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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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터뷰 | 새로운 25년을 향하여 | 장애인권

 

장애, 복지가 아닌 인권으로 생각하라

 

 

이지영 李智映

창비교육 콘텐츠3본부장.

quinn@changbi.com

 

 


지난해 봄 이후 분통 터지는 뉴스가 한두가지는 아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이 어지러웠던 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의 시위와 관련된 뉴스를 접할 때였다. 정부와 서울시의 무책임한 대응에도 화가 났지만 서울교통공사의 다분히 적대적인 지하철 시위 대응 문건이 공개되었을 때는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시위대를 향해 험한 발언을 쏟아내는 일부 시민들의 행태는 혼란과 상처를 남겼다. 이 사태가 장애인과 이른바 ‘선량한 시민’을 갈라치기하는 정치인들 때문인지, 아니면 편파적인 언론보도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각자도생에 골몰하게 된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 것인지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각종 커뮤니티와 뉴스 댓글란에 쏟아지는 혐오발언을 보고 잠 못 드는 밤이면 같은 마음으로 분노하는 SNS의 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전장연에 후원금을 보내며 스스로를 위무하는 게 고작이었다.

가슴이 무거워지는 투쟁현장의 다른 편에서 눈에 띈 것은 김지우씨였다. 그는 ‘굴러라 구르님’(youtube.com/@rollingguru0829)이라는 채널을 운영 중인 유튜버이자 『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휴머니스트 2022)라는 책을 펴낸 작가인 동시에 사회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다. 평소 즐겨 듣던 팟캐스트를 통해 ‘구르님’을 알게 된 나는 그의 활동들을 살펴보고 작은 충격에 휩싸였다. 장애인이자 젊은 여성이라는 소수자성을 이렇게 즐겁게 돌파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달의 휠체어’라고 명명한 작업을 통해 한복과 꽃가마, 신부와 웨딩 등 다양한 콘셉트의 ‘휠꾸’(휠체어 꾸미기) 화보를 선보이는가 하면 휠체어 타고 화장실 가는 법을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쇼츠 영상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위트 넘치는 그의 책은 추천사를 쓴 이길보라 감독의 말대로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틈새를 유쾌하고 발칙하고 근사하게 가로지른다”. 이렇게 그는 뇌병변 장애인으로 살아온 인간 김지우의 삶과 그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해왔는데, 이것이 그가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장애여성의 가시화라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세먼지가 적은 어느 봄날, 장애인콜택시를 타고 약속장소에 도착한 그는 짐작대로 유쾌한 에너지를 전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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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 여행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김지우씨는 지난겨울 일본과 대만, 홍콩 등을 다녀왔는데, 그에게 해외여행이란 자연스레 그 나라의 장애인 이동권 수준을 살피는 기회가 된다고 했다. 일본 여행 브이로그에서 공항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이 버튼 하나 누르면 휠체어가 탑승할 수 있는 발판으로 변신(?)하는 장면이 너무 신기했기에 그에 대한 질문부터 던졌다.

 

일본 여행은 이번이 두번째였는데, 가장 많이 든 생각이 ‘여기서는 어떻게든 갈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어요. 저는 평소 외출하면 보도블록에 금이 가 있는지, 도로와 인도의 연결 부분에 턱은 없는지 늘 살피면서 다니는데, 일본 여행하면서는 그럴 필요가 없거든요. 입구에 계단이 있는 건물도 둘러보면 돌아가는 길이 있거나 벨을 누르면 직원들이 나와서 도와줘요. 버스 역시 제가 정류장에 서 있으면 기사가 차를 세우고 행선지를 물어본 다음 제가 타야 할 버스가 맞으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동식 경사로를 깔아주고요. 승객들도 이런 일에 익숙한지 눈치 주는 일이 없어요. 그렇게 여행하다 돌아오면 바뀌어야 할 것들,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실은 대만에 갔을 때 더 큰 충격을 받았는데, 길거리에 장애인들이 정말 눈에 많이 띄더라고요. 심지어 지하철을 탔는데 제가 탄 칸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세명 더 타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모두 사회활동을 하러 가는구나 싶고. 한국에서는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라 충격받았는데 다른 승객들은 아무렇지 않아하더라고요. 같이 여행한 저희 아버지와 “한국이었으면 전장연 시위인 줄 알고 막았겠다”고 우스갯소리도 했어요.

