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독자의 목소리

 

 

무뎌지지 않는 힘

▶ 200호라니, 이 잡지의 긴 호흡과 성실한 역사를 실감하며 권두대담(이남주·한기욱 「원(願)은 크게, 길은 현실에서」)을 펼쳤다. 대화로 되어 있어서 따라가며 읽기 수월했고, 새로 실감한 것도 많다. 『창작과비평』은 무뎌지지 않고 내내 꾸준했다는 것, 한국의 정치사회는 특히 역동적이어서 현안들에 대한 큰 틀에서의 방향성을 제시해주는 계간지를 앞으로도 가이드 삼아야겠다는 것. 이렇게 과거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마련되고 보니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때에 비해 지금이 더 나아졌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아서 착잡한데, 너무 여러 문제가 동시에 터지니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도 어떤 계기만 마련된다면 박근혜정부 때 느꼈던 ‘이건 아닌데’ 하는 마음을 한데 모아 현재의 퇴행에 맞설 수 있지 않을까 긍정해본다.

담론 면에서 창비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돌이켜보면 정치사회 분야에서는 한동안 무슨 문제만 있으면 모두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결론지어버리는 논의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결론이 매번 같으면 식상하고 점점 더 흥미가 사라진다. 그와 달리 『창작과비평』은 국내정치가 암담하던 시절에도 곧 새로운 국면이 나타날 거라 예측하기도 하고, 그러한 움직임을 시민사회에 촉구하기도 했다. 예측이 맞아떨어졌다는 것도 ‘리스펙트’하는 지점이지만, 시대에 대한 냉소에 젖지 않았다는 점을 가장 높이 사고 싶다.

기후위기 문제든 언론지형이든 양극화든, 나 역시 때로는 냉소 쪽으로 한발짝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에너지 문제처럼 간단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더 그렇다. 그러나 폭염에도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라거나, 장애차별 철폐를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활동들을 지켜볼 때, 나의 그런 냉소 역시 사치 같아서 방만했던 마음을 다시 여미게 된다. 우리 사회에 가득 찬 혐오에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될 때는 200호까지 일궈온 『창작과비평』의 역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으며, 앞으로도 창비가 제안하는 담론들에 귀 기울여보겠다.

이승준 dove018@gmail.com

 

조금 더 또렷해지는 미래

▶ 유튜버 ‘굴러라 구르님’을 오래전부터 구독하고 있었는데 여름호 첫 글로 그의 인터뷰(이지영 「장애, 복지가 아닌 인권으로 생각하라」)가 등장해 무척 반가웠다. 무엇보다 장애인권 문제 역시 어떤 면에서는 『창작과비평』이 꾸준히 다뤄온 돌봄 이슈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곱씹게 된다. 기후위기 활동가인 김현지 인터뷰(양경언 「청년에게 기후행동은 ‘캠페인’이 아니다」)와 플랫폼 노동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박정훈의 인터뷰(김소라 「플랫폼 노동과 새로운 연대」) 역시 인상 깊었다. 특집 인터뷰를 통해 지금 가장 뜨겁게 논의되는 주제들을 키워드별로 톺아볼 수 있어 유용했고, 불투명해 보이기만 하던 미래가 인터뷰를 읽은 후 조금은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 창작란이 미래를 주제로 꾸려진 것도 반갑고 신선했다. 최진영 「인간의 쓸모」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는 누구나 상상할 법하지만 소설에 그려진 모습은 씁쓸하고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러한 미래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이기도 했다. 소설을 읽고 나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오래 남았다. 어떤 것은 존재하는 자체로 쓸모있는 것 아닐까, 인간의 쓸모는 결국 살아남는 것 아닐까. 장류진의 「동계올림픽」은 좀더 가까운 미래로 느껴진다. 답답하고 막막한 현실을 사는 주인공을 일으킨 것은 결국 다른 이의 환대라는 점이 희망적이다. 어디선가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힘껏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에게 친절하게 대하세요’라는 말을 읽은 적이 있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친절 같은 작은 가치를 잃지 않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다보면 이 노력들이 쓸모있는 미래가 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아득바득 살아남으며 주변을 다정하게 물들이고 싶다. 내 다짐을 확고하게 만들어준 소설들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홍진 lazyjini@naver.com

