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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서명숙 『흡연 여성 잔혹사』, 이야기장수 2022

살벌하고 황홀한 담배의 맛

 

 

황현진 黃玄進

소설가 flyto-u@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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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강사직을 그만둔 후, 나는 세번의 면접을 봤다. 그때마다 두가지 질문을 받았는데 하나는 결혼 여부를 묻는 질문이었다. 나의 대답도 매번 똑같았다. “싱글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은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런 질문이 뒤따랐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더듬거리며 대답하곤 했다. “평생 사랑하겠단 뜻입니다.” 면접관은 대개 이런 반응이었다. “남친 있다는 소리를 어렵게 하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진실과는 거리가 먼 대답 같았다.

술을 좋아하느냐는 질문도 반드시 뒤따랐는데 딱히 부적절하게 들리진 않았다. 다만 면접과는 무관하다는 투로, 농담조로 묻는 게 수상쩍긴 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는 당연한 얘기를 왜 묻냐는 듯 자랑조로 화답했다.

“담배도 피웁니다.”

비혼이면서 흡연자인 여성을 바라보는 공통적인 시선이 있다.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반발심이 큰 체제 부적응자라거나 한편으로는 가임기 나이도 아니고 임신할 일 없으니 흡연해도 무방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 시선의 이면에는 또다른 편견이 도사리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다. 저 여자는 외로운 여자다. ‘외롭지 않은 여자’임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는 한, 술과 담배는 자학과 우울의 기호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뜻밖에도 나는 세번의 면접을 모두 통과했다. 나중에는 나의 상사가 된 면접관들과 맞담배를 피우는 사이가 됐다. 직급을 떠나 일종의 동료애가 쌓일 즈음, 그들은 내게 진심으로 조언했다. 담배를 끊어라.

내겐 그 말이 가장 잔혹하게 들렸다.

서명숙의 『흡연 여성 잔혹사』는 저자의 흡연과 금연에 대한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여성 잔혹사이다. 흡연을 하건 하지 않건 여성에 대한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은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의 알리바이로 작동해왔다. 대한민국은 그 모든 알리바이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 책은 그 폭력을 피해 숨은 여성들의 이야기,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담배를 탈취하고 폭력과 폭언에도 꿋꿋이 흡연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온 여성들의 이야기, 날 때부터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던 모든 여성의 이야기다. 물론 그 안에는 담배를 숨어 피워야만 했던 젊은 날의 나도 있다.

굳이 이 지면에서 우리 사회가 원해왔던 바람직한 여성상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앞서 말했다시피 내가 만난 면접관들은 흡연하는 여성에 대해, 비혼 여성에게 (진정한 이해는 부족할지언정) 꽤 관대한 듯 보였다. 실제로 『흡연 여성 잔혹사』가 처음 쓰였던 2000년대 초반(초판 웅진닷컴 2004)과 그 이전 시대에 비하면 우리 사회는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도 않다. 내가 비교적 관대한 대우를 받은 것도 어쩌면 이미 ‘기성’이 되어버린 덕도 적진 않을 것이다.

흡연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나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뭐랄까,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떤 금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이점이 있다. 그 대신 타인의 힘으로 바꾸기 어려운 대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공동체의 터부 그 자체로 남겨진다. 그야말로 개과천선하지 않는 이상 고쳐 쓰기엔 어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와 맞담배를 피웠던 남성 상사들이 처음엔 흡연실 의자에 떨어진 긴 머리카락을 보고 화들짝 놀라던 모습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늦었지만 나에게 맞담배를 허락했던 자들에게 묻고 싶다. 그게 어찌 그리 놀랄 일이냐고. 아마도 그들은 ‘꼰대’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세상의 변화에 관대한 자기 모습에 만족하기 위해 ‘담배 피우는 여자’라는 이미지를 세련되게 이용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실은 그게 맞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남성중심사회가 조금씩 무너져가고 있다고 믿는다. 흡연이 여성을 더 잔혹하게 다뤄도 된다는 알리바이로 작동하고, 여성 흡연을 모성신화를 위배하는 죄악으로 여기는 악습만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지만 그 또한 언젠가 사라질 거라 기대한다. 그날이 오기 전까진 앞으로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흡연 여성 잔혹사’가 전해지고 계속 쓰일 것이다.

오늘날 담배는 죄다. 사회가 지정한 공공의 해악이다. 남성의 전유물이자 권력의 상징이었던 지난날의 영광 따윈 없다. 담배 피우는 여자를 ‘독립적이고 주체적이며 전투적인 여성’으로 받아들이던 시대도 지났다. 흡연가는 ‘몸에도 나쁘고 미용에는 더 나쁜 담배’를 피우는 불쌍한 사람이다. ‘몸에 나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숭고한 삶에 대한 배반이며, ‘미용에 나쁜 담배’를 피운다는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멸시다. 저항을 배반으로 읽고, 열망을 멸시로 읽는 시대다.

다행히 나와 같이 금연할 생각이 없는 이들은 아직 많다. 흡연실은 언제나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니까. 흡연 자체가 죄악시되는 오늘날 흡연가로 산다는 것은 일종의 선언이다. 여전히 담배는 “일탈을 향한 본능적인 욕망”이자 “금기에 저항하려는 자유의지”인 것이다(11면). 그래서일까, 담뱃불을 붙이는 순간 나는 황홀하다. 이 황홀함은 수많은 금기와 억압을 만들어낸 이 사회가 내게 선사한 것임을 잊지 않겠다.

저자 또한 금연과 흡연을 반복했지만 억압과 금기에 대한 저항 그리고 자유에 대한 열망만은 절대로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한다. 흡연 아닌 방식으로 실현하는 방법을 찾아냈을 뿐이다. 『흡연 여성 잔혹사』의 어느 페이지에 있을 법한 헤비스모커 여성인 나이지만, 오늘도 흡연실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눈칫밥을 먹지만, 나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 왜냐고? ‘흡연 여성 잔혹사’, 이 살벌한 이름의 역사를 우리 스스로 써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 생각을 하니, 오늘 담배 맛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