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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데이비드 콰먼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 꿈꿀자유 2020
인수공통 전염병이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최형섭 崔亨燮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choi@seoultech.ac.kr
미국에서 박사과정 2년차가 끝났을 때의 일이다. 그해 초 결혼을 하고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봄학기를 무사히 마치고 여름방학에 돌입했을 무렵 매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국에도 매미가 있군, 정도의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그 전해 여름에는 매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매미 울음소리는 날이 갈수록 커졌다. 5월 말이 되자 동네 나뭇가지마다 엄청난 수의 매미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거리에는 매미가 허물을 벗고 남겨둔 외피가 수북이 쌓여 밟지 않고는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미국 동부를 중심으로 수조마리가 출현했다고 한다.
내가 목격한 매미 대유행(outbreak)은 평소에는 인간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생태계의 작동을 드러내 보여줬다. 2004년의 그 현상은 그로부터 17년 전인 1987년 애벌레 시절을 보내고 깊은 땅속으로 들어갔던 ‘X종’(Brood X) 매미들이 번식을 위해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 것이었다. 인간은 다른 종들을 밀어내고 콘크리트와 철강으로 빈틈없는 물질문명을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 과학자들은 매미 대유행 직후 인근 숲 식물군의 질소 함량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번식을 마친 매미들의 사체가 귀중한 영양 공급원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오랜 기간 자연을 밀어내고 인간의 문명을 유지한 지역도 거대한 생태계 순환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음 매미 대유행은 2021년에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대중의 뇌리에서 사라져갈 무렵 재발하는 미국 동부의 매미 대유행은 시끄럽고 성가시다는 것 외에는 인간 생활에 직접적인 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인지 인간과 그럭저럭 균형을 유지하며 이색적인 현상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어떤 생물종의 대유행은 인간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기도 한다. (바이러스가 생물인지 무생물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있지만) 최근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 대유행이 그런 사례 중 하나다. 특히 코로나19와 같은 바이러스성 질병의 대유행은 해당 개체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을 비롯한 각종 동물을 숙주로 삼아 퍼지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더욱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인간은 역사상 여러 질병의 대유행을 겪었고 그때마다 박멸을 위해 각종 노력을 경주해왔지만 많은 경우 실패했다.
그렇다면 새로운 바이러스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올해의 코로나19 대유행은 중국 우한시의 야생동물 시장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박쥐를 비롯한 각종 야생동물을 포획해 식용으로 쓰는 과정에서 일부 동물을 숙주로 삼아 활동하던 바이러스가 인간을 감염시켰다고 추측되는 것이다. 새로운 바이러스에 면역력을 가진 인간이 없기 때문에 일단 종간감염(spillover)이 일어나면 급격하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역사적으로 종간감염에 의한 신종 바이러스의 전파는 여러차례 있었고, 지난 수십년 사이에 그 발생 속도가 점차 빨라지고 있다. 데이비드 콰먼의 『인수공통 모든 전염병의 열쇠』(강병철 옮김, 초판 2017)는 에볼라, 사스, HIV 등 여러 사례를 복기한다. 경험 많은 과학저술가인 저자는 문헌자료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인터뷰를 통해 여러 바이러스가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오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작금의 코로나19 팬데믹은 전혀 놀랍지 않다. 오히려 종간감염 연구자들이 예측한 그대로 일어났다는 점이 놀랍다면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코로나19 사태는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충분히 예고된 시한폭탄이 터진 것에 불과하다. 실제로 저자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전세계 많은 나라들이 이토록 준비가 돼 있지 않았을까”라는 점이 의아하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사태 초기인 지난 2월 초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신종코로나바이러스, 끝이 아닌 이유」(강양구)에 따르면 인수공통 전염병의 가속화는 세계화와 기후변화의 시대에 예견할 수 있는 경향이다. 이렇듯 새로운 전염병의 창궐은 최근 우리가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기 시작한 지구적 변화의 한 측면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의 여러 사례들은 인류가 새로운 전염병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시사점을 준다. 현재 우리 모두 절감하고 있듯이 전염병이 이미 퍼지기 시작한 후의 방역활동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콰먼의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따로 있다. 지금도 세계 각지의 전염병 관련 연구기관들에서 과학자들은 언제 쓰일지 알 수 없는 여러 종류의 병원체를 채취해 보관하고 있다. 언제 어디에서 사람들이 원인 모를 질병으로 면역계의 발작 작용을 일으키며 죽어갈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는 수십년 전에 전혀 다른 목적으로 채취한 검체가 예기치 못한 시점에 문제를 풀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다. 근대 과학의 성립 이후 우리는 모든 자연현상이 실험실에서의 정제된 환경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험관 안에서 지식을 추출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영역에서 자연사(自然史) 전통의 명맥을 잇는 현장(field)에서의 과학활동이 갖는 의미를 무시할 수 없다. 일견 무용해 보이는 백과전서식 지식의 힘이다. 이러한 과학활동은 빅데이터의 시대에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이제 인류는 본격적인 위기의 시대에 돌입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인간이 자연과 선험적으로 분리된 독특한 존재라는 근대적 사고로는 위기에 대응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인간이 복잡한 생태계와 지구라는 환경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겸허한 자세로 돌아보는 과학활동이 앞으로 더욱 절실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