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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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현 朱民賢

1989년 서울 출생. 2017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등이 있음.

1003jmh@naver.com

 

 

 

다 먹은 옥수수와 말랑말랑한 마음 같은 것

 

 

이사 온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어깨가 동그란 사람들

브뤼겔의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서른다섯 마흔일곱 예순의 여자들이 걸어간다

흙대파를 사느냐 깐 대파를 사느냐

 

물질과 생활을 토론하면서

 

작고 작아져 점으로 찍힐 때까지

바라보는 여자들의 사랑과 미래

 

이 집엔 못 자국이 많고

있는 힘껏 매달렸던 것들의 흔적에

 

손가락을 대어보면

 

군화처럼 고독한 것

나는 천국의 모양을 걸고 싶었어

 

걷고 또 걸어서

 

걷은 것은 밤하늘의 흰 점들

걸어서 네게 주지

 

감각하는 만큼 세계는 출렁이고

그만큼의 세계를 알고

 

말하면서도

마치 다 아는 듯이

 

정말 다 그런 듯이

비유하고 사랑하고 이 세계를

 

미래에는 다 웃는 이야기들

 

페이지를 열고 닫고 펼치고 덮고

입술을 열었다 닫고

 

너의 입술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모자 속에 모자 속에 모자를

포개어 놓듯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흔적의 빛

이곳의 밤은 꽤나 구불거리지

 

기원을 알 수 없고

우리들의 내장 속 같아

 

포장지 속에 포장지 속에 아주 작은 조명처럼

 

빛과 어둠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지만

또 이렇게나 멀리 있는 법이고

 

우리는 알지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가에 대해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매번 명쾌하게 물어보는 AI에게

너와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무릎을 꿇고 심장도 내어놓고

이윽고 우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기까지

그런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춤추고 잠자고

메타버스 안에서

 

석양을 보며 해류병을 던지자

매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의 기계 속 친구들과

 

꿈꾸고 말하고 웃고 듣고

꿈꾸듯이 말하고 웃고 듣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동트는 아침의 빛 속에서

 

우리의 시력이 최대치를 발휘하고 있어

우리 몸이 꿈틀꿈틀 깨어나고 있어

 

우리의 기원이 마구 섞이고

사랑의 색깔과 모양을 선택할 수 있다는 듯이

 

미래에는

 

친구의 아기는 아주 작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자전거를 타는 유쾌한 마녀

이야기를 들려줄게

 

최초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히파티아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면

 

꿈꾸고 말하고 웃고 듣고

꿈꾸듯이 말하고 웃고 듣고

 

최초의 여성 수학자

최후의 여성 철학자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웃는다

 

혐오나 차별의 언덕을 간단히

넘어갈 수 있다는 듯이

 

미래는 아직 심어본 적 없는 문장

꿈꾸어본 적 없는 장면

 

그러나 늘 그려보았다는 듯이

너무 많이 상상해와서 꼭 맞는 옷처럼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미래

다만 한걸음 더 걸어가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