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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인터뷰 | 새로운 25년을 향하여 | 동북아 평화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겠습니다”
이순애 李順愛
여성사 연구자. 저서 『전후시대의 전쟁책임론(戰後世代の戰爭責任論)』 『2세의 기원과 ‘전후사상’(二世の起源と‘戰後思想’)』 등이 있음.
사또오 히사시 佐藤久
번역가. 일본어로 옮긴 책으로 황석영 『무기의 그늘(武器の影)』 등이 있음.
이번 『창작과비평』의 200호 기념호에는 러시아사와 북한 현대사 연구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베트남전쟁 반대운동, 한국 민주화운동과의 연대 등을 주도한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와다 하루끼 선생과의 인터뷰를 게재하기로 했습니다. ‘창비’와도 인연이 깊은 선생은 현재, 세계적인 문제로 떠오른 우끄라이나전쟁에 대해서 활발하게 제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단된 한반도의 문제도 엿보입니다. 이순애, 사또오 히사시 저희 두 사람은 지난 4월 10일과 5월 4일 양일에 걸쳐 선생님을 뵙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또오 히사시 제가 와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68년 5월, 선생님이 역 앞에서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에 태어나 일곱살이던 1945년 일본의 패전을 보았고, 십대 시기에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정전을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 “나는 이 두개의 전후에 성장”했으며 “전쟁과 평화의 문제는 나를 둘러싼 역사학에 있어서 생애의 기본 문제였다”(『러시아 혁명: 뻬뜨로그라드 1917년 2월』 2018)고 쓰시기도 했지요. 그러한 전쟁 체험은 이번 우끄라이나전쟁에 대해서 ‘즉시정전(即時停戰)’을 주장하시는 선생님의 입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요?
와다 하루끼 전쟁을 처음 겪었을 때 나는 군함이나 비행기, 군인이나 사무라이 그림을 그리며 놀고 있던 아이였어요. 그러나 우리 집이 있었던 시미즈시(清水市)도 미 공군의 공습을 받았고, 방공호 속에서 B29가 하늘을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에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이 마냥 기뻤어요. 다음으로 한국전쟁은 나의 중학교 시절과 겹칩니다. 그때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불안했을 따름이지요. 그리고 1965년에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나이 서른의 사회인이 되어 있던 나는 처음으로 전쟁과 정면으로 마주했습니다. 처음에는 ‘베트남에 평화를’ ‘죽이지 마라’ 등의 베평련(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에서 내놓은 슬로건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1968년에 나 자신이 그룹을 만들어서 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사또오씨는 그때부터 운동을 함께해온 저의 50년 동안의 친구이지요—침략자 미국을 쫓아내고 심판하고 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의를 추구했습니다. ‘미군 해체’ ‘자, 여기서 전쟁의 기계를 멈추자’ 등의 슬로건은 우리가 중심이 되어서 내놓은 것들이에요. 우리는 미군 내부의 반전 병사와 하나가 되어 미군을 패배시키기 위해서 운동했습니다. 1975년 마침내 미국은 패배해서 베트남에서 도망쳤지만 정의는 실현되지 않았어요. 미국은 사죄하지 않았으며 배상하지도 않았고 재판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핵대국 미국은 침략을 거듭합니다.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파괴무기를 숨기고 있다고 주장하며 2003년에는 이라크를 공격했으며 사담 후세인 정권을 타도하고 후세인을 처형했습니다. 그래서 정의의 실현보다도 전쟁을 멈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이 시작되자 처음부터 ‘즉시정전’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나의 80년 동안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순애 실제로 작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끄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선생님은 전쟁을 멈추기 위한 행동을 개시하셨지요. 작년 3월에 일본정부가 우끄라이나전쟁을 하루 빨리 멈추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는 첫번째 성명을 발표하셨고, 5월에는 제2차 성명을 한일 공동으로 발표하셨습니다. 7월에는 유엔 사무총장을 수취인으로 「우끄라이나전쟁의 정전을 중재해주세요」라는 공개서한을 역시 한국과 일본의 시민과 연구자 이름으로 발표하셨고요. 올해 들어서도 얼마 전 「“지금이야말로 정전을” “우리 지역에 평화를”: 2023년 5월 히로시마에 모이는 G7 지도자에게 보내는 일본 시민의 선언」을 발표하시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와다 선생님 등의 즉시정전 호소는 아직 소수의 목소리라고는 해도 일본의 여론 형성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전쟁을 계기로 갑자기 텔레비전 보도 프로그램의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이른바 군사전문가라는 사람들에 의한 현실파악과 상황 해설이 일상적인 풍경이 되어버린 일본사회에서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라는 제1차 성명의 마지막 구절은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떠오르는 강렬한 호소입니다.
