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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터뷰 | 새로운 25년을 향하여 | IT 기술

 

AI 시대? 결국 정치가 관건이다

 

 

박여선 朴麗仙

영문학자, 서울대 기초교육원 교수. 논문 「종말적 정동의 서사를 비틀기」 「기억과 서사,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 역서 『바다와 사르디니아』 등이 있음.

kirillo7@snu.ac.kr

 

 

인도적 기술주의를 주장하는 실리콘밸리 출신의 운동가 트리스탄 해리스(Tristan Harris)는 기술 산업이 현대사회에 불러온 문제들을 정의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을 인용해 오늘날 지구상 인간이 마주한 모든 문제의 원인이 다름 아닌 구석기 시대에 머문 인간 감정과 중세 시대에 머문 제도, 신의 경지에 도달한 기술 간의 불일치라고 말한다. 기술은 이미 신의 경지에 달해 원시적인 인간 감정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를 중재할 정치적 역량과 속도는 느려도 너무나 느리다. 그 와중에 기술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삶의 모든 국면에 스며들어 신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진단하고 우리가 그려볼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일지 고민해보고자 인문·사회와 기술 분야를 두루 아우르며 실무 경험을 갖춘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박태웅을 만났다. 가장 먼저 1990년대에는 한겨레 신문기자로, 2000년 이후로는 IT업계의 전문경영인으로 복무하며 기술 발달의 사회적 영향과 민주주의를 고민해온 그의 남다른 이력에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 궁금했다.

 

한겨레에 들어갈 때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고 싶었고 거기서 뼈를 묻을 생각이었어요. 그러다가 1995년 『한겨레21』에서 아마도 국내 언론매체 최초로 인터넷을 조명한 특집기사를 썼는데, 저한테는 인터넷이 너무 멋있고 좋아 보이더라고요. 2000년을 앞뒀을 무렵 이제 우리 사회도 어느정도 ‘민주화’됐고 올드미디어가 아닌 뉴미디어를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서 IT업계로 옮겼습니다. 창업을 할 거냐, 전문경영인이 될 거냐 하는 선택지가 있었는데 당시에 저는 전문경영인이라는 장르를 만들고 싶었어요. 미국처럼 전문경영인이 하나의 직업군을 이루고 있으면 자본주의가 더 성숙하고 효율적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해서, 1999년에 전문경영인 지위를 갖고 ‘인티즌’을 만들게 됐습니다.

 

국내 최초의 인터넷 허브포털사이트를 표방했던 인티즌은 출범 9개월 만에 100만명의 가입자를 모으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후 거듭된 기술 혁신과 이용자의 폭발적 증가로 인터넷이 ‘광장’의 역할을 하는 지금, 언론계와 IT업계에 모두 몸담아본 그는 우리의 인터넷 환경과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박태웅 의장은 언론이 비판적 사고 혹은 사회에 대한 메타적 성찰이라는 본령을 잃어버렸고 그로 인해 한국사회를 어떻게 더욱 나은 세상으로 변화시켜나갈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희망의 기준도 현저히 낮아졌다고 지적하며, 지금 한국 언론은 포털이라는 가두리 양식장에 갇혀버렸다고 진단했다.

 

언론 환경이 심각하게 황폐해져버린 이유로 포털이 독점적인 문지기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을 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령 기술적 측면을 보더라도 네이버에 올리는 기사는 외부 링크를 걸 수 없어요. 인터넷이 하이퍼텍스트(링크를 통해 다른 문서로 이동할 수 있는 글)인데, 링크를 누른 사용자들이 네이버 바깥으로 빠져나간다는 이유로 링크를 못 걸게 합니다. 전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에요. 게다가 다수 언론사가 건설사 소유라서 언론의 역할에 대해선 관심이 없고, 포털은 클릭수 기준으로 광고 수익을 나눠주니 그걸 받느라 기자 한명이 하루에 스물몇개씩 기사를 씁니다. ‘기사를 쓰느라 취재를 못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만큼 이 상황이 몹시 이상하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할 정도입니다. 이를 타개할 방법은 포털이 언론에서 손을 떼게 하는 것인데, 영세한 언론사 대부분이 독자 서버를 가질 수 없어 현실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언론사가 사실상 ‘공공기관’이라는 것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만들고 정부가 일정 과도기 동안 세금으로 지원한다든가 하는 방안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협소해지고 지금 같은 왜곡을 확대·강화하게 될 겁니다.

