일상생활의 다른 면모도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북한의 ‘성분사회’에 대한 내용도 다소 아쉬운데, 64개 성분 분류를 알려주면서 ‘계층 간 이동 욕구’ ‘신분 전환의 가능성’ ‘계급투쟁’ 같은 탈구조화 행위와 그 내면에 자리 잡은 본능적 욕망을 함께 짚었다면 어땠을까.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행위를 보지 않고 ‘장마당’과 ‘경제욕구’만 반영한다면, 북한 인민을 ‘피해자’ ‘해방되지 않은 노예’로 재현한 기존의 인민상(像)을 넘어서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는 남북 간의 체제경쟁을 정당화하거나, 자칫 남한이 북한 해방의 주체라는 논리를 배양한다는 오해를 낳을 수도 있다. 아무리 ‘정치화된’ 일상생활이라 할지라도, 아직 정치화되지 않은 0.01%가 있다면 거기에 숨어 있는 새로운 ‘주체’를 찾는 것이 남한 학자들의 과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저자가 새롭게 포착해내려 노력한 대목도 눈에 띈다. 3부 ‘인민의 내면세계’에서는 신천학살사건을 중심으로 남북한을 ‘하나의 장’으로 환원하는데, 같은 사건이 남북에서 서로 달리 역사화되는 양상을 날카롭게 해부했다. 이는 ‘통일’을 염두에 둔 작업이라는 점에서 지금 북한에서 행해지는 연구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특히 3부 말미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온 사람들’ 이야기는 거대한 극본이 마무리되는 느낌을 주었다. 책을 덮으며, 인민의 주체성은 무엇인지 다시 묻고 싶어졌다. “오늘을 위한 오늘을 살지 말고 래일을 위한 오늘을”(55면) 사는 인민, “전체로서의 하나”(337면)로 사는 그 인민의 주체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남한은 과연 그들의 해방구인가. 남한은 그 인민들에게 “개인의 발견”(312면)을 가능하게 하는 변화의 땅인가.
어릴 적 세뱃돈으로 강철제련소 노동자가 쇠고리를 든 모습이 그려진 5위안짜리 지폐를 받은 추억이 있다. 말도 제대로 모를 때라 “쿡 찌르는 것 주세요”라고 한 기억도 난다. 그 당시 두번째로 단위가 큰 화폐였는데, 1960년대부터 발행된 세번째 도안이었다. 1위안짜리에는 트랙터를 모는 여성이, 2위안짜리에는 자동차를 만드는 노동자가, 그리고 최고액권인 10위안짜리에는 인민대표대회당 앞에 선 소수민족, 노동자, 농민, 여성, 지식인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이것이 ‘인민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은 한때 이런 모습으로 인민을 재현했다. 노동자, 농민, 소수민족은 잠시나마 역사 무대의 한가운데에서 활약했고, ‘좋은 성분’이라 불리며 정치적·경제적·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밀려났고 중심부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중국의 화폐에는 이제 1위안부터 100위안까지 모두 마오 쩌둥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지금 북한 인민의 얼굴은 어떤가. 수천수만의 김일성, 김정일의 얼굴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광부 아버지의 거무스름한 얼굴, 뜨락또르(트랙터)를 운전하는 누나의 얼굴, 미소 짓는 어머니의 얼굴, 책 읽는 귀여운 남동생의 얼굴이 각각 살아 움직일 것이다. 물론 중국처럼 북한 인민의 삶도 급변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중국인이 마오 쩌둥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니듯이 북한 인민에게도 각자의 얼굴이 있다. 이 얼굴을 떠올려보는 것이 나에게는 인민의 주체성을 생각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