와다 하루끼 작년 2월 24일, 러시아의 뿌찐 대통령이 “우끄라이나 동부에서 특별한 군사작전을 개시”한다고 발표하고 우끄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러시아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나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350여년간 하나의 나라였다가 30여년 전에 우끄라이나가 독립해서 두개의 나라가 된, 같은 슬라브 국가인 러시아와 우끄라이나 사이의 전쟁은 그야말로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전쟁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 내 안에서는 미국이 왜 개전을 막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어요. 2021년 10월, 러시아가 우끄라이나 국경의 군대를 10만명 규모로 증강했을 때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 뿌찐과의 회담을 개최했다면 어땠을까요? 러시아가 그렇게까지 우끄라이나의 나토(NATO,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을 두려워하고 있다면 우끄라이나를 가입시키지 않도록 하겠다, 그 대신 우끄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보장하라고 해서 협정을 맺었다면 개전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한편 전쟁의 전개를 보면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향해서 진군하고 우끄라이나군이 필사적인 방어전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개전으로부터 불과 4일 만에 러시아와 우끄라이나의 정전협의가 시작된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3월 29일에는 이스탄불에서 튀르키예가 중개한 제4회 협의가 열렸고 우끄라이나 측이 분명한 정전 조건을 내걸자 러시아가 이를 환영하면서 키이우 방면의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생겨난 정전의 희망은 얼마 되지 않아 사라져버렸지요.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만 그보다 이틀 전인 3월 2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이 전쟁은 “민주주의를 위한 장기적 투쟁의 최신 전투”라고 선언하고 미국은 우끄라이나와 함께 싸울 것이며 이 투쟁에 장기간 힘쓸 것이라는 결의를 피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이러한 결의로 보자면 우끄라이나가 이틀 후에 내건 타협적인 정전 조건은 지지받지 못했으리라고 생각돼요. 이후 4월 3일 우끄라이나 검찰총장은 러시아군이 철수한 부차 지역에서 학살된 시민 410명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합니다. 그러자 이에 폭발한 분노가 미국과 유럽을 뒤덮었고 정전회담은 무산되고 말았어요. 그리고 전쟁은 동부 방면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바이든의 바르샤바 연설은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전쟁’ 선언이었습니다. 미국 병사는 참전하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우끄라이나인일 뿐입니다. 미국은 무기와 재정, 정보와 작전 조언을 최대한 제공하면서 그 자신은 제재에 의한 경제전, 관민이 참여하는 정보선전전을 전개하는 것이죠. 이 전쟁은 이라크전쟁, 아프간전쟁처럼 미군 전사자를 내지 않으므로 그러한 한 언제까지고 계속할 수 있는 꿈같은 전쟁입니다. 미국은 미러전쟁—핵전쟁이 될 겁니다—이 일어나지 않는 동안은 이 전쟁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이순애 바르샤바에서 바이든의 발언은 제 기억에도 남아 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어럽쇼, 하고 생각했던 것을 지금도 명료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전을 향한 움직임을 ‘정반대로 거스르는 짓’을 하는 데 깜짝 놀랐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와다 하루끼 내가 우끄라이나전쟁에 대해서 줌 화상회의 ‘러시아의 우끄라이나 침공을 하루라도 빨리 멈추기 위해서 일본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소집하고 그 회의에서 성명을 낼 것을 촉구하여 「우려하는 일본 역사가의 호소문」이라는 최초의 성명을 발표한 것은 작년 3월 15일의 일입니다. 일본정부가 중국, 인도와 함께 정전을 촉구하고 중재해줄 것을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다음 날 외무성에 전달했지만 일본정부는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24일에 러시아대사관을 방문해서 대사에게 즉시정전을 요청했습니다. 그다음에 발표한 것이 5월 9일의 성명 「일본, 한국, 그리고 세계의 우려하는 시민은 우끄라이나전쟁 즉시 정전을 촉구한다」입니다. 미국의 개입으로 전쟁이 본격화된 것을 염두에 두고 5월 하순 토오꾜오에서 쿼드(QUAD, 미국과 일본, 인도, 호주의 4자 협의체) 회의가 개최되는 것을 의식하며 한일공동행동에 나섰던 것입니다. 나는 이미 4월 11일에 한국의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학술회의 ‘우끄라이나전쟁과 한반도’에서 한신대의 이해영씨가 주목할 만한 보고(「포스트 우크라이나 세계질서」)를 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사또오씨와 호떼이 토시히로(布袋敏博)씨와 함께 곧바로 일본어로 번역하여 소개한 바 있었어요. 그래서 서울대의 남기정씨를 통해서 이해영씨에게 연락하여 함께 성명을 낼 수 있었습니다. 백낙청 선생도 그 성명의 서명자로 참여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이후에 안또니우 구떼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것도 기본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의 한일공동행동이었습니다.
