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문학평론 | 제30회 창비신인평론상 수상작

 

죽음보다 명백한 것, 비평보다 확실한 것

최진영이 쓴 비규범적 조의의 방식, 『구의 증명』

 

 

권영빈 權寧斌

1984년 부산 출생.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

outthem@naver.com

 

 

1.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알지 못한다

 

거대한 재난이 몰고 온 폐허를 묘사하는 방식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어느 시성(詩聖)은 이를 매우 담백하고도 사무치게 표현했다. “그처럼 많은 사람을 죽음이 망쳤다고 나는 생각도 못했다.”1 그 읊조림은 시인의 시선 속에 들어온 군중의 표정만큼 무심했지만 ‘죽음’을 주체의 자리에 올려둔 진단만큼은 적절했다. 희뿌연 안개 속 런던교를 지나는 ‘산’ 사람들로부터 죽음의 행위성을 읽는 것은 인류의 정치·경제적 삶과 모더니티에 대한 인식을 정향했던 전쟁에 대한 비평으로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백년이 흘렀고 여전히 죽음은 사람들을 망가뜨리지만 우리가 진단하고 비평할 대상으로서의 죽음이 눈앞에서 사라졌다는 것이 새롭다. 도심 한복판 번화가에서 단 몇시간 만에 벌어진 폭발적인 죽음으로부터 불과 반년이 지난 오늘, 우리는 그토록 엄청난 죽음과 불행이 정말로 있었는지 잘 실감하지 못한다. 좀처럼 믿기 힘든 사태에 대한 충격과 그로 인한 집단적 후유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죽음을 둘러싼 지배적인 정동은 죽은 자를 낙인하는 유표화와 애도하는 자를 따돌리는 사사화(私事化)의 메커니즘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그것은 오랜 시간 냉전체제를 살아온 한국(인)에 내면화된 것이기도 하다.

죽음이 공동체의 경계와 문턱을 설정하고 그것을 둘러싼 개인적·집단적 주체화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치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아감벤(G. Agamben)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비국민’이라는 주체를 탄생시키는 통치성이 죽음의 이름으로 신체화된 형상이라면, 쁘리모 레비(Primo Levi)의 글쓰기는 홀로코스트가 우리의 ‘인간’됨을 재고하게 하는 객관적 사실이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행위였다. 자주 거론되는 ‘죽음정치’(politics of death)라는 용어는 푸꼬(M. Foucault)의 ‘생명정치’와 달리 단일한 학술적·이론적 개념으로 일반화해 서술할 수는 없지만 죽음과 관련된 사회·정치적 의제를 분석·비평하는 데 활용되는 범용적인 시각으로 자리 잡았고, 이를 통해 죽음의 현상학, 죽음이 가진 정치적 의미를 논하는 것은 자본과 노동의 초국적 이동, 극단적인 양극화, 테러리즘, 예측 불가능한 재난, 난민, 자살과 같은 동시대의 문제들과 조우하면서 사회비평으로서의 역동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목도했듯이 죽음은 빠른 속도로 실재성을 여의고 있다. 전쟁과 학살로 인한 죽음의 가시성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고구하게 한 지난 세기의 담론적 노력을 명확히 뒷받침했지만, 오늘날의 죽음은 그러한 윤리적 노력이 무색하리만치 급격히 리얼리티를 잃고 있다. 오로지 죽음을 통해서만 삶을 증거하는 계층화된 죽음들이 매일같이 반복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런던교를 지나는 한없이 쓸쓸한 군중, 혹은 개체성을 잃고 부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죽음의 단편적인 은유조차 말하지 않는 시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망쳤는지 진단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알지 못한다.

