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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서효인 徐孝仁
1981년 전남 목포 출생. 2006년 『시인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 『백 년 동안의 세계대전』 『여수』 『나는 나를 사랑해서 나를 혐오하고』 『거기에는 없다』 등이 있음.
seohyoin@gmail.com
카드와 뺨
이 동네 신용카드 배송원은 한쪽 다리를 전다. 기우뚱한 그의 몸이 기묘한 신뢰감을 형성한다. 믿지 않으면 천벌을 받을 것만 같다. 흡사 그에게 받은 봉투가 부적이 아닌가 싶다. 다리를 저는 배송원은 사인을 받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뚝절뚝 되돌아 엘리베이터 버튼을 반복해 눌렀다. 4층이지만 4층 아닌 F층의 형광등이 고장 나 깜박거렸다. 배송원의 급한 걸음처럼. 급한 것치고 빠르지 못하던 그의 자세처럼. 저건 언제 고치는 걸까. 오래된 건물의 관리인은 멀쩡하다. 싸우면 내가 질 것 같다. 하지만 이제 카드가 있으니 싸우지 않아도 된다. 싸우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신뢰와 신용이라는 게 있으니. 우리에게는 신앙과 무속이라는 것도 있으므로. 요컨대 현대사회니까. 부적에는 카드와 혜택을 설명하는 종이가 동봉되었다. 종이를 버리고 카드를 챙긴다. 버린 종이를 다시 주워 꼼꼼히 읽는다. 거기에 변변찮은 인류의 운명이 적시되었다. 일별하고 다시 버린다. 글자를 믿지 않는다. 카드를 믿는다. 그것이 신용이다. 신용은 운명이다. 가볍고 반듯한 운명이 발급되었으므로, 소비를 단행하기로 한다. 카드를 쥐고 빌딩 앞 편의점에 들어서자 F층에서 잠시 만난 배송원이 우뚝 선 채로 사발면을 먹고 있었다. 그의 다리를 쳐다보았다. 멀쩡한가? 의심하는 찰나, 구부러진 카드 같은 그의 손아귀가,
단지와 역사
우리 아파트에는 시린 역사가 있다. 경기도 북쪽 외곽 신도시 애매한 위치에 어중간한 시기에 어정쩡한 가격으로 견본주택을 열어 확연히 스산한 겨울을 보내고 이후 봄이 왔건만 끝내 미분양되었으며 이년 후 공기(工期)가 다 차도록 건설 경기는 회복되지 않았다고 한다. 공기는 좋았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는 시린 역사가 있어 브랜드라 하기에 남들이 다 알아주는 이름은 아니었으나 입주민 카페에서는 최고의 아파트로서 서로 치켜세워주며 전운과 슬픔을 나누었다고 한다. 아이디는 동호수였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는 시린 역사가 있는데 시공사가 부도의 위기를 맞아 거의 절반 남은 물량을 반의반가량 할인하여 후분양해버렸는데, 역사의 산증인들이라 할 초기 입주자들이 들고일어나 정문과 후문 모두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호각을 문 채 감히 값을 후려친 자들의 이사를 막아 세웠다고 한다. 제법 투사다웠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는 시린 역사가 있으니 케이비에스 아홉시 뉴스에 모자이크 없이 송출되었고 들불처럼 퍼진 비난 여론에 입주자는 일보 후퇴하여 건설사와 일종의 합의를 보았다고 한다. 산 자는 모두 따랐다고 한다. 우리 아파트에는 시린 역사가 있어, 모든 사실은 엄격히 기록되어 후세에 길이 남을 예정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매년 매월 매일의 매매 기록이고 그것을 지우거나 수정할 엄두는 감히 그 누구도 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지, 역사는 말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