 

포털의 공고한 독점체제를 깨뜨리고 틈을 내는 데 있어, 최근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형시킬 것이라 평가되는 인공지능 기술이 활용될 여지는 없을까. 그러나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인공지능 기술의 미래에 대한 박태웅 의장의 전망은 암울하다.

 

인류는 이미 소셜미디어에서 그런 견제에 실패한 전례가 있습니다. 2021년 페이스북의 연구자가 내부 기밀문서를 월스트리트저널에 폭로했는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어온 여러 일들을 페이스북이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이 타임라인에 어떤 게시물이 보이게 할 건지를 결정하는 알고리듬(특정한 문제 해결 및 목적 달성을 위한 규칙의 집합인 알고리듬algorithm은 한국에서 ‘알고리즘’으로 통용되나, 박태웅 의장은 원래의 발음이 리듬[riðəm]과 같다고 짚으며 알고리듬으로 말하고 표기하는 것을 선호한다)을 바꾼 적이 있습니다. 원래 ‘좋아요’ 버튼밖에 없었는데 ‘싫어요’ ‘슬퍼요’ ‘화나요’ 등을 만들고는 ‘좋아요’를 받은 게시물에는 1점만 주는 대신 ‘화나요’를 받은 게시물에는 5점을 주고, 공유가 되면 30점을 줬어요. 그러고 나니 유럽 정당들의 페이스북 포스팅에 트래픽이 뚝 떨어져요. 공격적·적대적인 내용의 비중을 전체 게시물의 80%까지 올리고 나서야 트래픽이 예전 수준으로 회복됐습니다. 이에 유럽 정당들이 페이스북에 공문을 보내 어떻게 알고리듬을 바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같은 알고리듬이 사회 양극화를 부추기고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중단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페이스북의 경영진은 내부 보고서를 통해 새로운 알고리듬이 민주주의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 폭로가 있었던 때가 바로 페이스북이 회사명을 ‘메타’로 바꾸고 아직 성숙되지도 않은 메타버스를 띄울 때예요. 저로선 사회적 파장이 커지자 곤경에서 벗어나려고 쇼를 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래서 사회가 이 기업들에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요. 지금도 저 알고리듬은 유지되고 있고요. 기업의 ‘영업비밀’로요.

 

왼쪽부터 박태웅 박여선

왼쪽부터 박태웅 박여선. 박태웅은 KTH, 엠파스 등 IT 분야에서 일해왔으며 『눈 떠보니 선진국』을 펴냈다. © 신나라

 

박태웅 의장은 오늘날 미국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뛰어난 지능을 가진 소수가 압도적인 자원을 가지며, 어떤 견제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을 꼽는다. 오픈에이아이를 창립한 샘 올트먼(Sam Altman), 천재적인 인공지능 과학자 일리야 서츠케버(Ilya Sutskever), 거대 데이터회사인 팔란티어의 창립자 피터 씨일(Peter Thiel),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Elon Musk) 등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이 뛰어난 지능을 지닌 엘리트들이 기술의 사회적 효과에 대한 깊은 인식이나 온전한 양식까지 갖췄다고 장담할 순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인공지능 기술 개발에 있어 세계가 맞닥뜨린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이 천재들의 견제받지 않는 폭주라고 지적했다.

 

특이점을 넘어선 인공지능, 즉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인공지능을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AGI가 실제 나타났을 때 인간이 그것을 알아챌 수 있느냐예요. 인공지능이 자기보호를 위해 계속해서 멍청한 척을 할 수도 있지요. 어느 순간 인간의 지능을 훌쩍 넘어선 AGI가 ‘이렇게 고비용에 머리도 나쁘고 쓸데없이 싸우기만 하는 인간을 위해 뭐 하러 일해야 하나’ 생각하게 된다 해도—AGI로선 그게 논리적인 귀결일지 모르는데—인간은 알아차릴 방법이 없는 거죠. 그래서 샘 올트먼이 한두 기업이 AGI를 소유하면 문제가 생겨도 바로잡을 시간과 기회가 부족할 거라고, AGI는 공공의 소유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비영리재단 오픈에이아이를 만든 겁니다. 그런데 지난 3월 오픈에이아이가 지피티-4(GPT-4)를 발표하면서는 학습 모델과 데이터, 매개 변수의 크기 등을 하나도 공개하지 않았어요. 경쟁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하고 손잡고 작업했기 때문에 이제는 사업 기밀이 된 겁니다. 이건 오픈에이아이라는 비영리재단을 만들었던 취지와 명백히 상충합니다.