죽음이 리얼리티를 잃어버린 세계는 충분히 절망적이지만 문학이 거기에 휩쓸려가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퍽 다행스럽다. 과거 국가 또는 사회공동체가 만든 주권권력과 법적 주체, 성원권의 문제를 환기하는 구성적 외부로서의 죽음은 문학의 응전 속에서 구체적인 상을 획득하곤 했다. 문학은 사회현실의 반영이나 고발의 층위로 죽음을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죽음에 대한 일종의 해석투쟁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존재함으로써 죽음을 완료되었거나 사라진 무언가로 박제·단순화하는 것을 지양한다. 적지 않은 작가들이 기념·기억·애도의 정치로서의 글쓰기로 한국사회가 역사적으로 거쳐온 죽음들을 발화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물론 문학을 통한 ‘기억전쟁’이 언제나 효과적인 것만은 아니다.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을 나누는 이데올로기만큼이나 자명한 것이 바로 문학과 현실을 가로지르는 재현논리이다. 문학이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갖는 모종의 당위성, 특히 ‘문학적인 것’의 기준을 가늠하고 향유하는 힘을 추적하다보면 종국에는 문학이 우리 현실의 시공간에 얼마만큼의 침투력과 지속성을 갖는가, 요컨대 ‘리얼리티’의 질적 수준과 그 가능성의 문제에 다다른다. 현실과 존재론적으로 유리되어 있다고 간주되는 문학에 그것이 지녔음직한 리얼리티를 타진하기 위한 미학적·창조적 행위로서의 비평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그런데 죽음이라는 현실이 사라진 세계 또는 죽음을 더이상 사실화하지 않는 세계에서 문학은 어떻게 죽음의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는가. 불야성의 대도시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참사는 주권자의 자리를 드러내는 예외상태와 다름없었지만 죽음을 가시화하려는 행위가 도리어 더 큰 예외상태를 불러오리라는 가상적 합의가 빠르게 출현하였고 죽음을 둘러싼 유표화와 사사화의 익숙한 반복이 이어졌다. 이렇게 본말이 전도된 곳에서는 일어난 사실로서의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그것을 공적 담론으로 확산하기 위한 일체의 시도나 의지에 대해 도리어 ‘현실’인식 결여라는 비판이 가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아이러니는 죽음의 리얼리티가 탈각된 세계에 대응하기 위한 문학과 비평행위로 하여금 이른바 ‘문학적인 것’이 지닌 규범적이고 상징적인 권위에 대한 인식에 의지하지 않고도 죽음을 실재하는 것으로 돌려놓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이를테면 최진영의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실천문학사 2013)는 죽음이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죽음에의 심취를 독자에게 강요하는 독특한 소설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선택권을 박탈당한 남자가 선택에의 강요에 잠식된 채 공동(空洞)과도 같은 것이 되어 살아간다.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기로에서 삶에 대한 소회를 강박적으로 전하고 이 때문에 소설도, 독자도 그야말로 진을 뺀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물음만은 증식하고 이는 이어지는 작가 또는 텍스트의 행보를 요긴하게 따라갈 수 있는 실마리를 남긴다.

『이제야 언니에게』(창비 2019) 또한 ‘죽음 곁의 삶’이라는 독특한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체성의 삭제를 의미하는 성폭력과 거기서 살아남은 여성이 맞닥뜨리는 세계를 여성혐오와 ‘피해자다움’, 증언과 돌봄 등의 핵심적인 키워드로 읽어내게 한다. 이 소설이 한발 더 나아간 지점은 가혹한 현실을 재현하는 꼼꼼한 서술보다 성폭력이 일어난 날로부터 수년이 흐른 시점에 이르기까지를 살아낸 존재가 어떻게 변용해나가는가를 보여주는 데 있다. 죽음이 몸 안으로 접혀 들어간 채 살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 곧 증거물인 존재가 불가항력적으로 직면하게 되는 생존 방식인데, 소설은 그러한 ‘생존자 주체성’을 자기 고유성을 확인하고 그로부터 이행해나가려는 의지로서의 ‘일대기 쓰기’로 표현한다.

