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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임지은 林志垠
1980년 대전 출생. 2015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무구함과 소보로』 『때때로 캥거루』 등이 있음.
jazzella@naver.com
밀봉된 캔의 역사
편견을
시시각각 끄고 다녔다
깜빡하고 끄지 않은 전등처럼
처음 만난 캔이 나를 딸,이라고 불렀다
얘야, 어둠 속에서 뭐 하니?
물을 따르려고 하자
컵이 사라졌어요
캔 중에 소리를 담아 파는 것은 없고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시끄러운 침묵
다 비운 캔을 쌓아두기엔
내 방이 조금 작아서
다른 방에 믿음, 사랑, 소망을 떼어넣었다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깜깜한 방에서 걸어 나온 캔이
내 일기장—밀봉된 캔의 역사를 읽고 있다
아빠는 뚜껑을 여는 방식으로
나를 사랑했고 더 많은 방법으로 나를 닫았다
함부로 따려다 베인 손가락을
자주 입속에 숨겼다
담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모두 담아서
뚱뚱해진 캔이 나를 흉내 내고 있다
주의: 안에 든 것이 뭔지 알 수 없음
콜라병에 담아놓은 간장은 아니지만
실수로 꺼내 마셨다가
뱉으면
인생 전체가 검게 물들었다
내 머리 위에 뾰족하게
만져지는 꼭지를
누군가 스위치인 줄 알고 잡아당겼다
나는 꽤 견고한 편견이었는데
신인과 대가
매해 태어나는 작가는 많았지만 죽음까지 알려지는 작가는 적었다 태어난 사람은 죽는다는 이 공공연한 진리는 부고란에서 다시 살아났다 신인은 새로웠지만 누구나 한번밖에 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공평했다 누군가는 오래 하고 싶었고 누군가는 그만하고 싶었지만 이제 누군가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신인에겐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발휘하지 못했다 매번 가능성에 시달리던 어느 신인은 언젠가 자신의 이름을 가능성이라고 바꿈으로써 주목받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계속 살아남아 중견이 되고 마침내 대가가 된 신인은 매우 드물었다
이는 입구가 좁으니 목이 긴 자는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간다는 병목현상으로 설명되었으나 실제로 대가들의 목 길이를 재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대가는 완곡하게 표현해 완숙해졌지만 한번도 문지른 적 없는 사포만큼 거친 입을 빌리자면 이미 했던 생각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대가에겐 작품이라는 과거가 있었기에 미래조차 과거형으로 표현하길 즐겼는데 그에게 가능성이란 일어날 일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내려지는 상장 같은 것이었다 한 시상식에서 그는 이제 막 등단한 신인의 수상소감을 들으며 거의 눈물이 날 뻔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기분 탓이었고 정작 흐른 것은 콧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