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문동만 文東萬
1969년 충남 보령 출생. 1994년 『삶 사회 그리고 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네』 『구르는 잠』 『설운 일 덜 생각하고』 등이 있음.
munyaein@hanmail.net
삽
삽을 보면 가다가도 멈춰
엄숙히 바라볼 때가 있다
개똥을 치우던 뭉그러진 삽이든
공사장 모래더미에 꽂힌 녹슨 삽이든
단단한 날이 다 닳고 살이 갈라지도록
파고 덮고 일으키고 이고 졌던
굴삭기보다 큰 삽 한자루를
이 나라 삽에는 삼각형 손잡이가 있다
그 구멍으로 추념해야 할
무언가를 간절히 들여다보라는 듯
논두렁에 삽을 꽂고
삼각형의 화각 속으로 추상하라는 듯
푸르게 들이치는 들판을
무논의 두엄더미에서 아지랑이로
피어나는 봄의 훈김을 보라는 듯
그 따뜻한 두엄 속에
모여드는 미꾸리처럼
가깝지만 머나먼 따뜻한 집 한채를
그리던 때를 기억하라는 듯
삐비꽃 피는 제방 위에
삽을 꽂고 삐딱하게 앉아
부르던 휘파람 같은 것들
삽자루 타고 올라오는 대지의 일렁임에
그때처럼 출렁거려보라는 듯
삽도 나처럼 외롭게 무엇이든 파고
뒤집고 싶어하며 여기까지 왔다는 걸
잊지 말라는 듯
그것은 일자형이라면 만들 수 없는
노래나 시 같은 것
가다가 맺히는 것, 에도는 것이 있어서
서로 아귀를 맞대고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
여기까지 살게 된 것을, 쓰게 된 것을
버리지 말라는 듯
삽을 쥐어본 지 오래된 몸 하나가
자꾸 삽질을 하고 싶지만
이 집에는 삽이 없고
누군가 삽질하네! 하는 말이 들려오면
나는 꼭 이것만은 말해줘야겠네
그 썩어 문드러진 삽자루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옥수수를 보론하다
옥수수 껍질을 다 벗기고 쪄야 하나
몇겹 남기고 쪄야 하나 생각할 때가 있었어요
내가 옥수수라면 한겹 옷이라도 입혀줘야
덜 수줍을 것 같아서요
언제가 수의를 입게 될 일 같은 것을,
굳이 앞서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만
시든 종교든 그런 일들이잖아요
나는 수줍음이 많아서 시 같은 게 맞나봐요
내가 나를 떠나지 못하고 서성일 때
내 몸을 보는 내 눈을 생각하는 그런 일들이
먼저 생각해 버릇하는 일이 잘 맞나봐요
성가신 옥수수수염을 떼어내며
걸리는 것들을 생각해요
이빨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보드랍던
달게 쪄 주던 자줏빛 옥수수를 생각해요
이 가계는 모든 고통을 치른 듯하나
기억나는 치통만큼은 없었군요
그 가지런한 이빨들은 어디 가셨는지
시렁에 걸린 씨옥수수같이
딱딱하니 걸리는 것들만 매달아놓고
그 좋아하던 옥수수가 묏등처럼 쌓여 있는데
한솥 쪄서 같이 먹어야 하는데
옥수수 껍질은 옥수수의 옷 같기도,
입술인 것도 같아서 마지막에
요구르트 한모금 찾던
부르튼 입술이 걸리기만 하고요
이미 떼어낸 껍질을 다시 붙이고 싸매어
옥수수를 찝니다
엉키고 간질이는 수염은 그러모아 피륙처럼
당신들을 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