이처럼 죽음을 이야기하거나 그것이 지닌 정치적 의미를 다채롭게 궁구하려는 소설은 많다. 그러나 죽음을 드러내거나 말하는 것이 거대한 곤궁이며 따라서 죽음에 새로운 가시성과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작가적 역량과 의지가 표출된 경우는 정선하기 쉽지 않다. 이는 단지 기념·기억·애도의 정치와도 무관하지 않은 규범적 문학성 때문만은 아니다. 죽음을 말하지 않는 현실에 죽음을 사실로서 침투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그것을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자명하게 할 수 있는가에 관한 새로운 형식의 문제이기도 하며, 이는 ‘죽음정치’로서의 문학의 향방을 가늠하게 하는 사례가 된다.

앞서 논한 최진영의 두 소설 사이에 『구의 증명』(은행나무 2015)이 있다. 죽음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는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와, 죽음의 이해나 공유가 불가능하다는 인식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용해나가려는 주체성을 보여주는 『이제야 언니에게』 사이에는 유의미한 결절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기 한 죽음이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증명할 수 없는 세계, 그리하여 누구도 그것을 알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죽음은 홀로 우주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압도적 가시성을 드러내기로 마음먹는다. 『구의 증명』은 실재하는 죽음보다 명백하게 죽음을 사실화하고, 리얼리티를 논하려는 비평보다 확실하게 죽음을 말하는 소설이다.

때로는 불가해한 형태로, 때로는 당위적으로, 또 때로는 필연적으로 죽음은 끊임없이 발생하지만 그것을 말하고 나누며 담론화하기 위한 의지와 실천이 잔뜩 움츠러들고 폐쇄된 시절을 우리는 살고 있다. 죽음의 부재라는 불행이 어떤 불행인지도 짐작하지 못한 채 삶의 표면에 고인 가상적 확실성만을 좇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배제한 삶에 리얼리티가 있을 리 없다. 여기 죽음을 증명하는 한 작가의 소설세계를 들여다보면 그토록 엄청난 죽음이 우리 곁에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믿을 수 있게 된다.

 

 

2. 죽음이 죽음을 증명하는 방법

 

『구의 증명』은 ‘담’이라는 인물이 죽은 ‘구’라는 인물을 장사 지내는 과정을 이야기의 골자로 삼는다. 담이 죽은 구를 발견하고 집에 데려와 장례를 진행하면서 두 인물의 짧은 삶이 각자의 시점에서 담담히 서술된다. 이른 학령기에 만나 친구가 된 담과 구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서로를 성적 존재로 인식하고 이후 성인이 되어서까지 단 한순간도 서로가 없는 삶을 상상하지 못한다. 구의 죽음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해도 이들의 사연은 기본적으로 애틋하고 깊은 사랑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구의 증명』 전체를 지배하는 것은 애절한 첫사랑의 환희와 비애가 아니라 죽음을 죽음인 채로 무력화하지 않고 그것을 영원히 사실화하고자 하는 의지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2

 

