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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나희덕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 등이 있음.
rhd66@hanmail.net
피와 석유
석유를 악마의 배설물이라고
후안 파블로 페레즈 알폰소는 말했다1
베네수엘라의 광업개발부장관이었던 그는
OPEC의 설립을 주도했지만
석유가 부정부패와 갈등의 강력한 매개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록펠러는 자신의 석유를 더 많이 팔기 위해
램프와 난로를 아주 싸게 팔았다
그들에게 가장 큰 위험은 석유 소비가 줄어드는 것,
매일 일억 배럴의 석유가 세계로 팔려나간다
뚫고 또 뚫어라!
기후위기 따위는 문제가 아니라는 듯
점토와 암반에 파이프라인을 박아대는 시추탑과
데이터센터로 전송되는 데이터들,
지구는 구멍이 숭숭 뚫린 채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땅속에서 쉬지 않고 뽑아 올리는 이 죽음의 주스를
한번도 마시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죽은 유기체들로부터 나온
이 화석연료는 굴뚝과 배기구를 통해 승천하며
지구를 가장 빠르게 죽게 할 것이다
석유와 가스는
전쟁과 함께 수출되기도 하고
전쟁으로 공급이 장기간 중단되기도 한다
원유값도 가스값도 치솟는 겨울,
발트해를 지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떠올린다
그들은 말한다
석유나 가스에도 정신이 있다고,
고갈과 종말에 대한 공포를 가르치는 대신
새로운 신을 섬기게 하고
타오르는 불꽃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야 한다고
피처럼 붉게
피보다 붉게
마침내 피로 붉게
세상을 물들이는 자들이여,
더이상 석유를 위해 피를 흘리지 말라
피는 붉고 석유는 검지만
피와 석유는
포르피린2이라는 같은 혈통을 지녔다
러시아산 석유와 우끄라이나인들의 피가 때로는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샌드위치
2022년 10월 15일 토요일
서울역 이층 파리크라상에서 샌드위치를 샀다
기차에서 맛있게 먹으면서도 몰랐다
그날 새벽, 한 노동자가 샌드위치 소스 교반기 속으로 상반신이 딸려 들어가 숨졌다는 것을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이십대 노동자의 사망 원인은 질식사,
사망 현장에서 만든 샌드위치 사만여개가 모두 유통되었다는 것을
내가 먹은 샌드위치도 그중 하나였을까?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피 묻은 샌드위치를 삼켰다는 생각
바로 다음 날 공장 측은
사고 난 교반기를 흰 천으로 덮어두고 작업 재개를 지시했다
동료가 죽은 기계 옆에서
재료를 쏟아붓고 교반기를 돌려야 했던 노동자들,
일주일 후에는 같은 계열사 제빵공장에서
한 노동자가 컨베이어 벨트 위로 지나간 불량품을 빼내려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했다
이젠 샌드위치를 먹지 못할 것 같다
빵을 굽고 야채를 씻고 햄을 썰고 소스를 만드는 손들이 떠올라
교반기 앞에 종일 서 있을 사람의 모습이 떠올라
교반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 몸이 떠올라
그러나 지금도 공장은 돌아가고 교반기는 돌아가고 컨베이어 벨트는 돌아가고 새벽에도 작업조는 돌아가고
사람을 삼킨 교반기 속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소스가 되어버린 노동자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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