이순애 선생님은 당초부터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의 전말을 의식하면서 우끄라이나전쟁의 정전을 전망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은 1995년에 『한국전쟁』을 쓰셨고 1999년 서동만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한국어판을 내셨지요. 2002년에는 새롭게 『한국전쟁전사』를 쓰셨고 그 한국어판도 조만간 출판될 예정이고요 ‘즉시정전’은 이처럼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를 전개해오신 선생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한국전쟁이 정전협정으로 전쟁을 끝낸 유일한 사례라고도 말씀하고 계시지요?
와다 하루끼 즉시정전을 촉구해왔던 나는 정전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처음부터 고민하고 있었어요. 우끄라이나전쟁을 종결시키는 방법은 한국전쟁을 참고로 해서 그것과의 비교로부터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계전쟁과 그렇지 않은 전쟁, 지역적인 전쟁과 두 나라 간의 전쟁은 각각 사정이 다릅니다. 우끄라이나전쟁의 기원은 소련의 해체에서 비롯된 우끄라이나의 독립과 거기서 야기된 대립에 있어요. 한국전쟁도 일본제국의 항복과 해체에 따른 조선의 독립, 연합국에 의한 분할점령, 적대적인 두 국가의 탄생, 무력통일을 위한 전쟁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졌던 만큼 민족적인 비극이라는 점에서 서로 닮은 데가 있습니다.
이순애 선생님은 제1차 성명을 발표한 직후에 한 인터뷰에서 ‘한국전쟁의 교훈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국전쟁은) 중재자가 부재한, 게다가 전쟁을 하면서의 정전 교섭이었던 까닭에 1951년 7월에 시작된 교섭이 정전협정으로 결실을 이룬 것은 1953년 7월이었다. (…) 교훈은 중재자를 세우는 것. 정전을 하고 교섭하는 것이다.”(『선데이 마이니찌』 2022.4.17) 이처럼 매우 명쾌한 교훈을 도출해내고 계십니다.
와다 하루끼 한국전쟁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인한 개전, 낙동강까지의 점령, 미 공군의 맹폭, 유엔군의 반격, 조선인민군의 패주, 한국군 북침, 유엔총회 결의에 의한 유엔군 북침, 평양 함락,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유엔군의 패주라는 경과가 있고 양군이 38도선 근처에서 대치하게 된 상황에서 정전이 제시되었습니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전쟁을 확대해서 중국 본토를 폭격하고 원자폭탄을 사용하며 대만군의 본토 침공을 실행할 것을 제안했지만,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하지 않고 정전을 촉구해야 한다면서 맥아더를 해임하고 미 국무성의 조지 케넌에게 소련의 말리끄 유엔 대사를 만나 정전할 의사를 전달하도록 합니다. 하긴 한반도에서는 원자폭탄을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듯한 태도긴 했어요. 그러나 미국은 한국정부에는 정전 문제에 대해서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소련의 스딸린은 정전회담을 하는 동안 전쟁을 계속해도 된다면서 김일성을 설득했고, 중국도 북한도 이를 수용하여 개전으로부터 1년 15일이 되던 날에 개성에서 정전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번 우끄라이나전쟁도 이미 1년이 지났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 정전의 현실성과 가능성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끄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에서 정전회담이 시작되면 최대의 문제는 아마도 군사경계선 결정 문제일 거예요. 군사경계선을 어디에 긋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한국전쟁의 정전회담은 1951년 7월에 시작되었으나 군사경계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11월 23일이었고 이는 정전을 향한 큰 전진이었습니다. 그러나 군사경계선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음에도 곧바로 정전이 실현되지는 않았어요. 미국 대통령이 자유를 위한 전쟁이니 포로는 각자가 원하는 곳으로 돌아가도록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립이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진영이 제네바합의에 따라 포로를 신속하게 인도할 것을 주장하자, 유엔군 측은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게 할 목적으로 북한에 맹렬한 폭격을 실행합니다. 평양은 이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고, 그러자 김일성은 즉시정전을 바라게 되었어요. 한편 이승만은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정전에는 반대였기 때문에 포로를 수용소에서 석방하면서 포로 인도를 방해하는 행동에 나섭니다. 정전이 다가오자 이승만 대통령의 저항이 큰 문제가 되어 미군에서는 한때 그를 쿠데타로 해임할 것을 진지하게 검토했을 정도입니다. 정전협정이 조인되어 정전이 실현되었지만, 정전협정은 3개월 이내에 쌍방의 대표에 의한 ‘보다 높은 수준의 정치회의’를 열어 외국군대의 철퇴, 조선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을 결정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정전 9개월 후에 제네바회의가 열렸지만 그 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결렬로 끝났습니다. 이후 7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뿐더러 군사적 대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1953년에 정전협정을 맺기를 잘했다고 한국도 북한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지금 미국은 정전의 방법을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우끄라이나의 승리를 목표로 끄림반도를 탈환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젤렌스끼 대통령과의 대립을 걱정하고 있을 겁니다.