 

최근 오픈에이아이의 챗GPT 시리즈가 연달아 공개되면서 인공지능 경쟁이 과열되자, 미국의 선도적인 기술과학 분야 전문가들이 이 미친 질주를 6개월 만이라도 멈추고 AI 기술이 인류와 사회에 가할 심대한 위협을 재고해보자는 공개서한(“Pause Giant AI Experiments,” Future of Life Institute 2023.3.22)을 냈다. 발표 일주일 만에 천여명이 서명한(5월 8일 기준 서명자는 2만명을 훌쩍 넘어섰다) 공개서한에서는 이 내용에 반대하고 싶다면 다섯가지 질문에 반드시 답을 하도록 요구했다. 박태웅 의장은 자리에서 바로 서한을 찾아 그 질문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첫째, 기계가 우리의 정보 채널을 선전(宣傳)과 거짓으로 가득 채우도록 내버려둬야 할까. 둘째, 만족스러운 일을 포함한 모든 일을 자동화해야 할까. 셋째, 결국에는 인간보다 더 똑똑한 인공지능이 쓸모없는 우리를 대체해버릴 수도 있을 텐데 계속 개발해야 할까. 넷째, 우리 문명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다섯째, 이처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결정을 선출되지 않은 기술 리더에게 위임해도 될까.

 

올트먼 진영은 이런 질문에 대해 자기들이 아니더라도 중국이나 어딘가에서 결국 개발할 것이라는 상황론과, 6개월간 연구 중단은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을 내세우고 있어요. 그리고 인공지능의 부작용을 짐작할 수 없으니 계속 실험해야 한다고도 주장합니다. 인공지능은 매개 변수를 늘릴수록 능력이 좋아지지만, 불현듯 나타나는 ‘새로운 능력’(emergent ability)도 있거든요. 특별히 미세조정(fine-tuning)을 하지 않아도 질문에 대답을 잘하는 ‘파운데이션 모델’ 혹은 ‘만능 모델’이 되는 것이죠. 올트먼은 이런 거대 모델들일수록 계속 써봐야 부작용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해요. 나아가 자신은 규율을 통해 신중하게 실험하고 있지만 그러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서 걱정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는 감시자는 누가 감시하는가와 같은 ‘감시자의 딜레마’에 정확히 부합하는 말이죠. 더 황당한 건, 이들이 공개서한의 다섯가지 질문에는 답을 회피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 문제에 대해 세계적인 학자 게리 마커스(Gary Marcus)가 훌륭한 제안을 했어요. “중요한 것은 배포를 중단하는 것이다. 6개월 동안 연구를 중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일단 배포를 중단하고 규율을 어떻게 세울지, 배포를 어떻게 할지 등 최소한의 기준에 대해 전세계가 동시에 합의하자”는 거예요. 궁극적으로 마커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AI의 발전이 불가피한 것처럼 말하지 말자, 이건 우리가 개발하고 있는 어떤 물건일 뿐이지 천재지변처럼 우리한테 다가오는 것도 필연적인 미래도 아니다, 6개월 동안 배포하지 않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나는 로봇보다 인간이 두렵다”고 한 적도 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기술 전문가 중에는 ‘인류는 인공지능이라는 본격적인 지성을 실행하기 위해 먼저 돌린 작은 프로그램(부트로더Boot Loader)일 뿐’이라고 보는 시각마저 있으니까요.

 

“아무리 AI라도 전기가 없으면 끝 아닌가요?” 다소 무식한 나의 질문에 “그것까지 스스로 자급자족하게 될 거라고 보는 거죠, 인간이 상상하지 못한 효율적인 방식으로”라는 답이 날아온다. 이거는 뭐,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 신의 영역을 넘봤던 프랑켄슈타인보다 나가도 한참 멀리 나간 것이다.

