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에는 1059명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각기 다른 책상에서 태어나 한 책상 위에 차곡히 쌓인 응모작들을 보며 시의 탑을 떠올렸다. 그 탑은 꼭대기부터 시작되는데, 작품을 한장씩 넘기며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색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어떤 층에는 삶에 대한 예찬이, 어떤 층에는 슬픔이 흐르고 있었다. 탑을 다 내려왔을 때는 이들이 만들어낸 건축에 감탄하게 됐다. 시의 놀라움은 세계를 수직으로 단숨에 투과시켜준다는 것이다. 꼭대기에서 아래층으로, 첫행에서 마지막행으로 내려가며 각각의 시편에 담긴 삶의 깊이를 조금은 가늠해볼 수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발길을 오래 머무르게 했던 작품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나눴고, 마지막으로 4인의 작품을 두고서 당선작을 논의했다.

「국화 대신 열쇠를 올려놓았다」 외 5편(심재운)은 시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규모가 다른 응모작들에 비해 컸다. 자신만의 화법과 감각으로 현실을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보였다. 그러나 산문적 발화 형식의 시들이 반복되면서 긴장감과 리듬감을 떨어뜨렸다. 모호하고 관념적인 문장들은 구체적인 삶의 은유나 명료한 이미지로 다가오지 않았고 상상력을 펼치는 방식에서도 기시감이 느껴졌다. 시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도달하려는 지점까지 밀고 나가는 사유의 힘이 아직 단단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시선을 잡아끄는 시적 문장이 많지 않다는 점이 심사위원들을 마지막까지 망설이게 했다. 쓰려는 문장보다는 지워야 할 문장에 더 공을 들인다면 독창적인 시세계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더 아끼고 행과 행 사이, 연과 연 사이의 침묵에도 마음 쓰는 다음 시들을 기대한다.

「만년의 작업」 외 6편(윤재성)은 개성적이다. 유사한 시세계를 가진 기성 시인이 잘 떠오르지 않을 만큼 과감하게 시를 전개하는 힘이 있었다. 감정에 호소하지 않고, 차라리 감정을 배경처럼 다루면서 감정 이전, 감정 너머의 감각을 형상화하려는 태도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다만 이 응모작들이 어느 정도의 확장성을 가지는가를 생각했을 때 적잖은 아쉬움이 남았다. 그의 시가 ‘나’와 ‘화자’의 분리를 통해 일종의 자기분열 양상을 그려내고 있다면, ‘화자’라는 시어의 반복적인 사용 외에 다른 형식을 고안해볼 수는 없었을까. 반복과 변주로 이루어진 단정함도 물론 좋지만 자신의 기량을 신뢰하면서 더욱 과감하고 드넓은 세계를 창출해볼 수는 없었을까. 심사위원들은 응모작을 토대로 한 시인의 미래를 내다볼 수밖에 없다. 시를 가려 묶을 때 다양성과 확장성에 초점을 둔다면, 곧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으리라 여긴다.

「발목의 위치」 외 7편(김반디)은 심사위원들이 시간을 잊은 채 마지막까지 상론하게 만든 작품이다. 응모작은 우리 주변에 은둔하고 있는 희미한 존재감에 주목하고 있었다. 작고 여린 존재들에게 오래 시선을 둘 줄 아는 근기와 섬세한 감각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한편, 또다른 시편에서는 경쾌한 로드무비 같은 리듬감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 외부세계를 향한 문턱을 끝내 넘지 않는 듯한 소극적인 끝맺음이 고민을 깊어지게 했다. 후반부의 시에서 매력적인 이미지들을 펼쳐 보이지만 그 이상으로 깊은 사유에 천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움으로 지적됐다. 결국 경계를 넘어 앞으로 한발짝 더 나아갈 수 있는 도약력, 옆으로 한뼘만 더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 확장력이 갖춰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걸음에 더 큰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머지않아 우리에게 걸어오는 발목의 주인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 밖에도 기술적으로 능수능란한 작품들이 다수 있었다. 그런데 그 시를 완성하는 지점에 기성 시인들의 언어가 너무 많은 기여를 하는 점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코트와 빛」 외 4편(이하윤)은 기술적인 면이나 완성도 측면에서는 빈 곳이 있었다. 하지만 이 시인의 시에는 자신의 언어를 또박또박 적어내는 힘이 있다. 미세한 감각들을 촘촘하게 조직해 시적 율동을 만들어내는 모습도 믿음직스러웠다. 작은 것을 붙잡고 조급함 없이 차분하게 시를 펼치는 태도가 현실은 물론 현실을 넘어서는 곳곳에 가닿을 만한 튼튼한 다리를 만들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감각을 매만지며 세상을 차분하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삶의 이동 방향을 상상해보는 힘이 어쩌면 새로운 시적 사유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면모들이 ‘안전한’ 작품을 손에서 놓고 이하윤의 시를 뽑아 든 이유이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이하윤의 시 「코트와 빛」 외 4편을 제23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자께서 보여준 순정한 태도라면 앞으로 많은 이들이 위로와 용기를 얻게 되리라 믿는다. 당선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을 개성적인 문장으로 오래 밝혀주길 바란다. 그리고 응모자분들께, 보내주신 열정에 감사와 응원을 돌려드리고 싶다. 낱장일 때는 단면이지만 여러장이 겹치면 입체가 되듯, 수많은 시의 행을 쌓으며 세상을 깊이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송종원 안희연 이설야 조온윤

 

 

 

수상소감

 

 

이하윤 李霞玧

2004년 서울 출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재학.


숲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언가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동시에 잠드는 일이 반복되는 것을 알 수 있듯 낮은 자세로 몸을 웅크려야만 마주할 수 있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런 장면을 발 앞에 둘 때마다 나를 보는 것 같아서, 알 수 없는 마음이 차오르고는 하는데 아직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모든 건 제자리에 있는데 전부 흘러가버릴 것만 같을 때. 커다란 목소리로 가득 찬 세계 안에서 작고 조용한 마음들이 희미해질 때. 기도하는 마음으로 시를 씁니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게 해달라고. 모든 사물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불러주는 어떤 아이의 투명한 손을 빌려서.

 

마음을 담아 부르고 싶은 이름이 많습니다. 시를 쓰는 일의 처음을 함께해주셨던 고양예고 김기형 선생님, 유계영 선생님, 이승희 선생님 그리고 시의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들어가볼 수 있도록 저를 지도해주셨던 명지대 박상수 교수님, 김경후 교수님, 남진우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서로가 서로의 돌아갈 곳이 되어주는 시 A반과 B반 친구들, 그리고 ‘느루’ 친구들에게도 애정을 보냅니다. 같은 마음으로 쓰는 동료가 곳곳에 있다는 사실이 저를 일으키고 계속 나아가게 합니다. 무엇보다 엄마와 아빠, 정원에게 시 쓰는 나의 등을 두드려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매일 나를 새로운 장면 속으로 데려다주는 반려견 잭슨에게도 사랑을 보냅니다.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름을 여러번 발음하고 나면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 듭니다. 앞으로도 제게 조심스럽게 도착한 뒷모습들에 곁을 내어주고 싶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슬퍼하고 사랑하며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