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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허영선 許榮善
제주 출생. 1980년 『심상』으로 등단.
시집 『추억처럼 나의 자유는』 『뿌리의 노래』 『해녀들』 등이 있음.
ysun6418@hanmail.net
빌레못굴 비가
더이상 한촉의 눈을 빌려주지 않았어
깊고 캄캄하여서 소리를 삼켰어
결코 안 들렸어 통로가 안 보였어
땅의 아가리 속에서 우린 애벌레처럼 웅크렸어
어디로 갔나요
날개 없는 목소리가 들리나요
내 목소리는 더이상 당신에게 갈 수 없나요
날카로운 동굴의 혓바닥이 천장에 박혀
우리의 지점을 뚫지 못했어
비명은 박쥐처럼 바위에 붙었어
하루에도 수천번 온다던 당신은 오지 않았어요
더 깊숙이 여릿한 횃불 하나가 우릴 몰았어요
돌의 길을 갔어
여러 날을 울었으나 울지 못했어
마른 손가락은 푸들거렸으나 붙잡지 못했어
어쩌다 가물가물 모든 빛이 닫힌 거기까지
아이가 당신을 기다렸어요
벼락 치는 소리가 들렸어요
당신의 소리는 오다가 꺾였어요
나의 소리는 당신의 소리에 닿지 않았어요
돌 숨에 맡겨 허적
허적 조금만 더 더듬어봐 안전지대란 없어
굴은 오래오래 기다려온 자의 얼굴로
우리의 모든 숨을 빼 갈 태세로 어둠을 내렸어
뱅뱅 격리된 채 우리들의 거리는
어째서 더 멀어져갔을까
어쩌다 돌의 어둠에 빠진 걸까
돌아봐요 나의, 돌의 울음 거기 어디쯤 있는지 돌아봐요
당신 목소리가 닿았던가 나의 소리는
굴을 뚫고 한치도 더 나가지 못했어
모공에 박혀 뚝뚝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물의 목소리를 들어보아요
손톱 발톱 이미 문드러진 소리들이
맨발로 아우성치는 것이 보일 거여요
걸어온 만큼 울퉁불퉁 돌짝에 긁히고 엎어졌어 소리는
돌에 쪼인 새의 부리처럼 피 흘리며 부러졌어
더이상 두드리지 말아요
밤눈 깊은 짐승도 길을 못 찾는다는
우린 그물에 걸린 목숨들이야
눈보라의 동굴에 갇혔어 밖은 동굴의 묘지
이미 목소리는 바람의 모서리에
이리저리 찍히고 나동그라졌어
제발 내 말을 들어주세요 조건이 있나요
내 아이를 죽이지 말아주세요
내 아이에게 푸른 날개를 달아주세요
굴의 내장 속에서 우린 꼼짝없이 기다릴게요
이젠 돌아갈 순 없어
이전 세상으로 돌아갈 순 없는 거야
지느러미로 출렁이는 동굴 안이든 동굴 밖이든
우리가 만나야 할 목소리의 지점을 찾아가야지
우린 바닥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잖아
툭 문밖에서 들어온 푸른 잎사귀 하나, 귀 기울이지
—
* 4·3시기 1949년 1월 16일 토벌대는 제주시 어음리 빌레못굴에 은신했던 주민들을 발견, 어린아이들을 포함 24명을 굴 밖에서 학살했다. 30여년이 지난 후 굴 속에서 모녀 등 4구의 유해가 발굴됐다.
왈락 물 위로 올라오던
해녀 양병생
나는 왜 물에 있는 거지?
그때 그해
황해도 물질 가서
물바람 속 고향 소식 들었습니다
물에 들어 왈락 하면 물 위로 솟았습니다
어머니 죽었단 소식에 왈락 오르고
그 눈 위 어머니 가슴에 엎어져
어린 눈 감았다는 어린 막내 떠올라 왈락
곱디곱던 열일곱 내 동생
아버지 손 잡고 살려달라 구비돈 마을 어귀서
한발에 고꾸라졌단 소식에도 왈락 했습니다
등과 등 맞대던, 피와 피 섞인 사람들 다 가고 없는데
나 혼자 물속에서 뭐 하는 거지?
나는 뭐 하는 거지?
그도 모자라
산으로 간 내 사랑 끝내 죽었단 소식 듣던 날
물 눈은 모래 폭풍
온몸으로 바다를 끌고 끌다가
타향 바다 갯바위에 올라앉아서
필사적으로 쓸려오는 눈동자와 싸웠습니다
물 아래 바윗살에
무르팍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데
구멍 숭숭 생기는 줄도 모르고
한조각 분홍 심장 타오르면 올랐습니다
귀가 막힐 때마다 허청대는 발등을 찍었습니다
비틀대며 배회하던 슬픈 물질의 날
바다 소금이 울음을 살살 치고 있었습니다
눈물이 바다였다가
바다가 눈물이었다가
문득 손에 잡힌 것들 놓쳤습니다
그냥 움켜쥐지 않고 올라왔던가요
수없이 버렸습니다
잃는 건 두려웠어요
사라지지 않고 오는 생은 어디 있나 몰라
그런데도 포기할 수 없어
붉은 눈물 휙휙 속바람 날리던
한세상 무너졌다 세우던, 그때 그해
황해도 물질
지금도 왈락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