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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알렉산더 케이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 허블 2022

양분된 세계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남상욱 南相旭

인천대 일어일문학과 교수 indimin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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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KBS에서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야자끼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을 기억하고 있는지. 새와 동물들을 사랑하며 불의를 참지 못하는 정의로운 소녀 라나와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내는 초강력 발가락 힘을 가진 코난, 무엇이든 먹는 포비와 낭만주의적인 다이스 선장 등 밝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차례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겠지만, 애니메이션이 시작될 때마다 음산한 배경음악 위로 초자력 병기에 의한 지구파괴를 알리는 내레이션이 등장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그러니까 작품 속 세계의 따뜻함이 실은 지금 이 시대에도 벌어지고 있는 지구 행성의 위기, 그 이후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이다.

최근 번역된 알렉산더 케이(Alexander H. Key)의 『네가 세계의 마지막 소년이라면』(The Incredible Tide, 1970, 박중서 옮김)을 보면, 이것이 정말 그 「미래소년 코난」의 원작인가 싶을 정도로 황폐화된 지구 행성의 모습에 그저 아연해질 뿐이다. 삼각탑을 위시해 현란한 과학기술이 눈을 즐겁게 해주는 애니메이션과 달리, 원작은 영화 「캐스트 어웨이」(2000)에서처럼 문명으로부터 멀어진 외딴 곳에서 배 하나 만드는 것조차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핵전쟁과 기후변화라는 지구 행성의 파괴가 한 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최악의 상황이라고 상정하는 차원을 훌쩍 뛰어넘어버린다.

소설 속 재난 이후의 지구는 미야자끼의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하이하버’와 ‘인더스트리아’로 나뉘어 있는데, 양자는 과학기술의 유무와 정치체제의 차이를 드러낸다. 부족한 자원인 플라스틱을 활용해 식품을 만드는 인더스트리아에서는 상호 감시체제를 활용한 차별과 배제가 일상화되어 있는가 하면, 농업·수공업 중심의 하이하버에서는 아이들이 어른들의 지시를 거부하고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 ‘야만화’된다. 이렇게 양분된 세계의 모습은 분명 냉전기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겠지만, 포스트 아포칼립스 관점에서 본다면 지구가 파괴된 이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 정치가 인간들의 삶을 규정한다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둘로 갈라진 세계 속에서도 문학과 예술은 어느 쪽의 ‘정치’가 더 우월한지를 판결하기보다 어떻게든 이 양분된 세계를 이으려고 노력한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두 세계를 잇는 고리 중 하나는 라나의 할아버지인 브라이악 로아의 ‘지식’이다. 지식은 핵폭탄이나 내연기관의 발명 등을 통해 지구 행성에 막대한 피해를 불러일으킨 원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공동체가 살아가기 위해 여전히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유산으로 인식된다. 실제로 이야기 속에서 로아는 관찰력을 통해 쓰나미의 징후를 읽어냄으로써 두 세계의 인간들 모두를 구하려고 한다. 또다른 고리는 ‘텔레파시’로, 이것을 통해 하이하버의 라나와 인더스트리아의 로아, 코난은 소통할 수 있다. 다만 텔레파시가 단순히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인간들 사이에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에 그치지 않고, 때로 인간의 시점을 벗어나 신의 목소리를 듣거나 ‘티키’ 같은 갈매기의 시점을 공유할 수 있도록 그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린 시절 동물의 눈으로 세상을 본 적이 있었던 라나가 “그 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너무 오랫동안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는 아예 그 능력 자체가 그녀를 떠나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293면>)을 깨닫게 되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이 텔레파시야말로 현대 인간들이 상실한, 인간의 관점을 넘어서는 관점의 지적 능력을 가리키는 말임을 작가가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의 언어’로만 쓰인 문학은 ‘과학적’(혹은 수학적)인 방식으로 숲과 바다, 그리고 돌고래의 말을 고스란히 받아 적지는 못한다. 하지만 예컨대 나쯔메 소세끼의 『이 몸은 고양이야』 속 이름 없는 고양이나 타와다 요우꼬의 『눈의 에튀드』 속 자서전을 쓰는 북극곰처럼, 문학 속 동물 화자들의 ‘눈’은 인간이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을 직시해왔다. 누군가에겐 그저 철 지난 문학적/인간적 상상력에 지나지 않겠지만 그러한 능력이 거의 고갈된 지금, 그래서 세상이 더 나아졌는지는 의문이다.

인류는 자신의 노력을 이 ‘터무니없는’ 텔레파시 능력 계발에 쏟는 대신, 초광속통신망과 서버를 통해 어디로든 이어지는 메신저 개발에 바쳤다. 하지만 최근 초유의 ‘국민’ 메신저 장애 사태로 인해 소통 수단이 막힌 그 짧은 며칠 사이, 문득 새들에 둘러싸인 라나와 코난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 인간들은 과연 메신저 같은 것으로 누구와 얼마만큼 끈끈하게 이어져 있는지, 또 이어질 수 있는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