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경위

 

 


2023년 6월 신동엽창작기금 운영위원회에서는 김유담 정우영 정홍수 한기욱을 제41회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으로 위촉했다. 신동엽문학상은 등단 10년 이하 또는 그에 준하는 경력을 가진 이의 최근 2년간(2023년 5월 31일까지)의 한국어로 된 문학적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시·소설·평론 각 부문에서 선정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시와 소설은 단행본, 평론은 발표 원고 기준). 추천위원(창비의 시·소설 기획위와 『창작과비평』 상임위)들과 심사위원이 선정한 총 10편이 최종 심사대상이 되었다.

고명재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박한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 신이인 『검은 머리 짐승 사전』, 이동우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이상 시), 김멜라 『제 꿈 꾸세요』, 백온유 『경우 없는 세계』, 이주혜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이상 소설), 이지은 「역사적 존재의 탈역사화, 그 ‘불공정’함에 대하여」, 전기화 「(비)인간의 자리로부터」, 최진석 「역사 이후, 새로운 사회계약의 탄생」(이상 평론).

심사위원들은 7월 19일 모임에서 장시간 토론을 펼친 끝에 역사적 사건부터 문명적 차원의 고민까지 두루 다루며 상처받기 쉬운 존재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집중조명한 이동우 시집(창비 2023), 엄정한 사유와 섬세히 벼린 언어로 우리 사회의 여성현실을 예리하게 탐색한 이주혜 소설집(창비 2022)을 제41회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하는 데 흔쾌히 합의했다.

 

 

 

심사평

 

 

김유담 소설가

시 부문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된 작품은 신이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과 이동우의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다. 신이인의 시는 ‘존재의 기본값’을 인간으로 상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지우고 다채롭게 질주한다. 질서정연하지 않게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시의 이미지가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난동과 비약, 위악이 난무하는 ‘신이인 월드’의 기저에 깔린 것은 혐오나 환멸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애정이라는 점을 확인하면서, 그 다정한 시선에 크게 매료됐음을 고백한다. 수상작으로 결정된 이동우의 시집은 묵직하고 진중한 시적 화자의 태도가 독자를 신뢰하게끔 한다. 비명과 신음에 허덕이는 세계의 고통을 온몸으로 맞닥뜨리려는 진정성과 스스로 체득한 언어를 고르고 다듬으며 미학적으로 고심한 흔적 또한 견실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시인이 가고자 하는 길을 첫 시집을 통해 확고하게 보여줬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길을 지지하는 게 마땅하겠다는 데 동의했다.

소설 부문에서는 백온유의 『경우 없는 세계』와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두고 오래 고민했다. 『경우 없는 세계』는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유려한 솜씨를 십분 발휘해 가출청소년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시선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인물에 다가가는 태도는 조심스러운 가운데 서사의 전개는 거침없이 이뤄진다. 인물을 대상화하지 않으면서 거리의 청소년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게 만드는 힘에 감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서 오래도록 여운이 남았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에서 다루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통증을 껴안고 살아가(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응축된 고통과 발설할 수 없는 비밀을 품은 채 쉽게 연대하지도, 세차게 불화하지도 못하는 소설 속 여성들이 애잔하면서도 어쩐지 굳세게 느껴져서 신비로운 독서경험이라고 생각했다. 두 소설 모두 수상작으로서 손색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이주혜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은 치밀한 구성과 기품있는 문체의 힘을 보여준 그의 소설이 더 ‘문학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평론 부문에서는 아쉽게도 수상작을 내지 못했다. 본심에서 논의된 세편 모두 나름의 비평적 시선과 현시대에 필요한 담론을 성실하게 보여줬지만, 신동엽문학상의 취지에 걸맞은 단 한편의 수상작을 선정하기는 어렵겠다는 논의에 도달했다. 한편의 글을 수상작으로 결정해야 하는 부담감에 어쩌면 평론 부문에 더 높은 잣대를 들이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지금까지도 들지만, 면구함을 무릅쓰고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수상작으로 결정된 이동우 시집, 이주혜 소설집을 살펴보면 작품 한편 한편도 빼어나지만 그것을 한권의 책으로 모아 봤을 때 더 울림이 크다는 공통점이 있다.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 신예 작가의 단행본에 수여하는 신동엽문학상의 취지에 적합한, 격려받아 마땅한 두분의 수상자들을 호명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한다. 내게는 질투와 경탄을 거듭했던 뜻깊은 공부의 기회이기도 했다.

