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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사인 외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안온북스 2022
새로운 연결을 꿈꾸는 시
황인찬
黃仁燦/시인 mirion1@naver.com
팬데믹 이후의 시를 어떻게 전망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팬데믹 이전의 시에 대한 전망도 없던 나에게는 쉽지 않은 질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란, 문학은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는 일이므로 아직은 적절한 대답을 찾기 어렵다, 정도일 따름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긴 하다. 문학은 가장 빠르게 응답하는 순간조차 언제나 한발 늦은 것이니까. 반면 우리의 삶은 어떤 순간에도 한발 늦는 일이 없다. 우리는 과거 속에 존재할 수 없고, 인생이란 매 순간 점멸하듯 사라지는 현재의 연속 아닌가. 이 시차가 문학과 삶의 돌이킬 수 없는 간극이고, 또한 이것이 우리가 문학을 향유하는 까닭이기도 하리라.
『그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이오아나 모퍼고 엮음, 요시카와 나기·요쓰모토 야스히로 옮김)는 전망이 어려운 팬데믹 시대의 문학에 ‘문’을 내보려는 시도인 동시에 문학의 시차를 극복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48개국 108명의 시인이 쓴 팬데믹 시대의 연시’라는 부제가 설명하듯 여러 나라의 시인들이 쓴 짧은 시를 묶은 책으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 ‘연시’라는 특별한 형식이다. 일본의 전통적인 시 형식인 ‘연가(連歌)’는 복수의 시인들이 짧은 시구를 주고받으며 시를 이어 씀으로써 한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을 가리킨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문화인류학자인 이오아나 모퍼고(Ioana Morpurgo)는 연가의 형식을 빌려 세계의 시인들이 팬데믹 시대에 감각하는 고립과 격리에 대해 쓴 짧은 시를 모아 한편의 긴 시로 완성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했고, 2020년 봄, 이메일을 통해 이 장대한 기획이 시작되었다.
프로젝트의 이름은 ‘Airborne Particles’로, 공중을 건너는 작은 조각들이라는 뜻이다. 각국 시인들의 고립된 삶에서 비롯된 작은 시 한편이 공중을 건너 다른 이의 시와 이어지는 과정을 은유하는 것이리라. 14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하피즈(Hafiz)의 시에서 출발하여 100명의 시인이 각각 한 연씩 이어지는 시를 써내려갔으며, 이어 한국의 8명 시인들—강성은 김사인 서효인 신미나 오은 이원 이원화 황인찬—이 그에 대한 답시이자 또한 연시의 일부로서 시를 추가하여 총 108명의 시인이 108연으로 이뤄진 한편의 장시를 완성했다.
연시에서 중요한 것은 앞선 시들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고립과 격리의 이미지가 그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무는 고독할까?/달빛을 받아 자신의 그림자를 윙윙거리는 땅에 드리울 때./달은 천상에서 외로울까?/파도가 고래 등을 씻을 때.”(22면), “두 잔의 포도주 밑바닥 깊이 가라앉은 고독-빨간 말과 하얀 말”(82면) 등 고독을 직접적으로 환기하는 이미지가 각 연에서 주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절망의 이미지는 결코 절망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행복한 자들은 무척 위험하다. 그러니 우리는 행복하자—/노래를 부르자, 우리를 부드럽게 으스러뜨리는 행복한 하늘 밑에서./가장 사랑스러운 죽은 이의 꿈을 꾸자,/부스러지는 인류처럼 하늘이 심약해져 절망할 때/우리는 하늘이 꿈꾸는 것을 바라보자.”(44면)고 루마니아의 한 시인이 말할 때, 우리는 비탄 속에서 하늘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하늘마저 절망하는 그 순간, 꿈을 꾸는 것이 시의 업무임을 말하는 대목이다.
절망하지 않음을 상징하는 시어로 ‘하피즈’와 ‘황조롱이’를 꼽을 수 있다. 하피즈의 시구는 이번 연시의 서시로 배치되었고, 그의 시는 언제나 삶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향해 있었다. 여러 시인들이 삶의 긍정을 모색하고자 하는 순간에 하피즈의 이름을 호명하며 삶에 대한 사유를 계속할 것을 촉구하고, 한마리 ‘황조롱이’는 절망 속에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희망의 은유로서 108편의 연시 전체를 관통하며 활공한다.
이처럼 몇가지 모티브가 108편의 시를 조율하며 하나의 시로서의 구성을 가능케 하지만, 사실 이 연시의 백미는 그 느슨한 연결 사이에서 각 연이 다채롭게 드러내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들에 있다. 도시와 사막, 땅과 바다, 자연과 인간, 일상과 비극, 삶과 죽음이 각지의 시인들의 삶에서 발견되고,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팬데믹 시대의 삶이란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너무 광범위하고, 또 무작위적이어서 파괴된 것만 같은 이 구성은 오히려 그 혼란스러움과 복잡함 자체로 이 세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란 수많은 재료가 들어가 요란하게 끓어오르는 솥 아니겠는가.
이 혼란 속에서 시를 통해 전혀 다른 곳의 삶이 연결되는 시적 마술의 순간, 우리는 팬데믹 이후의 시가 어떠해야만 할 것인지 그 힌트를 가까스로 얻는다. 무한히 확장될 수 있으며 영원히 연결 가능할 것이라 여겨지던 세계는 그 자유롭고 무한한 연결과 확장으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는 재난을 겪었으며, 그 결과 우리는 전에 없던 고립과 격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려야 할 회복의 모습은 무엇일까? 이전의 세계가 지향하던 무한한 확장으로 돌아가는 것을 회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세계는 결국 이전에 겪은 비극을 재차 겪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애달픈 신기루여,/안의 무한에도 바깥의 무한에도/흘러간 영원에도 다가오는 영원에도 눈먼 시간이여,/이 위태로운 껍질 아래 대체 무엇이 너이고 무엇이 나인가, 하피즈./이제 어디로 스며들 것이냐./어느 길로 흘러가 눈먼 우리는 몸 섞을 것이냐,/눈먼 새 아이를 또 낳아 기를 것이냐.”(232면)라는 이 연시의 108번째 시는 우리의 연결이 이전과는 달라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시란 너와 나의 다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감각하는 일이다. 108명의 시인들이 연시라는 형식을 통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또한 서로의 이해 불가능을 몸으로 감각할 때 또다른 이해의 가능성이 태동한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연결될 수는 없으리라는 회의이기도 하고, 그럼에도 우리의 삶이 이토록 섬세하고 부드럽게 섞일 수 있으리라는 전망이기도 하다. 문학이 삶을 앞서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문학을 통해 연결된 우리의 삶이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 일이라면 ‘다음’의 시에 조금 더 기대를 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