 

내 안의 편견을 깨뜨리며

▶ 『창작과비평』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하고 있던, 혹은 못 본 척하고 있던 세상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지난 여름호 특집 인터뷰 「장애, 복지가 아닌 인권으로 생각하라」는 특히 큰 자극이 되었다. “현재 ×호선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타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호선 열차 운행에 지연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열차 이용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매일같이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하는 나는 전장연의 시위를 처음 접한 날에는 출근을 위해 승강장에서 지하철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고,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안내방송을 듣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다 내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매번 안내방송으로 듣기만 했던 ‘지하철 타기 선전전’을 내 눈으로 목격한 이후이다. 휠체어를 탄 시위대는 정말 말 그대로 지하철에 ‘타고 내렸다’. 내가 항상 지하철을 타고 내리듯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장애인 이동투쟁이 얼마나 당연한 권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왜 바쁜 출퇴근 시간에 시위를 하느냐며 성을 내던 목소리들에 멀미가 나는 기분이었다. 개인의 일상적인 이동을 무슨 권리로 제한하려 하는 걸까. 김지우의 인터뷰를 읽으며 내가 장애 정책을 당연히 복지의 영역으로 생각해왔고, 무의식중에 그들을 약자로 생각해왔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장애인권’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어 다행이고, 장애인이 더 일상적으로 집 밖으로 나와 생활할 수 있는 세상이 되기까지 나 역시 ‘장애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은 곳에서, 더 자주 꺼낼 것 같다.

류은영 ee_0101@naver.com

 

대전환이라는 과제를 마주하기

▶ 200호 기념호의 논단을 얼마간 무거운 마음으로 들여다보았다. 대전환이라는 묵직한 과제를 맞닥뜨리며 이것이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어떻게 자본주의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을지 의문을 품을 때도 많았다. 현실정치에 실망할 때마다 더더욱 그런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논단의 글들이 대전환이라는 과제를 푸는 큰 힌트가 되었다. 특히 백년의 시차를 두는 두 사상가 맑스와 월러스틴을 비교한 유재건의 글이 인상적이었는데(「대전환과 자본주의」) 결론 부분에서 월러스틴의 말을 빌려 ‘1:19:80’이라는 구분으로 새로운 형태의 계급투쟁을 시사한 것에 공감이 가면서도 그 이후 어떤 논의가 이어질지 궁금해진다. 사회생태 전환을 설명하며 “압축소멸”의 징후를 읽는 조효제의 글은 지구시스템의 위기를 그대로 드러내어 읽는 내내 멈칫하게 만들었다(「사회생태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다만 위기감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무엇을 실천할 수 있는지, 기후위기 문제 앞에서 종종 느끼게 되는 무력감이 얼마나 의미있는 감정인지 설명해주어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우리 세대가 감수해야 하는 어려움은 무엇인지, 다음 세대는 어떤 지구에서 살아가게 될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자본주의 문제를 돌봄으로 극복한다는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지던 시절도 있었는데, 팬데믹을 겪고 난 지금 돌봄이 정말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실감한다. 백영경의 글(「전환의 지향으로서의 돌봄을 향한 투쟁」)은 그런 점을 시원하게 긁어주어 좋았고, 기본소득에서 한단계 더 나아간 돌봄소득에 대한 구체적 모델이 더 많이 논의되기를 기대한다. 리얼리즘이라는 렌즈로 이행의 단초를 발견하는 황정아의 글(「‘대안’서사와 ‘이행’서사」)에서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장소를 통해 그 안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이러한 담론이 현실의 목소리와 어떻게 상호작용하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다. 대전환이라는 과제 앞에 우리가 견지해야 할 태도를 힘있게 전하는 글들이 현실을 바라보는 렌즈가 되는 듯하다. 이후 이어질 논의들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