 

정우영 시인

‘지금 여기’에서의 신동엽 정신을 생각하면서 대상작품들을 펼쳤다. 자기만의 색채를 짙게 드리운 작품들이라서 내 눈도 덩달아 긴장했음을 밝힌다.

시 부문에는 4종의 시집이 최종심에 올랐다. 고명재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은 화려하다. 고명재는 ‘아름다움이 다름의 순연한 몸짓임을 발견한 자’이다. 수육에서 “색을 다 뺀 무지개”를 발견하는 것처럼(「수육」) 그는 익숙한 관념과 물상을 그만의 언어로 해석하고자 애쓴다. 평범한 일상마저 기어이 다른 시선으로 어루만지고는 하는데, 당연히 그의 감각은 새롭고 낯설게 열린다. 문제는 그러다보니 현실은 비루한데도 그의 시가 지나치게 화사해진다는 것이다. 시집을 읽어나갈수록 그 간극의 허방이 깊어져서 나중에는 오히려 상당히 무뎌졌다.

박한의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은 순정하다. 시 「뒤집힌 꽃잎」에 나오는 구절, “어머니, 울지 말아요 / 난 이제 그만 어두워질게요”만으로도 나는 박한을 신뢰하게 된다. 그의 감성은 대체로 직접적으로 흘러나와서 쑥스럽기도 한데, 이 거침없음이 나는 맘에 든다. 「순한 골목」을 보라. 골목이 얼마나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다. 그의 시들이 그렇다. 지붕들이 기르는 골목이 다채로운 삶의 무늬를 펼치듯 다사롭게 사람들 속으로 뻗어나간다. 간혹 시의 맥이 살짝 풀리기도 하지만 곧 단단히 여며가리라 여긴다.

신이인의 『검은 머리 짐승 사전』은 흥미롭다. 신이인을 신이인(新異人)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의 시는 이와 같이 시대의 ‘낯선 자’가 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그의 시 제목 「Beautiful Stranger」처럼. 아니, 신이인은 그 이상이다. 그저 단순한 이인이 아니라, 비인간을 꿈꾸는 자인 까닭에. 그의 시 속에서 비인간들은 비인간 자체의 어법으로 맥락을 이어간다. 비인간성의 감각과 운동으로 인간을 상대하는 것이다. 그는 여기저기의 요물들을 끌어들여 인간과 비인간 사이를 종횡무진 휘젓는데 그 요설이 썩 그럴싸하다. 흠이라면 대체로 길고 어지러우며 뜬금없기도 하다는 점이나 이는 소재로 택한 비인간성의 생래적 결함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동우의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를 읽으면서 나는 괴로웠다. 배면에서 들리는 신음이 크든 작든 계속 내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이 신음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나는 심고(心苦)의 파장이라 여긴다. 그는 지구생명체들의 통증을 대신 앓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그의 심연은 갖가지 대속의 파동으로 일렁이는 것인데, 그는 이 파동들을 꿰매고 이어붙여 시로 풀어내는 것이다. 지구를 “닥치는 대로 집어삼키는 식탐”(「방화」) 앞에 선 그의 고발이 간절해서 통증이 짙어졌다.

소설 부문 대상작은 3종이었다. 김멜라의 『제 꿈 꾸세요』는 요즘 소설의 주요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소수자와 동성애 코드, 비인간 화자가 중심 화소를 차지한다. 내 독해가 모자라서 그렇겠지만 소설 안으로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감각적인 문장과 캐릭터 설정 등은 나무랄 데 없으나 어쩐지 내게는 버성기고 겉돌았다.

