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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분할선 너머에서 작동하는 문학의 정치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 주요 평론으로 「공동세계를 향한 시의 모험」 「살아 있는 역사와 좋은 시의 언어: 신동엽론」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 등이 있음.

renton13@daum.net

 

 

 

김건형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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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과 연구에서 보편적이고 중립적인 주체성에 대한 질문은 사실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식민지를 경험했고 현재까지 분단 중인 한국에서 문학작품들은 ‘나’를 말할 때 그것의 성패를 떠나 ‘나’를 포섭하는 집단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늘 동반해왔다. 더군다나 1987년 이후 개인과 정체성 정치에 대한 담론들이 부상하는 과정은 주체를 형성하는 위계적인 분할선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증폭시켰으며, 가깝게는 촛불혁명과 연동한 ‘페미니즘 리부트’가 저 관심들을 다시 여러 문학현장의 쟁점으로 부상시켰다. 김건형의 첫 평론집 『우리는 사랑을 발명한다』 역시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건형은 한국에서 ‘우리’는 자주 “지식인 이성애자 비장애인 성인 남성”(‘책머리에’, 6면)이라고 지적하면서 문학의 언어들도 이 진단에서 크게 비껴 있지 못하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퀴어서사가 새로운 분기를 맞이했다며 일종의 선언처럼 쓰인 「2018, 퀴어 전사-前史·戰史·戰士」는 평론집의 초석을 마련하는 글인데, 1990년대부터 2018년까지 한국문학사에서 퀴어가 재현되며 작동시킨 논리와 변화들을 추적한다. 퀴어를 오해했거나, 낭만화 내지 비극화했거나, 이성애적 가족제도로의 편입을 통해 순치시킨 흔적들이 바로 그것으로, 그에 따르면 이는 모두 퀴어적이기보다 이성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퀴어성을 탈취한 흔적들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젠더 규범이나 성정체성이 비어 있는 퀴어 재현들은 보편자의 세계 재인(再認)을 위해 봉사하는 자기 연민의 감상적 원리”(19면)이거나, “성숙한 남성의 서사 양식에서, 미성숙한 동성애”가 “입사 의례 이전의 순정함을 간직할 내면 공간”(22면)으로 다뤄지는 것, 또한 담론적으로 퀴어의 완벽한 적인 기독교와 가족의 연합에 대항하는 비극적 역할을 맡는 것으로 재현되거나, 생존과 관련한 난국 속 퀴어가 기성의 가족제도로 편입되는 양상들을 문제로 지적한다. 이런 점에서 김건형의 비평이 목표로 삼는 것 중 하나는 퀴어를 이성애적 문학과 비평의 시선에서 ‘구제하기’이며, 동시에 “기성의 문학/미감의 도구들(과 실은 그것을 독점한 지적 권력)을 영구 보존하려는 정치적 운동”(55면)에 저항하는 정치이기도 하다. 이 책의 1부 ‘페미니즘 독자와 퀴어 비평이 지금’에 실린 글들이 전자로 회집된다면 2부 ‘퀴어 서사의 미학과 테크놀로지’는 후자에 속할 것이다.

우선 황정아가 지적했듯이, 차이에 대한 강조가 재현의 윤리에 대한 과도한 민감성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물을 필요가 있다(「‘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문학사의 작품들을 다시 읽는 비평가나 연구자들이 자주 보이는 교정의 논리는 디테일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시선을 작동시키면서도 전체적 의미에 대한 독해에는 비교적 덜 신경 쓰는 것은 아닌가. 가령 퀴어를 오해한 작품들이 퀴어를 그려 보이겠다는 모종의 의지만으로 쓰였다면 문제이겠지만, 그 작품들이 당시의 환경에서 나름의 타자성과 공동체성을 구현하려는 실험이었다면 당연히 그를 고려해야 한다. 작품을 역사화하여 읽는 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문학작품에서 퀴어성이 도구화되거나 극적으로 소비되지 않게 재현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퀴어뿐 아니라 섹슈얼리티 전반이 어떻게 억압당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과정과 더불어 이 억압을 끊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고 구축하는 일이 요구된다. “퀴어 영화와 광장의 정치를 경유하는 방식이 아닌 퀴어 서사 자체를 정면으로 다루는 독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15면)는 문제의식이 아쉬운 건 그 때문이다. 광장의 정치와 퀴어서사를 애써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 보다 생생한 퀴어의 재현을 위해서라면 사실은 더 많은 광장의 정치가 필요할 것이다. 퀴어를 부정하고 공격하는 언어들과 맞부딪히는 과정 또한 또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가령 김건형이 ‘담론 퀴어’라고 명명하며 그 비극성과 현실감 사이의 거리를 비판했던 황정은의 단편소설 「뼈도둑」은 퀴어를 둘러싼 문제적 언어들에 개입하는 데 자신만의 전략을 발휘한 것으로 볼만하다.

