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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박혜숙 『한국한시의 장르적 시각』, 소명출판 2020

고전문학 연구의 황금기를 떠올리다

 

 

이현일 李炫壹

성균관대 한문교육과 교수 translator@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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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91년에 발표한 「김려의 『사유학부』」부터 2000년에 발표한 「이학규의 악부시와 김해(金海)」에 이르기까지 꼭 10년 동안 저자가 서사한시와 악부시를 읽고, 고민하고, 사유한 글 아홉편을 모은 결과물이다.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다듬어 출간한 『형성기의 한국악부시 연구』(한길사 1991)가 주로 고려시대의 악부시를 다루고 있는바, 이 책은 그 후속작업의 성격을 띠고 있다.

모두 2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제1부는 서사한시, 제2부는 한국악부시를 논한 글들을 배치하였다. 제1부의 「서사한시와 현실주의」는 임형택이 편역한 『이조시대 서사시』(전2권, 창작과비평사 1992, 개정판 창비 2013)의 비판적 해제이며, 「서사한시의 장르적 성격」과 「한국 한문서사시의 개념과 전개 양상」은 서사한시의 갈래론을 세우고,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는 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보론으로 실린 「서사가사와 가사계 서사시」는 서사가사 갈래론으로, 가사가 ‘교술’로 편정된 조동일의 갈래체계에 대한 보완과 도전으로 생각된다. 제2부의 「조선 전기 악부시의 양상」은 조선 전기 악부시 개관이며, 「조선 후기 악부시의 지방 인식」은 특정 지방을 읊은 악부시들에 드러난 지방 인식을 탐구하였다. 「김려의 『사유악부』」와 「이학규의 악부시와 김해」는 조선 후기 가장 탁월한 악부시인들의 작가·작품론이며, 마지막에 실린 「한국악부시의 근대적 행방: 김상훈의 경우」는 북을 택한 문인인 김상훈의 활동과 작품을 통해서 근대시의 악부시 계승 양상을 추적하였다.

본디 ‘악부(樂府)’는 중국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전국 각지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채집하고 궁전에서 공연하도록 다듬는 일을 하는 것이 그 직분 중의 하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음악은 사라지고 노랫말만 남는 경우가 많았고, 이를 ‘악부시’라 일컫게 되었다. 우리 문학사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도 악부시이고, 악부시의 범위를 ‘노랫말’ 일반으로 확장하면, 노벨문학상을 받은 밥 딜런(Bob Dylan)도 악부시 작가라 일컬을 수 있다. 중국과 우리 한문학사에서는 후대 문인들이 옛 악부시를 본떠서 지은 작품들이 ‘악부시’의 범주에 추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와 아주 대조적으로 치열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시인이 목도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작품들까지도 보태지게 되었다. 제1부에서 ‘서사한시’로 논한 작품들은 한문학의 전통적 분류에서는 거의 악부시로 소속시킬 수 있다.

저자가 깊은 애정을 품고 “어두운 서고에서 불러내 우리 문학사의 주류에 포함시키고 소중한 문학유산으로 활용되게 하고 싶다는 소망”(3면)을 품은 작품들은 물론 당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입문한 연구자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온전히 읽기 위해서는 (민중)민족주의, 현실주의, 내재적 (근대) 발전론을 이해해야 하고, 당시 선배 학자들이 한국문학의 갈래이론을 세우고 체계적인 문학사를 서술하기 위해 얼마나 간절한 염원을 간직하고 분투했었는지 살펴야 한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전문적인 학술서도 많지 않았고, 논문이 걷잡을 수 없이 양산되기 전이었다. 작품집으로는 이우성·임형택 두분이 엮고 번역한 『이조한문단편집』(전3권, 일조각 1973~78, 개정판 전4권, 창비 2018), 위에서 언급한 『이조시대 서사시』, 연구서로는 조동일의 『문학연구방법』(지식산업사 1980)과 『한국문학통사』(전6권, 지식산업사 1982~88, 개정4판 2005), 임형택의 『한국문학사의 시각』(창작과비평사 1984) 등을 고전문학도라면 읽고 또 읽고 토론해가며 공부했다. 또 『고전문학연구』나 『한국한문학연구』의 최신호가 학교 도서관에 들어오면, 첫 논문부터 마지막 논문까지 빠짐없이 읽으면서 지적인 갈증을 채웠다. 평자는 이 책에 수록된 글 여러편을 발표되자마자 최신 연구성과로서 열심히 찾아 읽고 공부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이 책에는 조동일, 임형택 같은 한국고전문학계 거장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 있으며, 여기 실린 글들은 대가들의 학문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보완하고 극복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평자는 서평을 쓰다가 문득 이 글들이 발표되던 시기가 어쩌면 우리 고전문학 연구의 황금기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학의 전통을 몸으로 체득하신 원로 선생님들부터 근대적인 고등교육을 받고 대학에 자리 잡은 중견, 신진 학자들이 치열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장학금 한푼 주지 않아도 청년들이 공부에 뜻을 두고 계속 대학원으로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또 세속적인 목적이 아니라, 학자의 학문적 호기심과 지식인의 시대적 사명감으로 추동되어 쓴 글이 많았기에 학회에서의 논쟁은, 말석에 가만히 숨죽이고 지켜보던 ‘구경꾼’이 느끼기에도, 지금보다 훨씬 진지하고 심각했다고 기억된다.

지난 20여년 동안 여러가지로 사회현실이 바뀐데다가, 신자유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맹렬한 좌우협공으로 이제 ‘현실주의’도 ‘민족주의’도 ‘갈래이론’도 ‘문학사’도 모두 빛바랜 사진처럼 되었고, 학자들에게 지식인으로서의 사명감도 별반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소심한 성격의 평자가 학자·문인·기자·출판편집자들이 ‘詩’와 ‘時’를 구분하지 못하는 수준의 실수들을 발견할 때마다 한숨을 쉬는 일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자. 저자가 한국 악부시가 최고조로 발전한 시기로 평가한 조선 후기 악부시에 대한 논고가 2편에 그치는 점은 못내 서운한데, 저자가 편역한 『부령을 그리며: 사유악부 선집』(돌베개 1996)을 찾아 읽으면 어느정도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