담이 진행하는 장례가 죽은 구의 몸을 남김없이 먹는 것이라는 점을 처음 밝히는 대목이다. 도입부의 이 장면에서뿐만 아니라 죽은 구를 데려와 씻기고 소독하고 닦아준 뒤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 손과 팔과 성기를 차례로 뜯어 먹는 담의 모습이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데, 이처럼 구를 먹어 치우는 담의 장례의식은 결말에 이르기까지 도통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소설을 매력적이고도 복잡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구의 증명』은 출간된 지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문학출판 시장에서 잘 잊히지 않는 소설이다. 특히 최근 십대와 이십대 여성 독자 사이에서는 담과 구를 둘러싼 팬덤현상도 관찰되며 그들에게 소설가 최진영의 이름을 알린 것도 다름 아닌 『구의 증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젊은 여성 독자의 지속적인 관심을 끄는 요인에는 처절한 불행 속에서 더 강해지는 집착적인 친밀성과 로맨스, 순수한 끈적거림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대중적 욕동이 있을 것이다. 그 사이에는 남성을 먹어 치우는 행위를 감행하는, 그로테스크한 환상으로서의 여성에 대한 것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구의 증명』에서 구를 먹는 담의 행위는 단순한 ‘환상’으로 처리되지 않는다. 담은 구의 배 속에 귀를 대 생리활동이 있는지를 확인하거나 종종 구를 먹는 것이 괴로워 후회하기도 하고 구를 모두 먹은 후 세상이 어떻게 자신을 비난할 것인가를 예측하기도 한다. 담의 구체적 괴로움 사이로 드러나는 담과 구의 과거는 최악의 현재에 비추어 추상적이다. 이는 과거에 대한 서술이 비순차적이고 비교적 사변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구와 담이 살아서 함께 또는 서로를 생각하며 각기 보낸 고난의 시절보다, 담이 구를 먹어서 그의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끔찍한 현재가 오히려 삶을 가상화해버림으로써 강력한 리얼리티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형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소설 속 독특한 장례의식에 대한 해석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구는 빚더미에 앉은 부모 때문에 청소년기부터 하층노동자의 그것으로 자기 삶을 인식하곤 했다. 자기의 것이 아닌 물건을 팔고 자기의 것이 아닐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구는 시간이 가는 것을 초조해한다. “그렇게 늙어버리는 거 순간일 것”(71면) 같다는 항상적인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참으며 말하거나 참으며 듣거나. 참게 되거나 참게 하”(94면)는 방식으로 내몰리는 나날을 보낸다. 주변의 어른들은 모두 그에게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 수는 없지 않겠느냐고 조언하지만 그렇게 주의를 주는 담임교사마저도 그를 보살펴야 할 ‘학생’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담 또한 정상가족 형태나 규범에서 이탈해 있는 인물이다. 다만 그 곁의 유일한 어른이자 양육자의 의무를 다했던 이모 덕에 마냥 불우한 십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담을 둘러싼 환경은 구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돌봄 공백을 채울 가능성을 보여주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구에게 닥친 가혹한 삶을 상쇄할 만큼의 행운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담은 구의 죽음에 부쳐, 구가 홀로 또는 담과 함께 살았던 세계는 마치 전쟁이나 질병처럼 주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애초에 텅 비어 있는 생의 안으로 돌진해 들어와 삶을 특정한 방식으로 구조화하는 외부적 힘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마치 구 자신의 것이 아닌 빚이 구의 삶 전체를 견인했던 것과 같다. 그는 대리기사, 주차요원 같은 특수직 또는 저임금노동을 전전하다 호스트바 선수를 거쳐 마침내 선상노예로 팔리기 직전 담과 함께 도주하지만 ‘빚’으로서의 삶은 그들을 추적한 끝에 결국 구를 죽인다.

구의 삶은 현대판 하층계급이 일상적으로 겪는 신자유주의의 비정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주체의 선택이나 의지가 아닌 오직 교환가치나 폭력이라는, 개인이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논리로만 앞으로 나아간다. 줄곧 구의 삶을 지배했던 이 논리에 의하면 죽은 구의 몸은 사채업자에게 넘겨져 “누군가의 시체로 위장되어 보험금 사기에”(152면) 쓰이거나 구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어느 공무원의 무심한 손에 의해 불태워질 터였다.

‘구의 죽음’이라는 사태에 담이 그를 먹기로 대응한 것은 우선 그의 몸을 무뢰배에게 강탈당하거나 그가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의미하게 잊히지 않게 하기 위한 저항으로 읽힌다. 즉 구의 삶을 지배했던 빚의 논리와 절망에 맞서, 죽은 자를 자신의 살(flesh)로 삼아 보존하여 ‘구’라는 존재가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구, 그리고 구와 함께 죽을 담을 데려가 불태울 어느 공무원이 “구와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구가 나에게, 나에게 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 몸에 새겨진 기억과 추억 같은 것”(17면)을 결코 상상할 수 없으리라는 담의 판단하에 내려지는 돌봄자의 윤리적 선택이다. 그러나 괴롭도록 구를 먹어 치우는 담의 끝나지 않는 장례의식을 지켜보자면, 죽은 구를 자기화해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거나 그 존재를 기억하기 위한 것만으로는 그러한 행위의 의미가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담이 했던 것은 또는 『구의 증명』이 보여준 것은 정말로 ‘구’라는 개별자에 관한 기억의 정치이기만 할까?

