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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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근 姜宇根

1995년 강원 강릉 출생. 202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whitespace13@naver.com

 

 

 

세상의 모든 과학자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과학자가 살고 있는지

착한 과학자, 나쁜 과학자, 엉뚱한 과학자……

 

과학자를 처음 꿈꾸는 건 얼마나 순수했는지 그러나 폭탄과 공장을 만들며 검은 구름이 하늘을 차지하는 것을 보는 과학자는 얼마나 많은 마음을 스스로 터트려야 했는지

 

이제 생각조차 나지 않습니다

 

매일 우리는 차들이 에워싸는

사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걷는 사건의 과학자들이지

 

우리를 스쳐 지나가며 질주하는 차처럼 우연한 생각들이 무서워질 때가 많다

 

생각들이 모두 발명된다면 좋은 세상보다는 나쁜 세상으로 기울어질 거야 생각들을 운반하게 될 우리의 커져가는 두 손이 미워질 거야

 

백 킬로그램의 하중을 견디는 탄탄한 우리에 돼지를 넣어두는 것도, 어두운 골목에 쥐덫을 설치하는 것도, 둥근 어항 속 색색의 물고기를 지켜보는 것도

 

모두 사소한 과학의 영역이다 집 안을 작동시키는 기기와 전등을 끄며 내일 아침 못 일어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그 생각을 떨쳐내는 것도……

 

밤을 발명한 과학자는 보이지 않고, 우리를 모두 검은색으로 덮으려고 한다 우리를 잠시 마비시키려고 한다

 

사각의 서랍장 속에서 테두리를 빙빙 돌며 멈출 때까지 춤을 추는 로봇 정병들처럼,

 

우리의 두 손과 두 발이 멀쩡히 움직인다는 것이 이상하지 두 손과 두 발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와 같이 태어난 세계를 사랑하고

증오한다는 것이

 

초마다 신호를 주고받는 핸드폰에

우리의 얼굴 조각을 남기며

 

주파수는 지구의 거대한 띠를 이룬다

 

새해에 해돋이를 보기 위해 동해안으로 떠나는 우리의 기도는 고속도로를 정체되게 하지, 연기를 피워올린 채로

 

해를 발명한 과학자는 그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고

 

햇볕을 쬐며 양팔을 벌린 나무가

나무로부터 태어나고

두 손을 모으며 전기톱으로 나무 자르는 사람이

사람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을

 

말릴 수가 없겠지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 지망생의 편지

 

 

나는 그림을 못 그리는 화가 지망생

화가가 되는 건 불가능한 꿈이고

언제까지나 내가 사는 마을에 화가 지망생으로 남겨져도 좋다

선생님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그려 오라고 했지만

나는 마을에 사는 요괴를 그렸고

“헛것을 보는 건 위험한 일이야”라는 말과 함께

미술 수행평가 최하점을 맞고 말았어

요괴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사진관을 운영하는

제임스 아저씨가 촬영한 모델이었어

아저씨는 오직 두 종류의 사진만을 찍어왔어

하나는 다른 마을로 취업하기 위해 떠나는 멀끔한 우등생의 증명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에서 오래 늙어가는 사람의 영정사진이지

그러니까 아저씨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부류의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거야

자정이 되면 불이 다 꺼진 마을

제임스 아저씨는 유일하게 불면증에 걸린 아이인 나를 불러냈고

나는 그의 촬영 보조가 되어서 집을 빠져나왔어

 

첫번째 발견한 요괴는 목수 삼촌이 힘 조절을 하지 못해 엉성하게 자른 밑동이야

우둘투둘한 단면으로 가구 제작이 불가능한 밑동은 마을 길목 곳곳에 배치되었어

마을 사람들이 잠시 앉아 쉴 수 있는

엉성한 밑동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혼잣말을 기억하고 다른 밑동에 들려줘

그러면 마을의 모든 밑동이 그 이야기를 알게 되지

어긋난 단면 안으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귀가 생겨났어

 

비가 세차게 오던 그날 밤 우리는 밑동이 알려준 강물이 흐르는 다리로 향해 갔어

다른 마을로 이어지는 버스가 유일하게 통과하는 다리는

밤이 되자 구렁이가 되어 스르륵 마을을 둘러싼 산으로 들어갔지

이장님은 오백년 넘게 산 구렁이 할아버지를 찾아가 부탁을 했었던 거야

“마을의 다리가 되어주시겠어요?”

 

“예산 부족으로 우리 마을은 다리 건축사업을 지원받지 못했어”

제임스 아저씨가 슬픈 목소리로 말할 때

비를 뚫고 유리 조각처럼 빛나는 새들이 우편배달부 토미씨네 집을 향해 들이닥쳤지

사방의 새들이 날개를 완전히 펼치자 편지처럼 평평해졌어

투둑투둑 빗물을 털어내는 수많은 새들이었어

마을 사람의 사연을 받아온 토미씨의

하얀 새는 낮에는 우편으로 떠돌다가

자정이 지나면 토미씨네 집으로 돌아와 곤하게 잠을 청해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편지도 토미씨의 하얀 새야

빈집이 많아지는 마을이 보내는 신호는 구조요청도, 사람이 놀러 오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야

당신은 어디에서 편지를 주워 읽고 있을까

편지는 자정이 되면 당신으로부터 떠날 거고, 그건 참 다행이야

당신의 하루는 이런 요괴 이야기를 간직하기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테니까

매일 밤 내가 빈집의 담장에 요괴를 그릴 때면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

“헛것을 보는 건 위험한 일이야”

그러나 오랜 시간 사람과 내통하며 몸을 변형해온 요괴들은

마을 사람들의 지워지지 않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