백온유의 『경우 없는 세계』는 흡인력이 높다. 부랑아로 사회에 내몰린 청소년들에게 지금 여기서의 생활은 무척 버겁다. 그 좌절의 밑바닥에 놓인 가출청소년 서사를 백온유는 실감나게 그려간다. 취재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작업이고 만날 수 없는 캐릭터들이라 여긴다. 가진 것 없고 목표 없는 청소년들에게 이 세계는 분명 공포스러운 오늘이고 불안할 뿐인 내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경우’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여기의 미래적 가능성을 슬며시 열어놓는다. 그 믿음이 반가워서 나는 마지막까지 선택에 흔들렸다.

이주혜의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는 읽는 맛이 매혹적이다. 두번째로 실린 「아무도 없는 집」의 도입부는 압권이다. 실험용 사체인 카데바 묘사는 섬뜩하지만 영(靈)으로서의 감정이입은 강렬하다. 지난해 최종심에 올랐던 작품 『자두』에서도 확인한 바 있지만 이주혜는 ‘한국사회에서의 여성’의 무늬를 소설로 새기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다. 나는 그가 이러한 여성성의 발현으로 ‘강압적인 남성성과 폭력의 역사’라는 후진적 질서를 줄기차게 흩뜨려주길 기대한다.

평론 부문은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후보작은 3편이었는데 어느 한 작품을 선뜻 선택하기 어려울 만큼 약간씩 어긋났다. 상이라는 게 평가보다는 격려여야 한다고 생각해온 터라, ‘해당자 없음’이라는 결정이 몹시 아쉽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이동우의 첫 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는 크게 보아 현실과의 치열한 맞섬으로부터 시의 정신과 언어를 벼려온 민중시의 전통 안에 있지만, 앞선 시들이 만들어온 형식 안에 머문다는 느낌은 적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마치 처음 태어나는 것처럼, “땅이 열리”는 개벽의 순간처럼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탯줄」). 칠천년 전 반구대에서 상괭이가 태어나던 시간과 함께하는(「상괭이」) 그 성스러운 기억의 언어는 동시에 오래전 바다였던 곳, 경암동 철길 벽에 붙어 사는 담쟁이들의 “앙가슴”을 지금 이 땅에 “그림자처럼 묶인 이들”로 호명하는 순간과 하나이기도 하다(「담쟁이」). 거의 모든 시편에서 시인의 언어는 버팅기고 버팅겨낸 마지막 안간힘의 시간을 보존한 채 힘겹게 발화되고 있는데, 그 언어 하나하나는 쉬운 시적 비상을 거부한 채 주저하고 망설이는 느린 포복의 호흡과 리듬을 형성한다. 이는 서정적 자아나 집단적 꿈과 같은 시의 환수처를 미리 상정하지 않으려는 이동우 시의 결의와도 무관치 않아 보인다. 본심에서 함께 논의되었던 다른 시집들이 시적 분방함이나 이미지의 자유로운 이접을 매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면(물론 여기에도 각기 그럴 만한 시적 맥락이 존재한다), 이동우의 경우는 세계와의 불화를 자신의 시와 상처에 철조망처럼 두른 채 한발 한발 갯벌을 나아가는 느낌을 준다. “생살 양 끝, 실매듭이 벽을 잡아당긴다 팽팽해진 꿈은 늪처럼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발목을 잘라먹고”(「꿰맨 자국」). ‘팽팽해진 꿈’의 저 처절한 움직임이 이동우 시의 현재인 듯한데, 간혹 너무 망설이면서 멈춘 지점에서의 과감한 시적 돌파도 기대해보게 된다. 전체적으로 이동우 시의 경이로운 ‘팽팽함’이 새롭게 도착한 ‘온몸의 시학’이며, 지금이 신동엽문학상의 격려와 영예를 안기기에 적기라는 데 심사위원 모두가 흔쾌히 동의했다.