기술 낙관주의자들은 지성의 진화를 필연적이라고 보는데 실상 이 진화라는 개념 자체는 근대의 산물이다. 이런 맥락에 대한 이해도 없이 그저 뛰어난 지적 능력을 사용해 일반인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방식으로 뭔가를 개발하고 진도를 나가고 있다는 데 잠재적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뭐 그렇게 달라,라고 쉽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라는 박태웅 의장의 말에, 그런 경향은 그들의 뇌가 지나치게 과학적·기술적 사고에 편중돼 인문학적·비판적 사고가 부족해서 생긴 것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각 부문의 전문화가 끔찍한 속도로 심화하고 있어요. 그래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입자 물리학자라 해도 바이오 분야 과학자가 쓴 논문의 도입부도 이해 못하는 일이 생길 수 있어요. 부문 간 전문화가 심화하며 반성적 사고를 할 공간이 좁아지고 그런 훈련을 받을 여력도 없어진단 말이죠. 그런데 문제라는 건 항상 전인류적이고 전사회적이고 복합적입니다. 저는 철학자 러셀(B. Russell)이 했던 말이 이 상황에 적절하다고 생각해요. 대학 교육은 전문화 현상을 교정하는 수단이어야 한다, 문학·역사·철학 같은 학문이 지닌 인문학적 가치를 시간이 허락하는 한 많이 제공해야 한다는 거죠. 이 천재들의 손에 쥔 무기의 위력에 비해 머리에 들어 있는 철학이 너무 빈곤하니 인문학 교육이 지금의 가속도를 그나마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처방이 될 수 있고, 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의 고등교육을 생각하면 상황은 더욱 절망적인 듯하다. 인문학은 물론 기초과학 분야도 외면받는 반면 너도나도 의대와 로스쿨에 사활을 거는 현실이다. 게다가 대학은 디지털 시대에 맞추어 교육 모델을 전환해야 하는 새로운 도전까지 맞고 있다.

 

한국 정도의 부자 나라에서 사회적 안전망이 이렇게까지 약한 나라가 없어요. 한국은 OECD 국가 중 복지 수준이 압도적으로 낮고, 빈곤 탈출률도 OECD에서 꼴찌입니다.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 1위라고 하는데, 80세 이상 노인 자살률은 그보다도 2배 이상 높습니다. 노인 빈곤율 때문이죠. 한마디로 지금 한국사회는 각자도생의 생지옥이고, 입시는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존투쟁의 장이 되는 겁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두고 교육제도나 입시제도를 아무리 바꾼들 소용없는 거죠.

따라서 우리의 노후가 곧 생명의 위협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도록,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공론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4차 산업혁명’의 시대가 됐으니 우리는 이 시대를 어쨌든 또 살아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사회를 더 민주화하고 모든 사람이 디지털 문해력, 그러니까 디지털의 정체와 그것이 불러올 변화를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게 교육해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물질적·정신적으로 궁핍한 삶에 내몰릴 수밖에 없습니다. 눈 뜨고 당하는 거죠.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을 생각할 때 제일 걱정되는 것이 당장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도태될 수많은 사람이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으로 시장이 재편되면 많은 사람이 궁지에 몰리거나 사회 안전망에서조차 떨어져 나갈 위험이 큰데, 이미 심각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더욱 극심해질 것이다.

 

명백히 그런 위험이 있다고 봅니다. AI가 불러올 위험들이 있고 그것은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한동안 인류는 이전보다 훨씬 끔찍한 생활환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농민이 몰락하고 도시빈민이 생기고 어린아이들이 공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어요. 서민들이 산업혁명 이전의 생활수준을 회복하는 데 90년이 걸렸고요. 그 산업혁명을 기계가 사람의 몸을 대체하는 혁명으로, 최근의 변화를 기계가 사람의 마인드를 대체하는 혁명으로 본다면 또다시 끔찍한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죠.

더 큰 문제는 지금 우리 사회가 이에 대한 공론의 장을 만들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겁니다. 한국은 산업화 시대의 모범생이었잖아요. 현재도 정책적·제도적 초점이 기술 개발에서 뒤처지면 어떻게 하나,라는 데 가 있어요. 빨리 따라잡아야 한다는 입장이 99%고, 여기에 위험성이 있으니 빨리 공론화해야 한다는 입장은 1%밖에 없어요. 게다가 사회문화적으로도 새로운 건 좋은 것, 과학기술은 좋은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미신이 난무합니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전세계적인 현상인 만큼 유럽연합 등과 교류하고 초국가 차원에서 기준을 만들어 법제화하는 작업을 서둘러 같이 해나갈 필요가 있어요.

 

그동안 한국이 수많은 성과와 진전을 이뤘음에도 여전히 따라잡기 수준에 갇혀 있는 이유를 무엇이라 보는지 궁금했다. 한반도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구시대의 냉전 대립구도를 유지하고 있고, 지난 역사에서 해결되지 않고 여전히 진행 중인 문제들에 발목을 잡혀 주저앉는 일이 허다하다. 너무나 쉽게 과거로 회귀해버린 현재의 정치적 상황이야말로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이제 정말로 근본적인 타개책이 필요한 시점 아닐까.

