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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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성 李起聖

199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동물의 자서전』 등이 있음.

leekisung85@hanmail.net

 

 

 

고아떤 삼양동

 

 

여긴 삼양동이야. 볕이 잘 들 것 같은 이름인데. 삼양동을 지날 때마다 고아떤 뺑덕어멈이 생각나고, 소진은 여기서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도 썼지만, 그건 실패한 아버지들의 이야기.1 모름지기 문학이란 실패하는 거라고, 이왕이면 멋지게 실패해버리자고 떠들어대던 시절에도 삼양동에 산다는 건 비밀에 가깝지. 그런데 눈 속에 검은 벽돌 같은 누추함을 숨기고도 시인이 될 수 있을까. 가령 항아리 속 부러진 숟가락이라든가 고장 난 시계, 늙은 독재자 같은, 장대에 매달린 해진 속옷 같은 그런 이야기들 말고……

내가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여관과 여인숙이 많은 골목, 지금은 사라진 국숫집과 방앗간 연탄집 낡은 철대문과 가파른 한숨이 많은 골목으로 기억한다. 삼양동에 대한 시를 생각하다가 거긴 청계천도 아니고 청파동도 아니니까 최승자도 이별의 블루스도 아니고 철공소 모루판을 쨍쨍 울리는 눈물의 투쟁가도 아니고

언젠가 잡지에서 본 시인이 만원버스에 끼어 서 있는 걸 보면서 아, 시인도 버스를 타고 삼양동으로 가네, 삼양동을 지나면 시인은 어디로 가나 생각했던. 가방 속에 든 시집에 싸인이라도 받아둘까 망설이다 말았던. 내가 알기로 시인은 삼양동에 대한 시를 쓴 적은 없고 시집 표지의 말간 눈빛과 달리 주름진 얼굴로 연신 하품하며 철공소 김씨처럼 누런 담배냄새를 흘리던…… 그것도 오래된 이야기

아직 귓가에 쨍쨍한 봄날의 햇빛과 굴곡진 언덕과 슬레이트 지붕에 내걸렸던 만신집 붉은 깃발과 거기서 삼년 동안 설거지를 했다는 내 할머니의 노란 금이빨은 또르르 비탈을 굴러서 또르르 어디로 갔을까. 이제는 모두 아는 비밀이 된 이야기들. 눈 녹은 햇빛 속에서 이빨 없이 환하게 웃던 검은 입, 쪼그라든 입술, 금 간 항아리처럼

소진은 서른셋에 죽고 나는 늙은 시인이 되어 삼양동을 걷는다. 시인이 되면 삼양동을 아주 떠날 줄 알았는데 사라진 골목을 돌고 돌아 어떤 고아떤 시절의 이야기나 자꾸 훔쳐보면서 꿈결처럼 고아떤 고아떤…… 그런 시나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벽을 하나 가지고 싶었다 벽에는 푸른 하늘과 연못과 물고기도 좀 있고 눈이 내릴 것이다

 

벽에는 아이가 살고 아이는 혼자 못가에 앉아서 물고기를 보고 눈이 쌓인 밤엔 빨간 물고기가 금 간 벽으로 흘러나가고

 

벽 속의 남자는 계속 침묵을 하고 간장 항아리처럼 늙은 여자는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 남은 벽이니까 그림을 그리는 건 어때? 아이가 말했다

 

물고기와 눈과 사람이 그려진 벽이 헐리기 전 벽 속의 남자는 침묵을 밖으로 던졌다 깨진 벽돌처럼 비스듬히 날아오는 그걸 보며 누군가 소리쳤다 놀라운 일이야, 저 속에서도 행복이란 걸 생각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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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소진의 「고아떤 뺑덕어멈」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