이주혜의 첫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를 읽다보면 이야기의 직조, 언어의 선택, 인간 이해의 시선 등에서 온당한 강도와 밀도가 마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가령 표제작에서 ‘미쓰 구’로 불리는 작중화자 ‘나’가 오십대 홀아비 사장과 동행하는 이십년간의 기이한 일본 출장의 시간은 어떻게 해도 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일 텐데, 이주혜의 소설은 세상으로부터 숨어야 했던 인물의 시간과 사랑을 과도하게 침범하지 않고도 그 쓰디쓴 갈망을 상상하게 하는 정확하고 구체적인 언어의 길을 찾아낸다. 이 특별한 이야기에서 ‘나’가 사랑의 숨은 목격자이자 특권적 화자이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자신 역시 비슷한 사랑의 은닉자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방식에도 독자의 마음을 은은하게 데우는 알맞음이 있다. 그 사랑은 고양이의 긴 이름 속에 숨겨져 있는데, 숨김은 작가도 어쩔 수 없는, 인물 고유의 아픔과 외로움으로부터 생겨난 절제의 형식일 것이다. 절제와 거리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갖추는 이주혜 소설의 신뢰할 만한 이야기는 그 엄격함이나 정확성에서 고전적인 만큼이나 소설의 화법이나 미학에서도 치열한 도전의 움직임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일견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면, 그 조용한 미학이 이주혜의 스타일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러고 보면 표제작에도 나오는 “나무 익는 소리”라는 표현은 이주혜 소설이 도달한 온당하고 정직한 언어의 비밀을 알려주는 은유로도 어울리지 않을까. 어둠을 끌어안고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일, 이주혜 소설은 그 힘겨움 안에도 자존과 지혜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홉편의 수록작이 보여주는 고른 소설적 성취에서도 작가의 남다른 온축을 확인한다. 기쁜 마음으로 수상작 결정에 동참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는 심사위원 다수의 동의를 얻은 평문이 없었다. 작품 자체에 밀착하면서도 새롭고 문제적인 비평적 의제를 논리화하고 그것을 두루 읽을 만한 글로 만드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갈수록 작품 읽기의 힘듦을 실감하게 되거니와, 비평에는 그 일의 손쉬운 처리에 대한 유혹 또한 없지 않은 것 같다. 수상자들에게 축하를 보낸다.

 

한기욱 문학평론가

최근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기후재난을 겪으면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불평등 구조는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한국문학에서 여성, 성소수자, 이주민, 노동자, 장애인, 청소년, 노인 등이 화두가 되어온 것은 이런 불평등 구조를 수평적으로 바꾸는 일이 문명적 대전환의 관건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수평주의를 절대화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어떤 ‘수평주의’를 어떻게 이룰지가 중요한데, 최종심 대상작들에서 삶의 구체적 맥락과 존재의 차원에서 이에 대해 사유하는 대목을 종종 발견하는 일은 고무적이었다.

