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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경위
제13회 창비장편소설상에는 총 313편이 응모되었다. 심사위원들은 상당한 편수의 응모작들을 마주하면서 각각의 작품이 지닌 장편소설로서의 미덕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 동시에, 오늘날 긴 이야기를 쓰는 많은 이들의 열망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조심스레 가늠해보는 심사과정을 가졌다.
예심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었던, 응모작들의 특징 중 하나는 가독성이 좋다고 느껴질 정도로 대체로 간단한 문장을 구사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독자와의 접면을 형성할 때 큰 장점일 수 있겠지만 ‘쉽게 읽힌다’는 차원이 문장의 구성력에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라, 서사가 확보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시야나 감당하고 있는 고민의 차원, 삶에의 밀착 정도까지 연결된 것일 수 있어서 예사로 여겨지지 않았다. 우선은 시대현실을 상기시키는 사회적 소재를 다룬 상당수 작품들이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키워드를 개별적인 에피소드의 나열이나 단순한 인물관계도, 서술자의 고립된 자의식으로 수렴하는 방식으로 구현함으로써 장편 특유의 이야기의 힘을 키워내지 못하고 있었다. 청년실업, 계층 간 갈등, 젠더 이슈, 기후변화 등의 민감한 주제가 집중적인 형식으로 펼쳐지지 못한 점이 아쉽게 다가왔다. 한편 역사적인 소재, 살인사건 등 장르적인 장치를 활용한 작품의 경우 삶을 응시하고 해석하는 관점을 확보하지 못한 경향으로 인해 독자가 ‘왜 하필 지금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하는지’를 설득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 드라마, 만화, 게임 같은 대중문화 장르의 코드를 유연하게 활용함으로써 특유의 활력을 갖춰나가는 방식은 장편소설의 주요한 역량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해당 소재를 활용하되 소재주의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과 시대현실에 관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현재와의 연관 속에서 심도 있게 탐구할 때만이 장편소설의 예술적인 성취 역시 이뤄지리라는 생각을 새삼 하게 만들었다.
본심에서는 두 작품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다. 『끝이야 다시 시작』은 ‘자객단 가족’이라는 소재의 특이성과 깔끔하고 민첩한 화법이 강점인 작품이었다. 헤겔의 ‘합기도 입문’이라는 가상의 책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해 사회적·철학적 문제를 ‘자객단’으로 단련된 한 가족의 일상으로 소환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치가 내내 유지되는 면이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작품 전반이 삽화의 나열만으로 구성되어 큰 줄기로 삼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약해 서사구조의 완결성을 논하기엔 미흡한 점이 있었다. 작품이 추구하는 풍자의 시선이나 포착하려는 시대현실이 모호해서 소설 전체를 아우르는 주제가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태양의 모험』은 ‘써니텐’이라는 인물의 가족사와 게임 플레잉 서사가 맞물려 추리, 스릴러, 모험담 등의 장르적 재미를 형성한 작품으로, 이야기가 전하는 정보를 해석하고 개연성에 대한 질문을 추궁해나가는 과정에 끊임없이 독자의 참여를 유발하는 매력이 있었다. 가상현실 속에 던져진 정체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현실, 환상, 꿈, 기억을 오가면서 창세기를 써나간다는 전체적인 기획은 익숙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과 자연, 언어와 상징, 테러리즘, 가족과 트라우마 등을 가볍고 유연하게 다루면서 이야기를 끌고 나가려는 작가의 의욕이 돋보였다. 하지만 사회적 사건이나 역사적 사실을 물화하여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언급되는 각종 상징에 대한 접근이 상투적이었고, 구심력과 장르적 긴박감이 약해 이야기를 활달하게 진행시키지 못한다는 약점 또한 있었다.
두 작품이 갖춘 미덕이 작품의 약점을 상쇄할 만큼 발휘되지 못하고 있어서 심사위원 모두의 아쉬움이 컸다. 우리가 삶의 여느 국면에서 빛나는 만남을 가졌던 작품들이 그래왔듯, 좋은 장편소설은 모호한 가능성이 아닌 구체적인 실감으로서 독자들 앞에 자신이 구축한 상상력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당대성에 대한 사유와 감각을 서사화하면서도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미래를 향한 촉수를 예민하게 던지는 작품에 대한 기대를 끝까지 놓을 수 없었다. 이같은 생각이 심사위원들로 하여금 심사결과에 대해 엄정한 자세로 오래 숙고하도록 만들었다. 장시간 토론과 논의를 거친 끝에 ‘당선작 없음’이라는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장편소설상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의 관심과 정성에 깊이 감사드린다.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을 함께 고민하는 자리에서 ‘또다른’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로 만나뵙기를 빈다.
김영찬 백지연 양경언 전성태 편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