이순애 최근에도 북한은 동해·일본해(동해 수역의 국제적 표기를 ‘일본해’가 아닌 ‘동해·일본해’east sea·sea of Japan로 하자는 운동이 한국을 중심으로 지난 30여년간 이어져왔으며, 저의 발언에서도 이같이 병기함을 밝힙니다—필자) 쪽으로 빈번하게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습니다. 와다 선생님은 올해 2월 한 강연에서 배포된 「2023년 연두(年頭)의 세계 위기」라는 발표문의 마지막에 이렇게 쓰셨어요. 일본인에게 하시는 말씀이지만 저는 북한에 있는 동포들에게도 선생님의 이 메시지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일본해에서의 평화와 부전(不戰)의 서약입니다. 일본정부를 북일국교정상화에 나서게 함으로써 일본해에서의 평화 합의를 쟁취해야 합니다. 일본해를 전쟁의 바다로 만들지 맙시다. 일본해를 평화의 바다, 블루 씨(blue sea)로 만듭시다.
지금 현재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또 동북아시아의 연대와 평화 등에 대해서 앞으로 25년 후, 요컨대 장기와 단기의 중간 정도에 해당하는 전망에 대해서 들려주세요.
와다 하루끼 우끄라이나전쟁이 세계전쟁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즉시정전을 촉구함과 동시에 이 전쟁이 다른 지역으로 확대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미국은 전세계적으로 러시아를 포위해서 압박할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리고 유라시아 국가인 러시아의 동쪽, 즉 동아시아 쪽으로부터도 미국, 일본, 한국의 힘에 의해 압박이 가해지기를 원하고 있고요. 이 지역에는 러시아를 비난하는 유엔총회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진 북한이 있습니다.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난폭하게 굴고 있는 북한을 압박하면 러시아를 압박하는 것이 되죠. 2006년 일본 아베 총리는 북일국교정상화라는 국민적 과제를 안고 있었음에도 납치된 일본인들이 모두 살아 있다고 주장하면서 전원을 즉시 송환하라고 압박하는 대북한 적대선언으로 북일관계를 극도로 긴장시켰습니다. 일본은 북한에 대한 제재를 전면화하고 긴장을 극단화하면서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있어요. 5월에 열리는 G7 히로시마 정상회의에서는 북핵제재를 극도로 강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다 일본이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직접 타격할 수 있는 적기지 공격 미사일을 보유하겠다는 결의까지 표명될 것입니다. 이처럼 일본이 하고 있는 것과 하려고 하는 것은 한국에게 모두 치명적이에요. 따라서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은 북일국교정상화를 지지하여 북미·북일 관계의 긴장을 완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4월 5일에 발표한 「2023년 5월 히로시마에 모이는 G7 지도자에게 보내는 일본 시민의 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러시아와 우끄라이나는 한국전쟁의 전례에 따라서 즉시정전을 위한 협의를 재개해야 합니다. (…) 우끄라이나전쟁을 유럽의 바깥으로 확대하는 것을 단호하게 막아야 합니다. (…)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대만, 만주를 반환했습니다. 따라서 일본은 북한, 한국, 중국, 대만과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시민은 일본해(동해)에서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으며 대만을 둘러싼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이 “북한, 한국, 중국, 대만과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명시적인 서약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이 궁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본 헌법 9조가 일본국가의 평화와 부전의 서약인 이상, 일본이 처음에 침략했던 두 나라와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것이라는 점을 일본인은 지금 반드시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이라는 것을 꿈꾼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2017년에 북한 당국이 ‘긴급사태’가 일어나면 재일미군기지를 겨냥하는 포병부대가 미사일을 발사할 것이라고 공언한 상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북한의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이 일본을 향하고 있는 가운데 북일국교정상화를 지향하는 것 이외에 길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은 동해(일본해)를 전쟁의 바다로 만들지 말라는 외침이 가장 절실하게 울려 퍼지는 때인 것입니다.
‘일본해’와 ‘동해’라는 지명을 둘러싼 다툼은 일본, 한국, 그리고 북한 세 나라 국민 사이에서 대립의 씨앗이었습니다. 동해(일본해)를 진정한 평화의 바다로 만들 수 있다면 그때는 ‘블루 씨(青海)’라고 부르도록 합의하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일의 연대를 마음 깊이 바라고 있습니다.
번역: 곽동곤(郭東坤) / 고려대 일어일문학과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