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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임솔아 林率兒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겟패킹』 등이 있음.
sol.a.2772@gmail.com
특권
펜스 앞에 서 있었다.
현수막을 보고 있었다.
긴급 폐쇄라고 적혀 있었다.
공원 바깥에도 산책로는 있으니까
갈 수 있는 바깥이 아직 좀더 있었다.
친구가 자기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있었다.
10월인데 아직도 모기가 있다면서.
이렇게 태연해도 되는 거냐고
나는 물었다.
태연만이라도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친구는 웃었다.
길에 누군가의 조각상이 있었다.
그 위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침을 뱉는 아이들이 있었다.
우리 집 개가 죽었을 때
이제 개소리 안 난다며 기뻐하다
미안해했던 옆집 여자.
그 여자네 집에서 어느날부턴가
개소리 들려왔을 때
참 듣기 좋다고 꼭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제 옆집 여자는 소리를 지르지 않고
자주 흥얼거린다.
개가 여자의 허밍에 맞춰 노래를 한다.
동작을 감지했다고
홈캠이 알림을 보냈다. 앱을 켜 보면
집에는 아무도 없고
방에 들어온 햇빛만 펄럭이며 움직이고 있었다.
햇빛이 집 안을 너무 자주 걸어 다녔다.
방에 들어온 햇빛을
색종이처럼 접으며 논 적이 있었다.
반복해서 접으면 유리병에 모아둘 수 있었다.
모으다보면 왠지 소원을 빌어야 할 것만 같았지만.
망해가는 것도 특권이라는 말을
친구는 들었다.
그 말이 도움이 되었다 했다.
아무것도 빌지 않기로 했다.
그게 우리의 소원이기로 했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구겨진 영수증을 꺼냈다.
친구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햇빛 한장을 꺼냈다.
걷다가 쓰레기통이 나온다면 버리기로 했다.
없다면 집에까지 잘 가져가서 버리기로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 개를 씻긴다.
털에 물이 닿을 때마다 개는 바들바들 떤다.
비명을 지른다. 물이 자기를 죽이기라도 할 것처럼.
따뜻해. 괜찮아. 그냥 물이야.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다.
미궁
바닥에 떨어진 실을 발견한다.
실을 주워 들고 집 안을 살펴본다.
폐호텔 502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진행자가 말한다.
그 소리를 듣고 우리 집 개가
짖고 날뛰고
낚싯줄에 매달려 있는 액자들과
실로 묶어둔 화분 지지대와
언젠가 선물받은 자수 쿠션과
우리집 개의 배를 쫑쫑 꿰매놓은 실밥들.
“저는 함부로 억울해하고 따지고 그러는 사람 아니에요.”1
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은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흑백으로 된 꿈을 꿨다.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것이 땀인지 피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함께 걷던 사람에게
내 얼굴에서 무엇이 흘러내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손가락을 내밀었고
액체를 찍어 맛을 봤다.
우리는 입맛을 다셔가며 서로의 액체를 맛보다가
세수를 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는데
화장실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액체가
우리의 액체와 같은 명도였다.
개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말을 나는 이제 믿는다.
영혼이라는 것이 결국
망가진 한쪽 어깨 같아서.
나는 반대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도 그렇게 했다.
이런 순간에 육체는 영혼을 버리고 육체만으로
이다음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개가 내 발을 핥고 있다.
핥고 있으니까 네가 유령은 아니라면서.
유령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려고 개는
문득문득 허공을 주시한다.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살이 붙을 때까지 실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일로 남아 있다.
개가 핥거나 긁지 못하도록
개보다 더 자주 개를 본다.
실은 잘 있다.
또다시 봐도
실은 잘 있다.
--
- 안보윤 「완전한 사과」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