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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남궁석 『암 정복 연대기』, 바이오스펙테이터 2019
암 정복, 이제야 출발선에 서다
최형섭 崔亨燮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choi@seoultech.ac.kr
최근 한국사회에서 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부쩍 높아졌다. 각종 암을 소재로 한 TV 프로그램들이 눈에 띄며, 홈쇼핑 채널에서는 암을 예방하거나 치료효과가 있다는 식품이 성황리에 판매된다. 이는 아마도 예전에 비해 한국인의 암 발생률이 상당히 증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암연구기금(WCRF)이 2019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암 발생률은 세계 14위다. 암은 이제 우리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 질병이며 암에 대한 높은 사회적 관심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일 테다.
암에 대한 사회적 인식 역시 예전과는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문필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1978년에 지적했듯이 암은 오랫동안 일종의 인과응보로 받아들여졌다. “희생자가 자신의 세계와 자신 스스로에게 저지른 일의 결과”(『은유로서의 질병』, 이후 2002, 74면)라는 생각이었다. 판사가 죄인에게 형벌을 선고하듯 의사는 환자에게 암이 발병했음을 ‘선고’했다. 하지만 암 환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암에 대한 지식이 축적되고 그에 따른 효과적인 치료방법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암은 관리가 가능할 뿐 아니라 완치까지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럼에도 암이라는 질병의 영역에서 전문가와 대중의 이해도는 여전히 상당한 거리가 있다. 의사는 나름대로 비전문가인 환자에게 설명을 해주지만 그 설명은 근본적으로 단순화한 것일 수밖에 없다. 환자와 그 가족 입장에서는 이렇게 단순화된 설명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알지 못할 질병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같은 입장에 놓인 이들의 ‘환우회’나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각종 정보를 얻게 된다. 이러한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신뢰할 만한 정보를 비전문가가 취사선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끔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누구는 다른 병원에서 이런 치료제나 치료법으로 효과를 봤다는데 왜 내 담당 의사는 그것을 권하지 않는가’ 같은. 대개 이런 오해는 다양한 종류의 암과 개별적 유전자 구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암 정복 연대기: 암과 싸운 과학자들』은 암을 둘러싼 과학자들의 오랜 분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창문을 제공한다. 이 책은 현재까지도 사용되는 대표적 암 치료제 세가지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소개한다. 1부에서는 골수성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의 탄생을, 2부에서는 유방암 표적항암제인 ‘허셉틴’의 개발을, 마지막 3부에서는 ‘키트루다’를 비롯한 몇가지 면역관문억제제의 등장을 다룬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세계 각국의 여러 과학자들이 암이라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을 꼼꼼하게 추적한다. 저자의 안내를 따라 그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현재 인류는 (제목과는 달리) 암을 전혀 ‘정복’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과학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제한적 조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낸 치료제들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암 정복 연대기’를 이제 막 쓰기 시작했을 따름이다.
현재까지의 암 정복 연대기에서 눈여겨볼 점은 두가지이다. 첫째, 이 책에서 다루는 암 치료제들이 아주 최근에야 개발됐다는 사실이다. 가장 빠르게 등장한 ‘글리벡’이 임상시험을 거쳐 미국식품의약청(FDA)의 승인을 받은 것은 2001년이다. 그전까지 방사선이나 화학적인 방식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었던 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이 불과 20년도 되지 않은 것이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암과의 전쟁’을 선포할 당시만 해도 암을 유발하는 병원체(바이러스)를 찾아내려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분명히 짧은 기간에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왔다. 둘째, 이렇듯 단기간의 눈부신 발전은 그보다 훨씬 오랜 기간 동안 과학자들이 축적해온 기초연구의 성과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이다. 유전학·면역학 등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과학자들이 특별한 실용적 목적 없이 그저 생명의 작동 원리를 이해할 목적으로 노력을 거듭해왔다. 우리의 미래를 내다볼 때, 그 당시 과학자들의 연구비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동기를 갖고 연구 프로그램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암 정복 연대기』가 친절한 책은 아니다. 생화학을 전공한 과학자답게 저자는 복잡한 과학을 쉽게 요약해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이 책이 어떤 입장에서 쓰였는지는 각 부 말미의 주석에서 잘 드러난다. 약 200개의 참고문헌은 몇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당 시기 전문 학술지에 게재된 과학·의학 논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의 타깃층은 교양과학서를 찾는 독자들이라기보다는 생명과학전공자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치른 암 정복 연대기를 살펴보는 이유는, 남은 싸움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에 대한 영감을 얻기 위해서다.”(4면) 그렇다고 해서 교양 독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전작인 『과학자가 되는 방법』(이김 2018)만큼 재기 넘치는 문체는 아니지만 시간을 들여 읽어나가면 비전공자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과학도서의 역사에서 이 책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과학자가 자신의 전공분야에 대해 성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런 면에서 『암 정복 연대기』는 ‘초파리 과학자’로 알려진 김우재의 『플라이룸: 초파리, 사회 그리고 두 생물학』(김영사 2018), 『선택된 자연: 생물학이 사랑한 모델 생물 이야기』(김영사 2020)와 맥을 같이한다. 이렇게 과학현장과 가까운 과학자들이 더 많은 목소리를 스스로 낼 수 있게 될 때 한국의 과학문화도 한층 더 풍성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