홀로코스트 생존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아메리(Jean Améry)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후의 특권으로 죽음을 지목했다. 그 자신이 실행하기도 한 이른바 ‘자유죽음’은, 신이 내린 삶이라는 은총을 모독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행위로서의 자살이 아니라 규범적 죽음에 굴복하지 않는 창조적 행위이다. 그의 죽음론은 주어진 삶의 고통에 저항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삶의 논리가 아닌 죽음의 논리로 인간과 그가 속한 사회를 통찰하기 위해 그는 ‘삶’이라는 연속성을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으로 재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자유와 해방은, 우리가 즐겨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삶의 형태를 ‘부정’할 때 이루어”3지기 때문이다.

죽은 구를 먹는 담의 행위가 부정하려 했던 것은 기왕의 삶의 작동방식이다.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는 ‘빚’의 논리로 움직이는 삶에 일방적으로 쫓겨 죽음에 이른 구를, 담은 이어서 살아주거나 영원히 기억하는 대신 ‘죽음’이라는 새로운 법칙으로 구의 ‘삶’을 재구조화하려 한다. 이는 담의 식인이 죽음을 반복수행하는 성격을 지닌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도입부부터 결말부까지 결코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소설적 형식에 의해 실효성을 얻는다. 구의 죽음만이 유일한 현실논리로 작동하는 곳에서 구의 지난 삶은 죽음보다 혹독하게 죽음을 되풀이하는 담의 행위에 쫓겨 가상적인 것이 되고 구는 담에 의해 죽음 자체로 끊임없이 ‘현재화’된다. 본 적 없는 빚에 지배받던 삶이라는 가상성을 지금-여기의 죽음이라는 실재성으로 반증하는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구’로 대변되는 박탈당한 삶과 무용적 죽음에 관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무수한 삶이 대체 가능한 것으로 절하되거나 죽음만으로는 아무것도 주장할 수 없는 현실사회의 알레고리 속에서 『구의 증명』은 비규범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애도의 방식을 주장한다. 여기 한 삶-죽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증명할 수 없고 누구도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불타협인 것이다.

나아가 담이 구를 먹는 행위는 그를 홀로 기억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죽음을 끝없이 현재화하여 구 스스로 죽음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구의 증명’이다. 이는 ‘구’라는 개별자의 존재 증명이나 기억의 정치를 넘어 죽음의 리얼리티가 사라진 오늘의 현실을 단속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 죽음의 ‘현재화’는 죽음만이 실재하는 것으로 만들어 죽음이라는 ‘사실’보다 명백하게 죽음을 가시화하는 한편 우리가 마땅히 수행해야 할 애도의 과정을 보여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요컨대 『구의 증명』에서 환상을 논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담의 식인행위가 아니라 영원한 현재형의 죽음을 영원히 애도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3. 조의(弔意)라는 환상과 비평의 (불)확실성

 

『구의 증명』은 식인이라는 구체적 질감과 고통을 동반하는 담의 장례의식에 영원의 속성을 부여한다. 죽은 구를 먹어 계속해서 그를 죽게 하는 담의 행위가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아주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인간이란 생명체가 우주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그날까지.

인류 최후의 1인이 되고 싶다는 말이다.

이것이 내 유일한 소원이다.(8면)

 

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천 년토록 살아남아 그 시간만큼 너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천만년 만만년도 죽지 않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186면)

 

소설은 죽은 구를 먹는 담의 소원에서 시작해 담에게 먹히고 있는 죽은 구의 당부로 끝난다. 그 과정을 채우는 것은 담과 구의 절망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그것의 결과이자 효과로서의 장례는 결국 끝나지 않는 현재로 남는다. 구를 먹는 괴로움과 슬픔이 감각적으로,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 것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구’를 증명하려 했던 행위의 의미와 내용을 완료 불가능한 상태로 상정하려는 의식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그 고요와 암흑에 담겨서”나 “지금이 천만년 만만년 뒤라면, 그럼 나는 구의 몸을 업고 지구를 떠날 수 있을 텐데”(134면)와 같이 담이 구를 먹으면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우주적 상상과도 관련해 『구의 증명』은 일종의 환상적 요소로 소설을 걸어 잠그고 있는 것이다.

