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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 다시 읽고 싶은 책

 

 

오수연 『부엌』, 강 2006

타자의 자리를 묻다

 

 

정홍수

鄭弘樹 / 문학평론가 myosu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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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수연은 2000년대 초반 한국일보문학상(2001), 신동엽창작상(2008)을 수상하는 등 주목할 만한 작품활동을 펼치는 한편, 민족문학작가회의 파견작가로 팔레스타인에 머물며 반전평화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소설 쓰기에도 녹아들었지만, 이후 지속적인 연대활동과 함께 팔레스타인 작가와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는 일에도 줄곧 힘을 기울여왔다. 돌아보면 2001년 출간된 연작 장편소설 『부엌』(초판 이룸 2001)은 ‘경계짓기’와 ‘타자’에 대한 집요하고 전면적인 질문을 통해 오수연의 작가적 삶에서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게 아닌가 싶다.

『부엌』의 작중화자 ‘나’는 낯선 나라에 유학을 와 있는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다. 작가는 인도로 짐작되는 소설의 공간적 배경뿐 아니라 주요 인물들의 국적을 명시하지 않는데, 사람들 사이의 ‘경계’ 혹은 ‘경계짓기’에 대한 소설의 질문을 좀더 근원에서 강렬화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뿌리 깊은 종교적 지향이 신분사회의 질곡, 계층 간 경제적 격차와 첨예하게 뒤얽히고, 제의와 주술의 시간이 무덥고 번잡한 거리의 누런 먼지와 나른하게 뒤섞여 있는 소설의 장소는 여러 구체적 세부와 함께 특정한 나라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지만(어린 하녀 ‘라즈’가 쓰는 인도말도 있다), 그 땅은 ‘나’의 의식에서는 언제든 폭력적이고 부정적이며 벗어날 길이 잘 보이지 않는 세계 현실 자체로 다가온다. ‘나’의 유학은 한국에서 겪은 관계의 상처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암시되고, 소설에서 ‘나’의 인도 생활은 자발적 단절과 고립, 유폐의 선택처럼 그려진다. 말하자면 인도 한복판에서 절규처럼 터져 나온 ‘나’의 질문—“사람과 짐승, 내 사람과 남의 사람, 나와 타인의 경계선은 어디쯤 그어져 있을까”(182면)—은 한국 땅에서 이미 내연하고 있었으며 폭발의 계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타인과의 경계, 타인과의 거리를 가늠하는 일은 인간사의 보편적인 문제일 테지만, 타인의 얼굴에는 시대의 공기와 질료가 깊이 각인되어 있게 마련이다. 『부엌』의 ‘나’는 이 지점에서 좀더 예민한 인물로 짐작되는데, 한국에서 ‘나’가 겪은 곤경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역설적으로 음미해보게 된다. 세끼 밥을 해결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원초적인 생활공간, ‘부엌’이 소설의 중심 무대로 등장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살필 수 있을 것 같다. 인도에서 얻은 낡고 허름한 ‘나’만의 주거공간은 탈출이든 회피든 떠나온 한국의 현실을 선행서사로 해서만 성립하는 장소이며, 그런 한에서 탈역사적일 수도 탈정치적일 수도 없다. “요리를 하지 않기 위해 나는 떠났다. (…)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남이 만든 음식을 얻어먹고 싶지도 않다.”(9면) 관계맺기의 단호한 거부와 고립의 선택이 소설의 출발점이라면, 인도에서 ‘나’가 만난 ‘부엌’은 적절한 장소가 아니었다는 사실이 금방 드러난다. 아침부터 밤까지 다들 요리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도시, 식당의 부엌들이 온통 길 바깥으로 나와 있는 도시가 그곳이었고, ‘나’가 살게 된 궁색한 집에서 볕이 제일 잘 드는 곳도 부엌이었다. 그 부엌에 동양인 채식주의자 ‘다모’와 육식을 즐기는 아프리카인 ‘무라뜨’가 무시로 드나들고, 집 안 청소와 빨래를 맡아 하는 하녀 라즈 모녀(더 정확히는 딸인 15세 소녀 라즈)가 ‘나’의 작은 자유의 공간을 거꾸로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다모와 무라뜨, 그리고 라즈는 누구인가.