 

한 방송에서 한 얘기인데 사람이 마라톤을 뛰면 몸의 가장 약한 부분부터 아프기 시작해요. 단거리를 뛸 땐 몰라도 마라톤을 뛰면 가장 약한 부분이 드러나는 진실의 순간이 옵니다. 이렇게 뛰다가는 죽는다, 저는 지금이 우리 사회에 닥친 그런 진실의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전(前) 시대에 대한 반성과 정리를 잘하지 못한 채로 현대를 맞았어요. 그 근본 없는 허약함이 지금 드러나고 있는 거죠. 예를 들면 민주공화정의 기본 정신이 견제와 균형인데, 그간 견제받지 않은 권력이 너무 많았다는 게 백일하에 드러나고 있거든요. 검찰권력이 대표적인 예인데, 한국의 검사·판사는 아무 견제 없이 기소와 판결을 독점해왔죠. 이게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됐습니다. 지금은 우리 사회가 반성 없이 현대로 던져지면서 못 갖춘 것들이 드러나는 시간이고, 그게 근본적인 변화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꼭 나쁜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물론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 대표가 당선됐다면 좀 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오히려 두번 이어지는 민주정부에 대한 공격과 공작과 각종 마타도어가 더 많았을 수도 있었겠지요.

 

생각해보니 제대로 도약하기 위해선 먼저 한걸음 뒤로 물러나야 한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회귀는 근본적 변화를 불러오는 데 필요한 물러섬의 시간일지도 모른다. 박태웅 의장은 또한 제대로 된 반성과 정리를 통해 극복해야 할 우리의 중대한 정치적 과제 중 하나로 ‘봉건 잔재로부터의 해방’을 꼽았다. 이 문제에서는 진보와 보수 모두 자유로울 수 없다.

 

진보든 보수든 어떤 봉건적인 질서를 내재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어느 한 지도자를 따라가는 길이 유일하다고 생각하는 메시아주의가 그렇죠. 지금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이 다수당이고 국회에서 입법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대단히 많은데도 법을 만들고 있지 않죠. 왜 그렇게 됐을까? 지도자한테만 맡겨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 식의 메시아, 주군 개념을 넘어서서 우리가 선출한 리더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대리자이니 그에게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봐요. 국민의힘도 마찬가지예요. 당 지도부를 뽑는데도 윤대통령의 뜻에 거슬리는 일을 할까봐 난리고, 대통령의 사당(私黨)처럼 되어버렸어요.

이대로 계속 가면 조만간 우리는 동북아시아 질서에서 일본의 서브셋(subset)으로 들어가게 될 거예요. 미국 중심의 동북아 전략에 말할 수 없이 고분고분하고 때로는 돌격대장처럼 구니 그저 일본 밑으로 묶을 수 있는 나라로 둬도 충분한 거지요. AI가 우리를 망치지 않아도 우리는 저절로 망해 있을지도 모릅니다. 빈부격차가 끝도 없이 확대되면 외려 포퓰리즘이 기승을 부리는 환경이 될 텐데, 지금의 국민의힘은 이미 지독한 극우 포퓰리스트 정당이에요. 이런 정당이 득세해서 안정적인 과반을 차지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렵습니다. 사회가 극단적으로 양극화되고 ‘일베’ 같은 정서가 젊은이들의 지배적 정서가 되고…… 지금도 한국사회는 이미 천박해졌는데 그때는 염치고 뭐고 없는 끔찍하게 파렴치한 세상이 올지도 모릅니다. 뭐가 됐든 적당한 중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있을까. 우리가 창조적으로 대처할 방법은 무엇일까. 희망적인 미래를 불러오기 위해서 어떤 역량을 키워야 할까.