시 부문에서 눈여겨본 것은 고명재 박한 이동우의 시집이었다. 고명재의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은 생동감있는 언어와 유연한 어법으로 보통 사람들의 조촐한 삶을 감미롭게 버무려낸다. 시의 화자들이 마주했을 힘든 시간과 환한 순간들을 생생하게 되살리는 기발한 발상과 리듬도 눈길을 끈다. 박한의 『기침이 나지 않는 저녁』에는 ‘순한 골목’의 공동체적 삶을 사랑하는, 정직한 노동과 순한 심성의 사람들이 다수 등장한다. 시인은 그런 민중상을 상투적이지 않은 어법으로 제시하고자 하는데, 민중적 삶의 파탄 앞에 선 화자의 발화가 때론 애잔하고 파편적이다. 이동우의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에 등장하는 시적 주체는 인간을 넘어 상괭이 같은 동물과 로봇 개 같은 비인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시의 주제도 4·3과 세월호참사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자본주의체제의 탐욕과 육식문화, 배달노동, 기후위기 같은 문명적 차원까지 아우른다. 시인은 상처받기 쉬운 존재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집중조명하며 그 고통의 강도와 질감을 포착하기 위해 엄청난 공력을 투입한다. 그 결과 ‘꿰맨 자국’에서 배어나와 ‘폐전선’을 따라 흐르는 신음 소리가 시집 전체에 배음처럼 깔린다. 다만 그 바람에 시편 하나하나의 고유성과 순정함이 약화되는 면도 있다. 심사위원들은 최종심에 오른 네 시집의 미덕과 아쉬운 점을 두루 살핀 다음, 우리 시대 어둠의 속을 끝까지 응시한 이동우의 시집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소설 부문 최종심에 오른 작품들 가운데 백온유의 장편 『경우 없는 세계』는 우리 시대 청소년들의 어두운 삶의 면면을 여실히 드러낸다. 백온유는 성인 중심의 관점으로는 도달 불가능한 ‘경우 없는 세계’의 서사를 뚝심있게 밀어붙여 우리 시대 리얼리즘 문학의 빈자리를 알차게 채운다. 다만 유령의 요소 혹은 장치가 좀더 요긴하게 작동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김멜라의 소설집 『제 꿈 꾸세요』의 표제작과 「나뭇잎이 마르고」 같은 작품은 오늘날 페미니즘 문학에서 새로운 영토를 개척한 이정표로 남을 만하다. 그간 여성의 삶을 옥죄어왔던 가부장제 이성애 혈연가족이라는 정형/ 정상의 틀을 깨려는 강한 정동이 느껴진다.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에 실린 이주혜의 소설들은 주제상으로는 김멜라의 소설들과 상당히 겹치지만, 여성억압적 현실을 다루는 기법과 작품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김멜라 소설이 과잉의 정서와 도발적인 발상으로 기존의 문학적 경계를 돌파한다면, 이주혜 소설은 미지의 영역과 애매한 구석을 남겨놓고 정교한 언어로 짜낸 미니멀리즘 예술에 가깝다. 또한 표제작과 「물속을 걷는 사람들」 「오늘의 할 일」 「아무도 없는 집」에서 보듯 그의 소설에서 젠더불평등이나 혈연가족 /모성애 신화 비판, 동성애 옹호 같은 의제는 주어진 정답이 아니라 곤혹스런 질문을 촉발하면서 깐깐한 사유를 요구한다. 그런 고민을 통해 섬세하게 벼린 언어가 우리 사회의 유별난 젠더불평등과 그 불감증의 벽을 깊숙이 가르고 지나갈 때, 그의 소설의 힘과 매력이 빛을 발한다. 심사위원들은 세 작가의 소설을 비교 논의한 결과 리얼리스트의 시선으로 오늘날의 여성현실을 예리하게 탐색한 이주혜의 소설집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평론 부문에서 최종심에 오른 세편 가운데 마지막까지 경합한 것은 최진석과 전기화의 평론이었다. 최진석은 ‘역사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근대 이후와 관련된 담론적 쟁점들을 벤야민, 데리다 등의 서구 이론과 강영숙 최진영 김초엽의 SF소설을 통해 논한 후 들뢰즈의 ‘소수적 문학’을 해법으로 제시하는 그의 평문은 재치있고 활달하다. 하지만 ‘역사 이후’를 거론하면서 자본주의체제에 주목하지 않는 것은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전기화는 최근 SF소설에서 식물과 유령 주체의 등장을 눈여겨보면서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재현의 경계와 차이를 복합적으로 사유한다. 김초엽 천선란 임선우 김멜라 소설 각각의 특성과 남다른 매력을 촘촘하게 짚는 그의 평문은 개별 작품에 대한 애정 어린 독법이 믿음직스럽지만, 담론적 차원에서 참신하고 패기있는 발상에 도달한 것 같지는 않다. 심사위원들은 두 평문을 놓고 장시간 논하였으나 아쉽게도 당선작을 뽑지 못했다.

 

 

 

수상소감

 

시어를 고르는 일

 

이동우 李東宇

2015년 전태일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가 있다.

 