「부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이하 「부엌에서」) 「나는 음식이다」(이하 「음식」) 「땅 위의 영광」(이하 「땅」), 세편의 소설을 연작 형식으로 쌓아 올려 완성한 장편 『부엌』의 소설적 구조는 바로 이 세 사람의 출현과 엄밀히 대응된다. 「부엌에서」와 「음식」에서 채식과 육식의 극단적 대립 양상을 보이며 ‘나’의 부엌에 나타나는 다모와 무라뜨는 얼마간 세계의 폭력적 구조를 알레고리화하면서 타자성의 불편한 창끝을 ‘나’에게 향한다. 낯선 유학지에서 두 사람과의 최소한의 유대를 지속하는 것은 ‘나’에게 절실한 일인데(모호하긴 하지만 다모를 향해서는 좀더 깊은 이성애적 친밀성도 있는 것 같다), 세 사람이 ‘함께’ 부엌에 있을 수 없다는 딜레마는 종내 환상적 해결 구도로 치닫는다. “다모가 상처 입지 않기 위해서는 무라뜨가 굶주려야 한다”(68면)는 딜레마는 불안한 ‘나’의 의식에는 세상의 근원적 모순으로 변환되어 다가오고, ‘살아 있다’는 것의 죄의식을 환기한다. 먹고 먹히는 자연의 순환적 질서와 계급적·계층적 위계의 사회적 차원이 구분되어야 한다면, 여기에 ‘나’가 접근할 수 있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혹은 ‘나’의 의식은 거리의 사원에 걸려 있는, 채울 길 없는 허기로 자기 자신을 먹어버린다는 귀면상(鬼面像) ‘끼르띠무카’에 사로잡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끼르띠무카는 ‘영광의 얼굴’이라는 뜻인데, ‘굶주림의 화신’에 붙은 이 역설적 이름은 소설 내내 일종의 화두처럼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근본적인 만큼 종교적인 차원으로의 비약을 포함할 수밖에 없는 타자의 경계, 타자의 고통에 대한 질문이 채식과 육식, ‘먹는 일’을 둘러싼 다모와 무라뜨의 극단적 대립 속에 펼쳐지는 연작의 앞 두편이 특별한 소설적 강렬성을 띨 수밖에 없는 사정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세 사람이 부엌을 함께 쓰기 위해서는 일종의 희생제의가 연출되어야 했는바, ‘나’가 다모와 무라뜨를 요리해 먹고, ‘나’가 무라뜨의 음식으로 스스로를 내어놓는 환상의 결말은 불가피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다모와 무라뜨가 ‘나’의 타자적 실체이면서 동시에 ‘나’의 의식의 분화와 연장이 아니었는지 되묻게 된다.

「부엌에서」와 「음식」이 장편 『부엌』 전체에서 소설의 주제와 배경을 극적이면서 다소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서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땅」은 분량 면에서도 그렇지만 좀더 실답고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에 안착하면서 소설의 질문을 증폭하고 풍성화하는 데 이르고 있다. 소설은 ‘나’가 인도에 도착해 다모를 만나게 되고 이후 갑자기 사라진 다모를 찾고 수소문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주변적 삽화처럼 처리되어 있는 라즈와의 만남이야말로 ‘나’의 의식을 충격하고 뒤흔드는 진정한 타자의 출현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매일 집으로 와서 ‘나’의 빨래를 맡아 하기로 되어 있는 소녀 라즈에게는 약속이라는 개념이 없다. 며칠씩 나타나지 않기 일쑤고 일하러 와서도 틈만 나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뭉그적거린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야단을 쳐도 별무신통이다. ‘나’가 보기에 라즈는 게으름뱅이에 거짓말쟁이일 뿐이다. 라즈의 가족은 최하층민으로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이며 동생은 지적장애인, 오빠는 도박에 빠져 있다. 어머니와 라즈가 하녀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간다. 라즈만이 아니라 라즈의 어머니도, 쓰레기를 가져가는 청소부도 ‘나’의 자유를 훼방 놓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나’는 이들을 모두 해고하고 ‘해방’의 기쁨을 누린다. 사실은 ‘나’가 그들을 ‘모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저 애가 내 말을 못 알아듣듯이 나도 저 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저 애가 그런 더러운 팔자를 타고난 게 내 잘못은 아니다. 누구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나는 아니다.”(188면)

라즈의 이야기는 정확히 「부엌에서」와 「음식」에 제시되어 있는 ‘타자의 경계’ ‘타자의 고통’에 대한 질문과 마주 서며 앞의 이야기의 추상성, 관념성, 급진성에 대한 소설 내부의 쓰라린 자기반성이 되고 있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 ‘나’는 라즈가 계속 반복하던 인도말을 겨우 짐작하게 된다. 그것은 다모를 잡아먹었다고 알려진 다모의 여자 친구, 살찐 동양 여성에 대한 소문이었다. 그런데 소문 속 여자로부터 자라난 상상적 분신이 혹 「부엌에서」와 「음식」의 ‘나’(이 이야기들에서 ‘나’는 살이 찌고 있었다)는 아니었을까. ‘타자’에 대한 질문이 얼마간 ‘나’를 넘어서는 ‘무한성’의 영역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면(가령 ‘환대’와 ‘모심’의 문제), 라즈로부터 다시 다모와 무라뜨의 자리로 이동하는 근원적 전환 또한 수긍되어야 할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 ‘나’가 처음으로 그곳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의 빛과 풍경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라즈와 함께 다모와 무라뜨도 거기 있었기 때문이리라. “타오르는 석양빛에 거리를 가득 메운 행인들이 모두 황금빛 옷자락을 휘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주일에 한 번 장이 서는 날이다.”(205면)

‘타자’의 문제가 윤리적 차원에서 너무 자명한 당위로 이야기되고 있는 이즈음, 『부엌』의 정직하면서도 중층적인 소설적 질문 방식은 새삼 깊이 음미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작품은 신화와 환상의 장치로 표현된 우리 자신의 근원적 욕망의 세계를 포함한 채로도 타자와 경계에 대한 질문이 여전히 더 착잡한 인간적 실행의 한계와 세계의 모순 속에 있다는 점을 복합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윤리적으로 고양된 지금 우리 문학의 어떤 결여를 돌아보게 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