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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삶을 돌보는 사회를 위하여
돌보는 사이
최지은 조온윤 최재원 시를 중심으로
박소란 朴笑蘭
시인.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 『있다』 등이 있음.
noisepark510@hanmail.net
미국의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앤 보이어(Anne Boyer)가 쓴 투병기 『언다잉』을 읽었다. 암 투병 경험과 거기서 길어올린 사유가 면밀한 이 책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대목을 꼽자면, 우리 모두는 하나로 결속할 수 있으며 그 매개는 다름 아닌 ‘고통’이라 역설한 부분이다. “고통에 관해서라면 누구나 늘 혼자라는 말은 거짓이라고” 그녀는 이야기한다. 아울러 돌봄 제공자의 심리와 관련해 이렇게 기술하고도 있다. “타인의 고통이 너무나도 요란하고 너무나도 생생하게 표현되는 통에 그 고통을 멈추고 싶어지는 충동은 타인의 고통을 끝내 버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하려고 달려드는 기세로 발현될 때가 많은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바로 고통이 공감에서 기인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때로는 성가심의 형태로, 때로는 불안의 형태로, 때로는 동정의 형태로—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다.”1
나는 새삼 생각한다. 돌봄은 단연 ‘관계’에 관한 일이며, (그에 따르는 육체적·정신적·경제적·제도적 차원의 갖가지 간난한 문제에 앞서) 타인에 대한 강렬한 공감과 결속을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돌봄을 둘러싼 관계,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작용은 너무나 거세고 때로 우리가 미처 예상치 못한 특별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좀더 정서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의 어떤 힘. 돌봄을 병든 부모를 간호하거나 미성년 자녀를 양육하는 친족 중심의 재생산 노동으로 협소하게 규정하지 않고 범위를 확장한다면, 그리고 돌봄이 우리 모두가 지닌 능력이라는 점을 인지한다면 그 힘은 더욱 막강해질 것이다.
다행히 요사이 돌봄 개념의 재정립을 주창하는 여러 논의들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돌봄이란 가정 내 재생산노동을 넘어 “사회적 역량이자, 복지와 번영하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사회적 활동”이다. 가정뿐 아니라 국가, 지구 등 공동체 전체를 포함한 모든 영역에서 “돌봄을 중심에 놓는다는 것은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인지하고 포용하는 것을 의미”하며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 사람과 생물체들이 번성하고, 지구도 함께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사회적·물질적·정서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2
이런 가운데 돌봄과 관계의 여러 면면과 가능성을 살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돌봄을 둘러싼 관계는 결코 단선적이지 않다. 다양한 양태로 교감하고 호환한다. 좋은 문학은 이런 식의 관계를 더욱 입체적으로 사유하도록, 확장된 돌봄의 가치를 구현하도록 돕는다. 돌봄의 확장성이나 운동성을 딱히 의식하지 않고 쓰인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에 담긴 내밀한 경험과 생활에 대한 고찰이 자연스레 그와 같은 방향을 지시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주목받은 첫 시집 가운데 돌봄과 관계라는 측면에서 깊은 인상을 남긴 세권의 시집을 살펴본다.
1
먼저, 최지은의 『봄밤이 끝나가요, 때마침 시는 너무 짧고요』(창비 2021). 이 시집 속 시편들은 ‘가족’이라는 익숙한 테두리 안에서 매우 이채로운 방식으로 돌봄을 구현한다. 상생으로서의 돌봄을.
최지은의 화자(들)는 깊은 상처와 결핍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유년기에 겪은 불우한 체험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내가 태어나고 세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지고. 내가 열여섯이 되던 해, 아버지가 물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가슴속에 항아리를 품고, 이집 저집 떠도는 신세가”(「햇빛 비치는 나무 책상 위로 먼지, 내려앉는」) 된 것. “나를 버린 부모의 얼굴”(「창문 닫기」) 같은 것. 때문에 최지은의 화자는 얼핏 “숲에서 혼자 우는 어린아이”(「하나의 시」)의 형상을 하고 있다.
특기할 점은 그 화자가 ‘꿈’과 같은 환상적 장치를 통해 과거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재생한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 도처에서 어린 시절의 자신은 물론 “젊은 아버지와 앳된 어머니”(「사랑하면 안 되는 구름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름에 대해」)가 출몰한다. 이는 고통의 증험을 “완전히 지우려 다시 나를 찾고 버리고 헤매고 배회하”(「나 없이도」)는 과정으로 읽힌다. “나 자신을 미워하고 꾸짖고 구박하는”(「너 홀로 걷는 여름에」) 자기불화에서 벗어나 자기돌봄-회복으로 나아가는 일. 꿈은 “조금 슬픈 곳”(「목소리」)에서 차츰 “되돌려진 시간 속에 긴 오해를 풀어가고 슬픔과 화해하”(「이 꿈에도 달의 뒷면 같은 내가 모르는 이야기 있을까」)는 곳으로 의미망을 넓혀간다.
