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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강상우 『김군을 찾아서』, 후마니타스 2020
망각에 저항하는 부재의 기록
심영의 沈永儀
문학평론가 syeui@hanmail.net
『김군을 찾아서』를 쓴 강상우 감독은 그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2018)에 미처 담지 못했거나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이 책에서 정리하고 있다. 그가 찾는 ‘김군’은 누구인가.
북한특수군 600명의 5·18 개입을 주장, 선동하고 있는 지만원이 광수(광주 북한특수군) 1번으로 지목한 김군, 이름은 물론 지금까지 종적을 알 수 없는 김군, 당시에 넝마주이 청년으로만 알려진 김군, 어쩌면 도청과 금남로 일대에서 한두번은 마주쳤을 김군, 아마도 1980년 5월 24일 계엄군이 송암마을 주민들을 학살할 때 공수부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김군. 이 책과 영화는 그 ‘김군’을 찾기 위해 무려 7년 가까이 10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나 인터뷰한 저자의 숭고한 열정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보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던 한 사람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그동안 망각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80년 광주에 연루된 사람들의 다양한 이해와 참여 동기를 무시하고 단일한 구도로 그날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기억과 역사를 전적으로 동일하게 보아온 오류에 일정한 충격을 가한다.
“아니, 해야 될 일이니깐 하는 거여. 형제애나 그런 것도 거기다 이름 붙이는 것도 솔직히 내가 생각할 때는 사기여. 그냥 자연스러운 거여, 자연스럽게 한 거라니까. 끈끈한 정이랄까 투사의식이랄까, 소명의식이랄까 이것도 아니여. 해야 되는 거니까 자연스럽게 한 거여.”(190면) 시민군으로 참여한 서한성씨의 말이다. ‘당신들은 왜 그때 총을 들었는가’는 80년 광주와 관련한 거의 모든 담론과 서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다. 광주 이후 세대인 저자 역시 김군의 행방을 수소문하면서 이 질문을 마음속에 품었다. 그래서 광주와 관련한 이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직접적이든 우회적이든 그 질문을 빠뜨리지 않는다. 당신은 그날 왜 총을 들었는가.
사건 이후 40년이 지나는 동안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5·18에 관한 해석이 이어져왔고, 관련 기록이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는 등 5·18은 한국 민주화운동사에 한획을 긋는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니까 그때 왜 시민들은 무장을 하고 군대에 저항하였는가와 관련해 역사 서술은 그것을 민주주의를 위한 숭고한 투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 평범했던 한 시민군은 굳이 그러한 평가를 사양한다. 투사나 전사나 영웅으로 호명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냥 사람이어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아무 잘못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목도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는 진술은 실로 5·18의 진실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슬픔과 연민의 감정, 죽음에 대한 공포의 감정이라 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역사적·법적 평가가 끝난 사건임에도 여전히 전혀 다른 해석으로 사람들을 선동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광주와 관련한 군부의 말하기에서 두가지, 곧 북한 특수부대 개입설과 시민들에 의한 교도소 습격사건은 오랜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사람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면서 광주의 학살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된다.
5·18에 대한 지속적인 왜곡과 부정의 효과는 무엇인가. 그것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거짓 소문에 설득력을 실어주고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고 믿게 만든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만원은 한 개인이 아니라 80년 당시의 신군부의 언어를 대신 전하는 스피커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시한 자는 지시한 자대로, 그것을 실행한 자는 실행한 자대로 책임이 있으나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은 탓에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김군’은 누구인가. 강렬한 눈매의 사진 속 한 남자를 기억하는 광주 사람들에게 그는 넝마주이 청년 ‘김군’이라 불린다. 5·18기록관에는 무장한 시민군으로 등장하고, 지만원 같은 이들과 그의 언어를 맹신하는 우익 커뮤니티 구성원에게는 ‘제1광수’로 불리며, 그래서 북한에서 내려온 특수군으로 여겨지는 그는 도대체 누구이며, 그때 왜 총을 들었으며, 지금 어디에 있는가. 김군은 그날 광주에서 총을 들었던 수많은 평범한 이들, 그리고 우리가 망각한 부재의 기억을 되살리는 한 상징적 기호다.
이제 김군을 찾아내기란 어렵지만, 긴 여정 속에서 저자가 만난 광주와 연관된 사람들을 통해 얼마간의 의문은 해소된다. 아무려나 ‘김군’은 80년 당시 25세 정도의 청년이었다는 것,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고 아무도 이름을 묻지 않아 다만 ‘김군’으로만 불렸다는 것, 80년 5월 24일 진월동 부근에서 매복 중이던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육군보병학교 교도대와 11공수여단 사이의 오인 사격으로 아홉명의 공수부대원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분풀이-보복으로 마을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를 하고 사람들을 체포해가는 과정에서 사살되어 추후에 암매장되었을 것이라는 유력한 추론 등이 그것이다.
기억은 얼마간 굴절되기 마련이라 평자가 신뢰하기 어려운 증언도 더러 있다. 이를테면 평자는 5월 23일 오전 10시경에 공수부대에 체포되었고 계엄포고령 위반과 소요죄 등으로 구속되어 108일이나 갇혀 있었다. 그래서인지 체포 당일의 유난히 맑은 하늘도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5월 23일 광주지역의 날씨가 흐렸다는 이 책의 기술 역시 소소한 오류라 하겠다. 또한 “심지어 초등학생도 총을 들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120면)라는 말도 신뢰성을 얻으려면 더 많은 증언이 필요하다. 누군가의 기억은 명료하지 않을 수 있다. 망각의 심연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걸 무슨 흠이라 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김군의 행방이니 말이다.
이 책은 국가 공식기억의 빈틈을 메우는 대항기억으로, 5·18에 대한 비공식적 판본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80년 광주를 기억하는 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의 감독이자 『김군을 찾아서』의 저자 강상우의 그 치열한 작가정신에 큰 빚을 졌다. 단 한장의 사진으로만 남아 있는 ‘김군’의 행방을 찾기 위한 저 오래고도 고된 헌신에 대하여 무릎 꿇고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