분향소 앞에서 추모시를 읽었습니다. 이태원역 1번 출구 골목에서 헌화하고 온 뒤였습니다. 우산을 받쳐 들어도 손에 쥔 종이가 젖었습니다. 작년 늦가을 출판사에 최종 원고를 넘길 즈음, 이태원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허청대다가 그 비극을 시로 쓰지 못했고 올봄에 출간된 제 시집에는 관련 작품이 없습니다. 뒤늦게 완성한 시를 되뇌며 제가 가진 한줌의 시어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몇주째 이어진 폭우가 곳곳에 생채기를 냈습니다. 재해와 인재가 여러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지쳐가던 7월 어느날, 신동엽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벅차고 기뻤지만 ‘내가 이 상을 받아도 되는 건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상의 의미를 떠올리니 더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첫 시집을 엮으며 저 자신과 이 세상에 끈질기게 던지던 질문들을 곱씹어보았습니다. 시집 원고를 정리하던 때는 팬데믹 시기였습니다. 코로나19로 생업이 잠시 중단되었고 업무상 잦았던 출장도 멈췄습니다. 갑자기 생긴 잉여의 시간에 갈팡질팡하다가 찬찬히 주변을 돌아보았습니다. 바이러스에 편견과 혐오까지 덧붙여져 사람들은 서로를 멀리했습니다. 콜센터마다 전화 문의와 주문이 폭증했고 고된 배송업무로 택배기사가 사망했습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시행되면서 여러 일정이 취소되고 각종 모임이 중단되었습니다. 관계와 소통은 화상회의와 SNS 등으로 간신히 유지되었지만, 비대면 유대를 위해선 적절한 대면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걸 실감한 시절이었습니다.

선정 소식에 다시금 신동엽 시집을 꺼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독 ‘뼈섬’ ‘뼛죽’ ‘살뼈’ 같은 시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시를 읽으며 얼마 전에 본 허철녕 감독의 영화 「206: 사라지지 않는」 속 은폐된 뼈들을 떠올렸습니다. 영화는 한국전쟁 당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유해를 찾아 나선 시민발굴단의 활동을 다큐멘터리식으로 그려냅니다. 그들은 땡볕 아래 쪼그려 앉아 증언과 정황에 의지해 땅을 파고 뼈를 찾습니다. 총상에 훼손된 뼈를 보며 안타까워하고 아이의 뼈를 발견하고는 울음을 터트리는 그들의 모습이 숭고해 보였습니다. 흙 속에서 유골을 찾는 시민발굴단의 활동이, 혼란한 시대의 한복판에서 신동엽 시인이 하나하나 시어를 고르던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살처분된 동물들, 개발 아래 짓밟힌 생명들, 골령골에 묻힌 여순과 4·3 양민들, 세월호와 수장된 목숨들의 이야기를 시집에 담았습니다. 누군가는 숨기고 덮으려는 진실을 꺼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사회적 이슈를 문학적·미학적 문장으로 다듬는 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재현의 윤리’ 문제 또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따라다녔습니다. 그런 일들이 버거워 외면하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제게 용기 주며 격려해주신 분들이 계십니다.

기꺼이 추천사를 써주신 김해자 선생님과 엉성한 초고를 다듬어준 박지영 편집자님, 해설을 맡아준 김영희 문학평론가님 덕분에 제 시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한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많은 분께 인사 올립니다. 신동엽문학상 심사위원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참쑥 뭉쳐 꿀꺽이며 압록강으로 제주도로 바다로 골짜기로 반만년 쫓기던 민텅구리 죄 없는 백성들의 터진 맨발을 생각하여 보아라”라는 신동엽 시인의 시 구절을 기억하겠습니다.

 

 

 

수상소감

 

비스듬히, 에둘러 걷고 있어요

 

이주혜 李柱惠

1971년 전북 전주 출생. 2016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 『누의 자리』, 장편소설 『자두』 등이 있다.

 

기차는 한시간 만에 횡성역에 도착했다. 횡성역에서 잡아 탄 택시는 40분 정도 인적 없는 국도를 구불구불 달려 ‘예버덩 문학의 집’으로 향했다. 나는 타인이 되어 타인의 환대 속에서 여름 한복판을 나기로 했다. 택시기사는 십년 전 횡성에 귀농했다가 억대의 손해를 보고 농사를 접은 이야기, 텃세 때문에 시골 인심에 학을 뗐다는 이야기, 그러니 자신은 귀농한 것도 귀농하지 않은 것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었다. 택시가 국도를 벗어나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에 진입했을 때 길 양쪽의 너른 감자밭에서 한창 감자를 수확하고 있었다. 기계가 푹신해 보이는 검은 흙을 파헤치고 지나가면 외국인노동자들이 밖으로 드러난 감자를 주워 상자에 담았다. 쟤들, 요즘 일당이 얼마나 되려나? 나 때는 팔만원이었어요. 그중 만원은 인력소개소에 떼어주고. 기사가 감자밭을 흘낏 보며 말했다. 감잣값이 헐하면 쟤들 인건비도 안 빠져. 아유, 인건비가 젤로 무서워. 기사는 문학의 집 앞에 차를 세우고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묵직한 내 트렁크까지 내려주고는 택시비 사만 오천원을 받아 갔다.