퀴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사회 전반의 문제를 퀴어의 특별한 문제로 가져오는 듯한 모습도 발견된다. 김혜진의 『딸의 대하여』(민음사 2017)를 분석하면서 사용한 ‘생존-퀴어’라는 개념을 보자. 김건형은 퀴어가 생존의 문제를 결국 기존의 가족제도에 기대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서사가 증상적이라고 진단하며, 퀴어를 이성애적 가족제도로 순치시킨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퀴어의 생애에 사랑과 함께 생활이 있다면, 이 서사는 퀴어를 이성애적 가족제도로 순치시킨다기보다 생존과 관련한 경제적 문제가 모든 이들에게 그만큼 압도적이라는 뜻이고 이 문제에서 어떤 정체성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김건형은 소설 속 어머니의 생존을 위해 기존의 가족 기능을 기준 삼아 딸의 퀴어적 정체성을 감싸게 되었다고 분석하지만, 노령에다가 자녀와 분리된 삶을 사는 1인가구 여성에게 경제적 문제가 삶에 가하는 압력은 누구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달리 포착된다. 김건형이 말하는 해석의 도구적 측면에서 보자면 이 소설은 ‘생존-퀴어’보다 ‘돌봄’이라는 개념 도구를 통해 들여다볼 때 시사하는 바가 더 많을 것이다. 가족공동체에 돌봄의 기능이 과도하게 의존하는 한국사회의 상황과 상호 돌봄의 경험 속에서 생물학적이고 성차별적인 기존의 가족제도를 초월해 새롭게 구축되는 커뮤니티의 모습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한국어를 쓰는 순간이면 단 한 번도 지역, 계급, 학력, 신체, 문화, 젠더, 섹슈얼리티, 연령, 장애성 등의 위계와 이질감을 감안하지 않은 적이 없”(55~56면)다는 김건형의 진술은 그가 문학어를 포함해 언어들에 작용하고 있는 위계와 권력에 얼마나 예민한지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감각은 두말할 필요 없이 소중하다. 우리 사회 곳곳의 불평등을 가시화하고 사고하는 장으로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고 정체성 정치의 한계를 넘어서는 교차성을 사유하게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감각의 실행이 실질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실제로 그의 글에서 지역, 학력, 연령 그리고 문화나 장애성의 문제 등을 다루는 비중은 적다. 분할이 곧 교차로, 교차가 곧 종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체와 관련하여 분할 가능한 지점들을 살펴보는 것은 그에 작용하는 여러 외부적이고 제도적인 환경을 살펴볼 수 있는 정밀한 관점들을 제공하고 교차성에 대해 사유할 조건을 만들지만, 분할된 것의 총합이 곧 전체는 아니며 주체의 행위와 생애는 분할된 것들 사이의 조합과 그를 초과하는 결합 효과들로 인해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의미있는 전체’를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하다. 젠더 감수성이 충분히 수용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정치적 주체로서의 ‘민중’이나 ‘시민’의 개념이 하던 일이 그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 ‘의미있는 전체’를 그려 보이는 장면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비평이 좋은 작품을 만날 때 비평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를 한다. 김건형의 비평이 김현의 시를 만나는 자리가 그러하다. 김현의 작품들을 분석하는 글에서(「역사의 천사는 똥구멍 사원에서 온다」) 김건형은 김현 시의 시적 화자가 역사를 ‘시간적 인과’가 아니라 ‘관계의 흐름’에 따라 쓰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때 관계의 흐름은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며 각자의 사연을 겹치는 양상을 말하는데, 김건형은 김현의 소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도 있나」를 “인물과 사건에 집중하지 않고 사람들의 생애사가 서로 연결되면서 역사가 발생”(497면)하는 장면으로 읽는다. 정체성(인물)과 광장의 정치(사건)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사건을 통해 같은 자리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서로의 생애를 교류하고 그를 통해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고도 타인의 생을 염려하고 연대하는 이 감각의 발견은 김건형의 비평에도 점진적 변화에 대한 감수성을 자극했을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러한 독해 이후 김건형의 시선은 “모든 사태를 단박에 해결할 수 있는 신의 섭리 혹은 진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드러”(498면)낸 김현의 시선에 가닿는다. 퀴어를 지역과 연동하여 기술함으로써 한국의 역사를 ‘퀴어링’하는 모습 역시 이 글의 뛰어난 성취 중 하나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퀴어적 정동’과 같이 퀴어를 둘러싼 독특성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그리 명쾌하지 않다. 동시에 “우리 사회의 가장 새로운 주체라고 할 법한 퀴어조차”(40면)와 같은 표현이나 “퀴어 되기는 자신의 신체와 욕망을 응시하고, 규범과 다른 자신을 되물으면서 촉발되는 사태이며, 주변의 물질적 관계와 자신을 조율해가는 지속적인 수행 과정에 가깝다”(169면)는 문장들은 비-퀴어의 주체성을 소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퀴어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자신의 신체와 욕망에서 타자성을 느끼고, 규범과 갈등하며, 주변의 물질적 관계들과 자신을 조율하지 않던가. 어쩌면 우리는 퀴어를 ‘올바르게 재현’하는 데만 몰두하는 것은 아닐까. 당연히 문제는 퀴어를 분할하는 선 너머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