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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앤절라 네이글 『인싸를 죽여라』, 오월의봄 2022

물신화된 저항

 

 

최태섭 崔泰燮

문화평론가 znfmtp@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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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오(安倍晋三) 전 일본 총리가 피격당한 날의 일이다. 난데없이 일본의 유명 게임개발자 코지마 히데오(小島秀夫)가 아베의 살해범이라는 소식이 그리스와 이란의 언론에서 보도되었다. 사태의 시작은 미국의 커뮤니티사이트 4chan이다. 이들은 동양인의 얼굴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인종차별적인 취지의 농담으로 코지마가 아베의 살해범과 닮았다는 말에서 시작해 실은 코지마가 진짜 범인이라는 식의 가짜뉴스를 만들었다. 이를 프랑스의 극우정치인인 다미앵 류(Danien Rieu)가 진실로 받아들여, ‘극좌파가 죽었다’는 말과 함께 코지마의 사진들을 자신의 트위터에 게시했다. 그리고 이 트윗을 기반으로 코지마를 아베의 살해범으로 보도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이미 낯설지 않다. 지난 몇년간 세계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암흑과 싸워왔다. 과연 이것에 대응하는 것이 옳은지를 자문하게 되는 허무맹랑한 루머와 음모론들이 수면 위로 끌어올려져 공론장에서 논의되고, 그 와중에 새로운 것들이 생겨나 온라인을 타고 퍼지는 양상은 그 어떤 감염병보다도 빠르고 유독했다.

왜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진전된 논의 대신에, 밑도 끝도 없는 ‘개소리’들을 상대하는 데 모든 힘을 쏟게 되었을까. 앤절라 네이글(Angela Nagle)의 책 『인싸를 죽여라』(Kill All Normies, 2017, 김내훈 옮김)는 이 ‘개소리’들에 대한 하나의 기록이자 분석이다. 그는 트럼프를 미국의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온라인 극우들과 남초커뮤니티들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버니 쌘더스(Bernie Sanders)의 지지자이자, 좌파이자, 페미니스트인 저자의 관점에서 왜 이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찾으려 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베타메일(β-male)과 대안우파 혹은 온라인 극우다. 베타메일은 수컷 우두머리를 뜻하는 알파메일(α-male)의 대척점에 있는 존재로 외모, 재력, 재능 같은 것이 부족해서 여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한다며 분노에 차 있는 남자들이다. 대안우파는 기존 우파가 물러터졌다고 비난하며 더 급진적이고 과격한 주장을 내세우는 차별주의자들이다. 이 둘은 겹치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다만 반(反)페미니즘과 반PC라는 공통의 전선을 두고 기존 사회가 신봉하는 거의 대부분의 가치들을 거칠게 조롱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공동전선에 서 있다.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 유튜브, 개인방송, SNS 등에서 진지를 구축했다. 기존 미디어들이 힘을 잃어가는 시기, 이곳에서는 팩트체크도 어떠한 책임도 필요 없는 자의적인 진실과 이념이 끝없이 생산되었다. 독성 가득한 진실과 이념은 아이러니로 무장한 냉소적 유머를 통해 온라인 공간에 퍼져나갔다. 이들은 조직되지 않았고, 대표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은 넘쳐났지만 막상 그 누구도 대표자가 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했다.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이 꿈꾸었던 리더도 조직도 없는, 자율적인 구성원들의 자발적 연합은 이렇게 악몽 같은 형태로 완성되었다.

한편 이 이야기의 또다른 주인공이 있으니, 이른바 리버럴(및 일부 좌파)과 그들이 펼치는 정체성의 정치다. 이들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부도덕함을 단죄하는 언사를 SNS 등에 전시한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차별이나 질병 등으로부터 고통받고 있음을 주장하고, 타인과 사회로 하여금 자신의 고통을 인정하고 합당한 대우를 할 것을 요구한다. 이들의 피해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언사나 행동에 대해서는 맹렬한 공격이 가해지는데, 저자가 보기에 이는 온라인 극우의 비열하고 과도한 술책들 못지않은 것이며, 어쩌면 그것의 원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이들의 행동은 모종의 ‘지대추구’다. 자신들이 활약하는 대학사회, 특정한 온라인 공간, 제도정치의 특정 영역에서 통용되는 ‘덕목’이라는 화폐를 획득하기 위해, 이들은 적뿐 아니라 동지들도 숙청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디즈니랜드에서 악어에게 끌려가 사망한 두살배기 어린아이의 죽음조차 위험 표지판을 무시할 수 있는 백인 남성(아버지)의 특권을 비꼬는 데 활용되는 식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온라인 극우의 전략에 영감을 주고, 음(陰)의 정당성을 불어넣었다. 저자에게는 트럼프의 당선에 이들 리버럴의 공도 결코 적지 않아 보인다. 이들의 공격은 적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내부에는 독이 되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처참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바탕으로 저자는 ‘금지를 금지하라’는 68혁명식의 저항과 위반이 이제 좌파가 아니라 온라인 극우들의 차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몇몇 드문 사례들과 긍정적인 잠재성 때문에 온라인을 상찬했던 좌파와 리버럴들은 틀렸다는 것이다. 저항과 위반은 그 자체로 아무런 방향성을 갖지 않는다. 그것을 물신화하고 잘못된 기대를 투영하는 한, 이 전쟁은 아무것도 지키지 않으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겠다고 공언하는 온라인 극우의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여러모로 평자가 2013년에 출간했던 『잉여사회』를 떠올리게 했다. 내가 애써 가능성으로 남겨두려 했던 불안들이 악몽으로 실체화했음을 증명하는 책으로 읽혔다고 할까. 이 책이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들은 곧바로 그에 조응하는 한국 사례들을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었다. 월스트리트를 점령한 사람들, 아랍과 남미에서 등장한 혁명의 바람들이 무위로 돌아간 현실에 대한 고민들은, 촛불 이후 분열된 광장과 길을 찾지 못하는 한국의 진보정치를 생각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 역시 뾰족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는 점까지 포함해서 정말 많은 부분이 비슷하다.

앤절라 네이글은 사실상 온라인 극우만큼이나 리버럴에 대해 분노 어린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느정도 공정하지 못한 비난도 포함되어 있으며, 타인의 고통을 너무 가볍게 여긴다는 느낌도 든다. 그럼에도 옳음이 ‘단지 옳다는 이유로’ 승리할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더 많은 고민거리와 사례를 던져주는 책으로서 가치가 있다. 물론 알고 싶지 않은 이름과 눈을 씻고 싶은 이야기들을 보는 것은 괴롭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