나보다 하루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텃밭에서 뽑은 나물을 무쳐 밥을 차려주었다. 우리는 같은 음식을 먹고 공평한 땀 냄새를 풍기며 마을 어귀까지 산책을 나갔다. 그사이 감자밭은 휑해지고 감자 캐는 기계도 외국인노동자들도 보이지 않았다. 개천을 건너는 다리 끝까지 가 약수인지 지하수인지 모를 차가운 물에 손을 씻고, 왔던 길을 되짚어갔다. 그새 누가 감자밭에 나와 있었다. 밭 깊숙한 곳에 있던 남자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저기 문학의 집에 입주한 작가 선생님들입니까? 여기가 우리 감자밭인데 멀쩡한 감자가 많으니 이삭줍기해 가십쇼. 자잘한 건 삶아 잡숫고 큼직한 건 감자전 부치면 맛있을 겁니다. 남자의 구불구불한 지역 억양과 ‘이삭줍기’라는 단어가 검은 내 마음에 노란 감자알처럼 와 박혔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을 먹자마자 바가지를 챙겨 들고 남자의 감자밭으로 나가 감자를 주워왔다. 농촌에서 살아본 적 있는 시옷이 감자는 햇빛에 노출되면 무섭게 상하기 시작하므로 그전에 말짱한 것들을 골라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 이응은 손에 흙 묻는다고 비닐장갑을 챙겨왔다가 시옷에게 혼났다. 우리는 감자를 딱 두 바가지만 챙겨 돌아와 찐감자와 감자전으로 점심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친구들이 각자 공부 자리로 돌아갔을 때 나 혼자 좀 멀리까지 걷기로 했다. 문학의 집은 하천이 휘돌아 나가는 이른바 ‘하회’ 지점 안쪽에 위치했기에 내 걸음은 결국 문학의 집을 감싸고 흐르는 하천과 그 옆의 국도를 따라 멀리 에둘러 가는 길이었다. 한참을 걸어 출발점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물 너머로 내가 떠나온 집의 이면이 보였다. 폭이 그리 넓지도 않은 물을 건너면 바로 출발점이자 도착점인데, 나는 그곳에 돌아가기 위해 왔던 만큼 다시 걸어야 한다. 금세 어둠이 내렸다. 소나무, 가문비나무, 자작나무숲에 싸인 집이 희붐하게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저 성긴 빛을 외등 삼아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구가 떠올랐다. 말하라, 모든 진실을. 그러나 비스듬히 말하라. 성공은 에둘러 가야 있다.

물 너머 가까운 곳에서 손짓하는 저 따스한 빛에 닿겠다고 강물을 곧장 가로지를 수는 없다. 물은 만만해 보이지만 곳곳에 위태로움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비스듬히 닿아야 한다. 에둘러 가야 한다. 돌고 돌아 겨우 도착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릴 ‘성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저기는 눈앞의 유일한 외등이고 그곳엔 함께 감자를 줍는 친구들이 반딧불이처럼 제 방을 밝히고 있으며 감자를 내주는 타자와 감자를 캐는 타자가 있어 나를 아프게 하고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러니 나는 기꺼이 붉은 얼굴을 숙이고 그곳으로 가 또 하나의 타자가 되려 한다. 비스듬히. 에둘러. 그 기우뚱한 행위가 소설이라는 물질이 되어 누군가에게 노란 햇감자 같은 포슬포슬함을 전달할 수만 있다면 당분간은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여전히 어설픈 걸음에 과분한 격려를 전해준 창비와 신동엽문학상에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비스듬히. 에둘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