 

뼈를 때리는 그의 농담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지만 곧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전장연의 지하철 시위를 둘러싼 논란이 한창 뜨거웠던 지난해 초, 김지우씨는 이들을 지지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가 표적이 되어 갖은 악플과 인신공격에 시달렸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그는 “솔직히 겁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저는 젊은 장애인으로서 오래전부터 싸워온 선배들에게 빚을 졌다고 느끼거든요. 어떤 방식으로 목소리를 보탤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내가 잘하는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라고 술회했다. 2022년 4월 ‘이달의 휠체어’ 번외편으로 ‘훼손되지 않는 외침, 훼손할 수 없는 목소리’라는 주제를 정하고 전장연 시위에 쓰인 스티커 디자인을 활용해 휠체어 가드를 꾸민 뒤 지하철역에서 촬영을 진행한 이유다.(박경석 전장연 대표는 그가 선물한 이 가드를 달고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이 발신하는 메시지가 현실과 만나 증폭되기도 하고 반사되어 튕겨 나가기도 하는 경험에 대해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제가 어느덧 7년차 유튜버인데, 사실 처음 시작한 건 어떤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냥’이었어요. 원래 튀는 것을 좋아하고 나대는 편이라 유튜브는 당연히 제 무대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강점을 가진 콘텐츠가 무얼까 생각해보니 ‘장애’인 거예요. 당시만 해도 장애인 유튜버를 찾아보기가 어려웠거든요. 장애인인 나의 이야기를 가감없이 알리고 싶다고 생각했죠. 세상에는 아무 이유 없이 장애인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장애인을 만난 경험이 없다보니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멀리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거라고 믿거든요. 그렇다고 그들이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장애인의 일상을 가시화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지금은 다른 목표가 생겼어요. 누군가는 저더러 장애인식 개선 영상을 만든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거든요. 곤경에 빠진 장애인에게 비장애인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실험영상 같은 걸 보면서 비장애인들은 ‘아, 아직 세상은 살 만해’ 하면서 감동받던데, 전 그 상황에 감정이입이 돼서 차마 못 보겠더라고요. 그러면서 깨달은 게 ‘이 실험영상을 만든 사람들은 장애인 당사자가 시청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구나’라는 거였어요. 저는 이제 같은 장애인들이 편하게 공감할 수 있는 영상을 만들려고 해요. 내밀한 이야기도 하고 싶고요.

 

실제로 최근 그의 유튜브에는 ‘휠체어 타는데 생리하면 어떡해?’나 ‘장애여성의 소개팅 썰 풀기’ 등 절로 클릭을 부르는 제목의 콘텐츠가 자주 올라온다. 때로는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분노하다가 또 때로는 낄낄거리며 이 영상들을 보노라면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익숙해져야 하는 상태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영상을 본 사람들이 조금은 괴롭고 또 조금은 혼란스러워지면 좋겠다”(『하고 싶은 말이 많고요, 구릅니다』 129면)는 그의 바람은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실현되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심한 한국사회에서 장애여성이 얼굴을 드러내고 유튜버로 활동한다는 것은 분명 위험부담을 지는 일이다. 십대 시절부터 활동해온 김지우씨는 그간 각종 성희롱부터 ‘장애인이 벼슬이냐’는 맥락 없는 댓글까지 여러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음을 가감없이 털어놓았다. 조심스럽게 대응법을 묻자 그는 악플이 ‘공짜 콘텐츠 공급기’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장애인 주제에 예쁜 척하지 말라는 댓글이 달렸길래 제가 “나는 예쁜 척하는 게 아니라 그냥 예쁘게 태어난 곤데~”(2017년 방영된 드라마 「쌈, 마이웨이」의 대사에서 유래한 유행어)라고 대댓글을 달면서 한참 놀려줬거든요. 제 구독자들은 콘텐츠로 악플 읽기를 하면 관심도 많이 가져주고 함께 분노해줘요. 저는 말도 안 되는 악플일지라도 일단 거리를 두고 어쩌다 이 말이 나오게 되었을까를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사회적 맥락을 빼놓고 해석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휠체어를 타면 좋은 점’이라는 영상에는 어김없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휠체어 타는 게 뭐가 좋냐는 댓글이 달리는데 왜 이런 식으로 반응할까 찬찬히 따져보니 이 사람들은 장애와 행복을 연결해서 상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미디어에서는 장애를 주로 슬프거나 비극적인 사건과 연계해서 소비하니까요. 이런 악플들이 복잡한 사고회로를 거쳐 나왔다기보다는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주입된 문장이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왔다고 보는데, 이런 입출력의 고리를 끊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그의 단단한 멘탈을 확인하니 얼마간 마음이 놓였지만 장애를 가진 여성으로서 겪어야 하는 이중의 어려움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지우씨는 책에서 ‘장애여성’이라는 말을 처음 알게 된 순간 설레고 덜 외로워졌다고 고백한다.

