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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로리 윙클리스 『도시를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과학』, 반니 2020
당신의 발밑에는 무엇이 있는가
최형섭 崔亨燮
서울과학기술대 교수 hchoi@seoultech.ac.kr
몇해 전 근무하던 대학의 익숙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항상 지나던 길가 옆 잔디밭에 작은 깃발이 꽂혀 있었다. 처음 보는 표지라 궁금한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았다. 붉은색 글씨로 ‘도시가스관 매설지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관련 법령을 뒤져보니 ‘도시가스사업법’에 따라 굴착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도면을 통해 가스 배관을 확인한 후 그 위치를 알아보기 쉽도록 표시하게 되어 있다. 내가 본 깃발은 비포장도로에서 도시가스 배관이 묻혀 있는 위치를 나타내는 것으로, 매설 배관의 손상을 예방하기 위한 ‘도시가스 배관보호 기준’에 따라 설치한 것이었다.
우리 발밑에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지나고 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내가 사는 아파트 13층으로 도시가스가 공급돼 가스레인지를 켤 수 있겠는가. 싱크대에서 사용하는 수돗물은 어떻게 나오는 것이며, 전기는 어떻게 들어오는 것이겠는가. 화장실에서 물을 내리면 어느 배관을 통해 배출되어 정화시설로 모아진 후 다시 강물로 배출되겠는가. 결국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많은 기능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누군가 굴착공사를 하다가 수많은 배관 중 하나라도 건드린다면 대단히 성가신 일이 일어날 것이다. 따라서 어디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도면이 있을 것이고, 땅을 파기 위해서는 이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게 했을 테다.
로리 윙클리스(Laurie Winkless)의 『도시를 움직이는 모든 것들의 과학: 거대한 도시의 숨은 원리와 공학 기술』(Science and the City, 2016, 이재경 옮김)은 지하에 매설되어 있는 인프라를 포함해 도시가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많은 시설물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하는 책이다. 저자는 과학자 출신답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맞닥뜨리게 되는 장치들의 원리를 쉽게 풀어 쓴다. 이 책에서 다루는 소재들은 상하수도나 도로와 같이 인류 문명의 변천과 함께해온 것들부터 열차, 전기, 마천루 등 산업화 이후에 등장한 것들까지를 포괄한다. 이는 현재의 도시가 켜켜이 쌓인 인프라들의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는 사실을 반영한다. 팔림프세스트란 기록된 원래 문자를 씻어 지운 후에 다른 내용을 덮어 기록한 양피지를 말하는데, 도시도 마찬가지로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 위에 새로운 것을 덮어쓰는 방식으로 진화한다.
2017년 기준 한국에서 도시에 거주하는 인구의 비율은 91. 82퍼센트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시의 작동 원리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곧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기반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류는 탄생한 이래 점점 더 많은 인공물로 스스로를 둘러쌌다. 이제는 자연 환경보다 ‘인공 환경’(built environment)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됐다. 근래 자연-기술의 접점에 대한 관심은 자연과 기술이 더이상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버린 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층건물을 세우기 위해 흙바닥에 철근콘크리트 파일을 박고, 홍수를 예방하기 위해 강변에 둑이나 고수부지를 설치하며, 더 편하게 이동하기 위해 아스팔트 도로를 깔고 터널을 뚫는다. 이제 우리의 일상은 이러한 장치 없이는 상상할 수 없다.
땅과 바다, 강과 산에 대한 학문인 지구과학에 대한 이해가 지구상에서 삶을 영위하는 지성을 갖춘 생명체로서 기본 교양에 해당한다는 것은 이미 상당히 받아들여진 듯하다. 하지만 자연 환경에 인공 환경이 덧씌워진 오늘날, 혼종적인 자연-인공 환경에 대한 이해 역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지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윙클리스가 이 책을 쓴 목적 역시 여기에 있다. 옛날 옛적의 자연철학자들이 천체의 운행과 조차(潮差)의 원리에 대해 궁금해했듯이 그는 “교통 신호등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전선 위의 새들은 어째서 감전되지 않는지”(8면) 묻는다. 평자는 오래전부터 서울시내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크레인에 대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크레인을 설치하는 현장은 한번도 직접 목격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롯데월드타워처럼 엄청난 높이의 마천루를 지을 때 사용하는 크레인은 도대체 어떻게 설치하는 것인가. 이 책을 읽으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이렇듯 공학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추는 일은 현대 인류의 존재 조건에 대해 생각해보는 과정이기도 하다. 도시 인프라와 운송 수단 등의 이면에 숨어 있는 과학적·기술적 원리에 대해 비전문가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설명함으로써 이 책은 시민으로서 우리가 알아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확보할 수 있게 해준다. 영국의 소설가 C. P. 스노우(Snow)는 1956년 『두 문화』(The Two Cultures)라는 강연집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도 열역학 제 2법칙이 무엇을 설명하는지 정도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지금, 가령 우리가 매일 스마트폰을 통해 빛보다 빠른 속도로 막대한 양의 데이터를 세계인들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과학기술적 원리에 대한 이해 정도는 21세기 교양인의 기본 소양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윙클리스의 책을 읽고 인간을 둘러싼 인공 환경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다면, 한국의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인공물들이 어디에서 왔고 그것이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를 위해서는 몇해 전 출간된 『시민을 위한 테크놀로지 가이드』(반비 2017)에 실린 기계비평가 이영준의 글들과 문헌학자 김시덕이 직접 서울 전역을 돌아다니며 쓴 답사기인 『서울 선언』(열린책들 2018)과 『갈등 도시』(열린책들 2019)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