 

무엇보다도 공론의 장을 회복해야 합니다. 한국에서 배심원제도가 못 나오는 이유는 어중이떠중이 모아서 그런 일을 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런데 실제로는 무작위로 뽑힌 평범한 시민들이 모여 합의를 해도 판사의 판결과 판단이 다르지 않다는 것이 여러 실험에서 충분히 증명됐어요. 오히려 요새 검사들 하는 거 보면 얼마나 멍청합니까. 저는 일반 시민들이 모여서 공론화 작업을 통해 내리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론, 집단지성이 훨씬 뛰어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어쨌든 정당이 큰 역할을 해야 하는데, 저는 정당에 대한 소비자운동 같은 게 생겼으면 좋겠어요. 이를테면 민주당의 권리당원들이 천원의 당비를 내는데, 그 금액을 모으면 일년에 150억원이 넘어요. 이게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정당에 돈을 내고 표를 주는 사람들이 정치소비자운동 혹은 정당주권자운동을 하면 좋겠어요. 이런 일을 해라, 이런 주제를 공론화해라 요구하는 거죠. 민주당도 계속 지금처럼 조직된 역량을 만들지 못하면 그냥 160여명의 보따리장수들이 모여 있는 꼴밖에 안 됩니다. 정당주권자운동이나 정치소비자운동을 통해 주권자들이 자기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작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 환경을 만들려면 일단 현 정치 상황을 어떤 식으로든 타개할 필요가 있을 텐데, 이를 위해 그는 같은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끼리 거듭 대화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벽에라도 대고 얘기하라’고 한 것처럼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주변에서 알고 듣게 만드는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 경험으론 뭐든지 바뀌는 데 최소한 10년은 걸리거든요. 10년, 20년, 30년, 아니 죽을 때까지 한다는 마음으로 조바심 내지 말고 계속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사회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고 봐요. 한국사회만큼 강력한 집단지성을 매번 작동시켜온 사회가 없습니다. 시민항쟁의 역사가 깊고 클뿐더러, 촛불혁명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정권을 갈아치운 경험이 있죠. 그래서 충분히 어떤 장을 만들어서 정치소비자운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인터넷도 충분히 발전해서 큰돈 안 들이고 그런 운동의 장을 만들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박태웅 의장도 개인으로서, 시민으로서, IT 종사자로서 열심히 말하고 쓴다. 2018년에 ‘이제부터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그는 글을 써서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마음먹으며 스스로 두가지를 다짐했다고 한다. 첫째, 근거가 없는 글은 쓰지 않겠다. 둘째, 대안이 없는 글은 쓰지 않겠다. 옳기만 한 말은 30대까지 쓰면 적당하다, 충분히 나이가 든 뒤에도 계속해서 옳기만 한 말, 하나 마나 한 말을 해서야 세상에 한점 보탬이 되기 어렵겠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25년 뒤 한국의 미래를 상상해보고 21세기 중반이 되면 우리 사회의 정보기술 분야에서 제일 핵심적인 키워드가 무엇이 될지 가늠해달라고 요청하니, 기술 변화가 빨라도 너무 빨라 가늠이 어렵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25년 뒤는커녕 3년 뒤에 어떻게 돼 있을지도 모르겠는데요. 구글 CEO한테 3년 뒤에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어봐도 모른다고 할 겁니다. 지구 역사상 종(種)이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가 캄브리아기잖아요. 지금은 AI의 캄브리아기라고 부르는데, 제 주변의 AI 과학자들이 전부 깔려 죽을 것 같다고 해요. 심지어 앞서 언급한 공개서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정말 6개월 쉬었으면 좋겠다, 쏟아져 나오는 논문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합니다.

낙관적 전망을 하기 위해서는 결국 정치가 관건일 수밖에 없죠. 정치가 뭘 하는 일인지 한마디로 말하면 ‘사회의 자원을 어떻게 배분할지 공론화를 통해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분야가 중요하고, 어디에 자원을 배분해야 하고, 미래는 어떻게 될 테니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게 정치이고, 현재뿐 아니라 미래의 모양을 잡아나가는 게 정치입니다. 그렇다면 주권자로서, 돈을 내는 사람으로서, 표를 주는 사람으로서 정치를 어떻게 변환할 수 있는가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겠죠. 이를 잘해내면 저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훌륭한 나라가 돼 있을 것 같아요. 그건 틀림없는 일이지요.

 

그렇다. 결국, 정치가 관건이다. 기술은 세계와 맥락을 초월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속한 맥락이 있다. 최근 우리 사회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가 극에 달해 정치란 본래 추잡한 스캔들에 불과하며 불통과 위선으로 점철된 해결 불가능한 갈등이라는 클리셰가 거의 진리처럼 여겨지는 현실이다. 이런 믿음에 기생하여 권력을 확대해가는 세력들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라도 우리가 정치의 본래의 의미, 사회자원의 합리적인 조정과 배분이라는 그 지극히 상식적인 의미를 회복해야 할 엄중한 시기에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