 

왼쪽부터 이지영 김지우. 김지우는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에서 자신을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기, 뇌병변 장애인 구르님.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왼쪽부터 이지영 김지우. 김지우는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르님’에서 자신을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기, 뇌병변 장애인 구르님.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어딜 가든 나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불편한 느낌에 시달렸는데, ‘장애여성’이라는 말을 만나는 순간 그것이 해소되었어요. 예를 들어보자면, 2015년을 전후해 페미니즘이 리부트되면서 여성담론이 활성화됐잖아요? 그러면서 ‘건강한 여성’이 지향점 중 하나로 떠올랐던 것 같아요. 열심히 운동해서 체력을 키우고 사회에 나가 성공한 여성이 롤모델로 제시된 거죠. 그런데 저는 ‘내 주위의 여자들은 운동을 할 수도 없고 취직하기도 어려운데 이들의 얘기는 어디로 간 거지?’ 하는 의문이 들었어요. 여성으로서 페미니즘에 공감하지만 장애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소외당한다고 느꼈던 거죠.

 

여성과 장애라는 중첩된 정체성 안에서만 스스로를 온전히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그의 말은 교차성에 대해 새삼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수자들이 서로 겹치거나 겹치지 않는 억압에 대해 자유로이 말하고, 때로는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기도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연대할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교차성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운동과 연결짓는 길이 아닐까. 그의 유튜브 중 인기 코너인 ‘디-시스터즈’(여기서 ‘디’D는 different, disabled, diversity를 뜻한다)는 시각장애인 우령과 청각장애인 하개월과 함께 촬영한 콘텐츠다. 서로의 일상과 고민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보면 같은 장애여성들끼리도 차이를 확인하고 다름을 배워나갈 때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언니’들과 함께할 때 더 편안하고 자유로워 보이는 ‘구르님’을 지켜보는 재미는 덤이겠다.

김지우씨가 던져준 다양한 소수자 이슈를 더듬다보니 자연스레 돌봄 문제로 생각이 이어졌다. 돌봄과 장애인권의 관계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묻자 “돌봄담론에 대해서는 아직 공부하는 중이지만 돌봄이 사적 영역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말을 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떠올린 것은 가족 중 가장 많은 짐을 짊어져야 했던 엄마 현미였다.

 

현미는 제가 장애를 갖게 되자 자연스럽게 회사를 그만두고 10년 넘게 저를 돌보느라 병원을 오가며 살았어요. 2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장애아의 어머니에게 돌봄의 의무가 전가되는 경우가 많고, 떠맡을 여성이 없으면 시설로 보내지는 경우가 태반이죠. 잊을 만하면 발달장애아를 둔 부모가 아이의 목숨을 끊고 자살했다든지 하는 뉴스가 들려오는 건 그만큼 우리 사회가 장애인의 돌봄에 무관심하기 때문 아닐까요?

그런데 저는 엄마에게 ‘숭고한 희생’을 하는 돌봄 수행자 말고 다른 평범한 모습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책에 현미와 태균이 연애하던 시절의 이야기도 쓰고, 현미가 소아병동에서 다른 보호자들과 어울리며 몰래 보조침대 붙여놓고 골뱅이 무쳐서 소주 먹다가 간호사에게 걸려 혼난 에피소드 같은 것도 적었죠. 생각해보면 소아병동에 있던 엄마들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었으니 얼마나 갑갑했을까 싶어요.

 

그는 자신의 책에서 엄마와 아빠를 현미와 태균이라고 부른다. 자신의 성장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이들을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영향을 주고받는 주체로서 보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는 돌봄의 감각을 체화시켜준 존재로 반려동물을 떠올리기도 한다. 다른 식구들에게는 수시로 달려드는 개 ‘쮸’와 고양이 ‘꾸미’는 신기하게도 그에게만은 조심스럽게 행동하는데, 자신이 수없이 넘어지고 다치는 모습을 목격한 반려동물들이 배려하는 법을 터득한 게 아닐까 하는 것이 김지우씨의 짐작이다. 이 귀여운 에피소드는 (종을 넘어) 우리 모두가 개별적인 단독자이기보다는 상호의존적인 존재임을 드러내는 사소한 단서다.