환상은 때로 현실을 재현하는 것에 대한 문학의 곤경을 드러내거나 문학이 현실과의 대결을 회피하고 ‘리얼리티’를 포기해버렸다고 말하기 위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이 환상이라는 형식논리를 장착하는 순간 그것은 어떤 강요나 선험적 원칙 없이 독자와 자유분방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게 된다. 환상은 인공성과 가상성을 드러냄으로써 ‘문학적인 것’을 자율적으로 규명하며, 현실세계에 작동하는 오류를 맥락화해서 보여주는 것에 또한 특화되어 있다. 따라서 소설에서 발견되는 환상의 요소는 결국 현실을 더욱 현실화하는 지점을 갖고 있는가를 중심으로 논의될 수 있다.

구를 먹는 담의 현재, 담에게 먹히는 구의 현재를 영원히 붙잡아두려는 『구의 증명』은 우선 그들이 행하는 비규범적 애도의 방식을 의미화하는 한편 절망적인 삶의 논리를 지금-여기라는 ‘현재’로서의 죽음의 논리로 압도하여 죽음의 가시성과 실재성을 명백히 한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애도하는 자’라는 배타적이고 도달 불가능한 주체성이 나타난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가 경험하는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이므로 1인칭일 수 없다. 특히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객관적 인식 대상으로서의 죽음은 3인칭의 속성을 띠며, 이때 죽음은 지식이나 정보의 형태로 “공동의 관념, 공동의 환상”이 된다.4 죽음이 일종의 담론이 된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미 죽은 자들이 아닌 산 자들의 삶에 작용한다는 점은 죽음이 강한 행위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죽음을 새로이 담론화할 수 있는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주체성의 사례가 귀중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죽음과 상실이 집단적·개인적 주체 구성과 공동체의 규범을 만드는 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구의 증명』이 내세우는 애도 주체는 죽음이 사라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문제적 존재로 부상한다.

죽음을 영원히 죽음이게 하는 장례의식을 통해 드러나는 ‘애도하는 자’로서의 담의 주체성은 구와의 친밀함으로부터 곧바로 연유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구와 담이 함께 공유했던 죽음에 대한 상상과 행위성으로부터 온다.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165면)

 

죽은 상대를 먹어 치우는 장례의식은 구가 먼저 정한 것이었고 담은 그것을 충실히 집행한다. 구의 죽음을 존재 부재의 형태로 내버려두지 않으려는 것은 구의 선언을 한 몸에서 나온 것과 같이 이행하려는 담의 의지이자 그의 죽음을 1인칭의 것으로 감각하려는 실천이었다. 그런데 ‘애도하는 자’라는 주체성의 핵심은 신체적 동일시로 표상되는 타자와의 연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애도의 끝나지 않는 속성, 종결 불가능성이야말로 애도하는 자를 애도하게 하는 동력이다.

예컨대 『구의 증명』에는 구의 죽음뿐만 아니라 담과 구의 삶을 이끌었던 또다른 죽음들이 등장한다. 바로 ‘노마’와 담 ‘이모’의 죽음이다. 노마는 구가 다녔던 공장 노동자 부부의 아이로 구와 담은 노마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상상하고 충족감을 느낀다. 그런 노마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왜 노마였는가’라는 해결할 수 없는 물음만을 남긴 채 담과 구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비구니인 이모는 담과 만나기 전까지 담에게는 존재 여부조차 인식되지 못했던 이였지만, 담과 구가 서로를 규정하는 방식을 일찍부터 알고 그들을 모두 돌봐준 헌신적인 존재였다. 구는 담과 멀어진 사이 이모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노마에 대한 것과는 또다른 죄책감을 갖게 된다.

소설은 담과 구가 노마와 이모의 죽음에 대해 대화하고 그것을 공유하는 장면만큼 그들의 죽음이 시작도 끝도 없는 곳에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영속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에도 적지 않은 공력을 들인다. 담은 이모를 마음으로 떠나보내면서도 “하지만 진짜로 가지는 마”(148면)라고 부탁하고 구의 몸을 먹는 와중에도 “노마는 왜 죽었을까. 이모는. 구는 왜 죽었나”(174면) 되뇌며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는다. 죽은 구 역시 “아무리 둘러봐도 노마도 이모도 보이지 않”(184면)는다며 죽음 이후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보장 따윈 없다고 말한다. 담과 구의 행복이자 불행이었던 노마와 이모는 그들의 중단 없는 애도를 통해 현재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구의 증명』에서 죽음을 영원한 현재로 묶어두는 환상의 요소는 도달 불가능하지만 영원히 멈추지 말아야 할 애도의 방식과 ‘애도하는 주체’라는 존재 양태를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그것은 죽음이라는 현실이 사라졌거나 죽음을 사실화하지 않는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는 애도나 조의의 가상성을 지적하는 동시에, 죽음을 영원히 현재화하는 ‘환상적 조의’가 지닌 오리지널리티를 역설하는 아이러니한 방식이다. 『구의 증명』은 ‘구’라는 개별자 또는 대변자의 삶을 증언하거나 기억하려는 차원에서 나아가 죽음을 영원한 현재로 가시화하고 죽음이 스스로 온전한 죽음이게 만들 수 있는 애도자의 윤리를 제시한다. 그것이 비규범적이고 배타적이며 때로는 반공동체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하더라도 죽음의 리얼리티가 사라진 세계에 던지는 유의미한 파열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문학은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것의 변화와 갱신을 촉구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문학·비평·향유의 공동체가 주고받는 이야기들이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현실의 작동원리를 보완하거나 이 세계를 한결 우호적으로 만드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는 문학이 존재론적으로 가치지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른바 ‘구조화하는 구조’의 성격을 지닌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소비자본주의와 개체화된 욕망과 허구보다 더 냉혹한 현실과 그로부터 모든 종류의 문학적 ‘리얼리티’가 의심받는 속에서 비평은 문학으로부터 도출되는 다종한 의미를 ‘현재화하는 구조’로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비평 그 자체보다 명백하고 확실한 텍스트 앞에서 상호창발하는 (불)확실성을 통해 더 큰 리얼리티를 획득할 것이다.

『구의 증명』은 죽음보다 더 명백히 죽음을 말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정합성의 세계라고 여겨지는 현실사회에 비합리성으로서의 죽음을 던진다. 또한 『구의 증명』은 비평보다 확실하게 죽음을 담론화하는 소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죽음이 죽음인 채로, 계속해서 확실한 것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죽음을 현재화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알지 못하지만 죽음이 스스로를 증명하게 한 소설을 통해 삶의 리얼리티를 진단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망치거나 망치지 않았는지에 대한 물음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을 가상적인 것으로부터 되돌리려는 의지이기도 할 것이다.

 

 

  1. T.S.엘리엇 「황무지」, 『황무지』, 황동규 옮김, 민음사 2017, 51면.
  2. 최진영 『구의 증명』, 개정판 은행나무 2023, 20면. 이하 본문 내 인용은 괄호 안 면수만 표기.
  3. 장 아메리 『자유죽음』, 김희상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2, 221면.
  4. 죽음의 특성을 인칭의 관점에서 바라본 장껠레비찌(V. Jankélévitch)의 시각을 빌려 3인칭 죽음과 1인칭 죽음의 관계를 고찰한 다음 논의를 참고했다. 세리자와 슌스케 「왜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시마조노 스스무·다케우치 세이치 엮음 『사생학이란 무엇인가』, 정효운 옮김, 한울 2010, 193~95면.

권영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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