 

활기 넘치는 김지우씨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어 듣다보니 어느새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을 던질 차례가 되었다. 장애인권과 관련해 25년 후 한국사회를 전망한다,라. 아득해지는 와중에 나름대로 정리한 나의 생각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동등한 시민이라는 명제를 더이상 의심받지 않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25년 후를 어떻게 전망하는지 묻자 “안 그래도 50살의 김지우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떠올려보았다”며 장애인권에 대한 생각부터 들려주었다.

 

언젠가 장애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제정된 UN 장애인권리협약을 찾아봤는데, 놀랍게도 ‘복지’(social welfare)라는 단어가 한번도 안 들어가더라고요. 반면 우리는 장애인 관련 정책을 펼친다고 하면 아직도 ‘약자’ 운운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의에서 출발한다 해도 장애인을 약자라고 명명하는 것 자체에 동등한 시민으로 보지 않는 무의식이 깔려 있다고 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장애인권의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공부를 하든 취업을 하든 장애인이 자립해 생활하려면 집 밖으로 나가는 것부터 출발해야 하잖아요. 그게 안 되는데 복지시설 늘리고 지원금 늘리는 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장애는 복지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어요.

 

그가 언급한 UN 장애인권리협약 중 ‘개인의 이동성’을 다룬 제20조 1항은 다음과 같다. “장애인이 선택한 방식과 시기에, 그리고 감당할 수 있는 비용으로 장애인이 개인적으로 이동하는 것을 촉진할 것”. 이 협약은 2009년 국내에서 발효되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지니나 십수년이 지난 2022년 말에서야 선택의정서가 비준되었다(선택의정서는 ‘개인진정제도’와 ‘직권조사권’이 포함되어 당사국의 협약 이행수준을 높일 수 있는 장치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리 보장으로 가는 길은 아직도 험난하기만 하다. 예를 들어 지난해 1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 증진법’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예산 편성을 의무화하지 않았다. 저상버스를 추가로 도입하고 지하철 엘리베이터도 추가 설치하겠다던 정부와 지자체의 약속이 예산 삭감을 이유로 번번이 깨져왔던 것을 생각하면 눈 가리고 아웅 하기다. 이것이 전장연이 시위에 나선 직접적인 이유다.

 

영국의 장애인 단체가 버스와 기차를 점거하고 시위했던 게 1995년이에요. 그로부터 대략 25년 후인 지금 한국에서 비슷한 운동을 하고 있으니 적어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우리도 장애인권이 좀더 신장되고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활발하게 울려 퍼지는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전망하고 싶습니다.

 

1995년 영국의 장애인 권리보장 시위에는 약 10만명이 참여했으며, 장애인 활동가들은 선로로 뛰어내려 기차를 막아서거나 휠체어로 주요 도로를 막고 버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차량 밑으로 몸을 밀어넣는 방식으로 투쟁했다. 영국 정부는 그해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제정했다. 25년 전의 영국과 지금의 한국을 연결지어 설명하는 그의 미소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25년 후에는 우리의 전망이 좀더 원대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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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未)장애인이라는 말이 있다. 현재는 장애가 없는 사람이라도 예기치 않은 사고나 질병, 노화 등으로 장애를 겪게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나누기보다는 장애인과 미장애인으로 구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주장에서 나온 용어다. 장애인들의 이동권 투쟁 덕에 도입되기 시작한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주로 노인 승객이 사용하고 있는 현실을 떠올려보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자신을 비장애인으로 ‘착각’한 이들의 목소리로 뒤덮여 있는 게 아닐까.

김지우씨는 선배 장애인들에게 빚진 기분이라고 했지만, 미장애인인 나는 모든 장애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느낀다. 마침 원고의 마감일인 4월 20일은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었다.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들이 보이고 들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체적으로 실천할 방법을 우리 모두 고민해보면 좋겠다. “우리 모두에게 무엇보다 꼭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이해하기만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마음속 깊이 믿고 알고 있는 진실을 실제 삶에서 실천하고 말함으로써, 그와 같은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 우리의 손발을 묶고 있는 것은 차이가 아니라 침묵입니다. 그리고 깨져야 할 침묵은 너무나 많습니다.”(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주해연·박미선 옮김, 후마니타스 2018, 51~5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