“슬픔과 화해하”며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는 중심에는 ‘할머니’와의 관계가 있다. 부모의 부재 속에서 ‘나’를 양육한 할머니는 최지은 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로, ‘나’를 돌본 존재이자 시간이 흐른 뒤에는 성인이 된 ‘나’의 돌봄을 받는 존재다. 돌봄 제공자의 자리에 머물던 이가 돌봄 수혜자의 자리로, 돌봄 수혜자의 자리에 머물던 ‘나’가 돌봄 제공자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 이 각별한 전이는 최지은의 화자가 성장해가는 과정과도 밀접하다. “할 수 있는 것 없어/잠든 할머니 한번 더 재워도 보고/빈 병 물 채우는 소리만 울리는/밤의 복도/무엇이든 약속받고 싶던/지난겨울”(「눈 내리는 병원의 봄」)의 시간을 보낸 뒤 할머니는 결국 임종을 맞는다. 하지만 시인은 멈추지 않는다. “오래전 할머니의 봉안함을 홀로 건네받았던 여름/그날 내 곁에는 하얀 나비 하나가 오래 머물렀고” 같은 징후를 “할머니가 또 한번 내게 오기 위해 나비의 몸을 빌렸다”(「유월」)고 믿는다. 그리고 예의 꿈을 통해 그 소중한 존재를, 그 존재와의 관계를 복원시키고자 한다.
나는 죽은 할머니가 곤히 잠들어 있는 꿈을 꾸었다
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려고 꿈을 고르고 있었다
달빛 아래 텅 빈 골목길을
홀로 걸으며
걸음을 멈춘 곳에서 환한 백목련이 피어나고
할머니는 목련 한송이를 따서 향을 맡고
두 손을 받쳐 목련 안에 고인 물을 마셨다
박하 향이 나는 꿈이었다
두어달이 지나고 큰엄마는 동생을 낳았다
—「여름이 오기 전에」 부분
할머니의 죽음과 사촌동생의 탄생은 신묘하게 이어진다. 이는 분명 의지와 열망으로 자아낸 결과이며, “할머니는 다시 태어나려고 꿈을 고르고 있었다”는 장면은 할머니를 다시 태어나게 하려 꿈을 고르는 ‘나’의 모습과 자연스레 겹쳐진다. 이미 삶을 다한 할머니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돌봄 제공자로서의 지속적인 역할 수행인 동시에 ‘나’의 현재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기돌봄의 연장이다. 이로써 보건대, 돌봄은 결코 일시적인 혹은 물리적인 차원의 일(노동)에 그치지 않고 내밀한 정서적 유대로 계속해서 이어진다. 양육 혹은 간호의 시간이 종결된 뒤에도 돌봄의 강렬한 관계는 지속되고, 함께 있음의 상태는 두고두고 회복의 가능성을 담지한다.
나에게도 나를 기른 사람이 있었는데
나는 나를 기른 사람과 닮아서 나를 기른 사람에게 깃들어
나의 여름은 나를 기른 사람과도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를 기르고 있다
점점 더 닮아가는 방식으로
같이 죽어가는 것도 같고
같이 살아 있는 것도 같고
같은 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여름의 전개」 부분
이 시는 한 여인이 유모차를 끌고 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 장면을 본 화자는 여름이라는 계절 속에서 차츰 닮아가는 아이와 아이 엄마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상기한다. “나에게도 나를 기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나를 기른 사람”은 일찍이 집을 떠난 ‘어머니’일 수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아버지’일 수도, 그리고 ‘할머니’일 수도 있겠다.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대목은 “우리는 서로를 기르고 있다”는, “같은 몸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감각이다. 최지은의 계절이 ‘전개’되는 방향, 이런 것이야말로 돌봄을 지탱하는 핵심가치가 아닐까. 이어 최지은의 시는 조금씩 더 넓은 곳으로 뻗어간다. 가령 “손목의 흉터가 닮은/두 사람”이 등장하는 「나는 나라서」에서는 “나는 나라서 나 아닌 것들을 안아주면서 (…) 나는 나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우리는 서로가 아니라서 서로를 안아줄 수 있”는 상황에 이르며 더 근본적 가치로서의 돌봄을 사유한다. 조운 C. 트론토(Joan C. Tronto)가 『돌봄 민주주의』에서 이르듯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익숙”한 경우 “돌봄을 확대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는 법이다. 물론 타인을 돌보는 일은 그들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식을 요한다. 자신을 넘어 “다른 시민의 삶에 대해 알아가”는 꾸준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3
돌봄을 사적 영역으로 제한하지 않고 공적 영역으로, 다양한 양상과 다양한 관계로 넓혀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장은영이 밝힌 대로 “돌봄의 상상력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는 돌봄이 지속될 수 있는 대안적 관계성을 발견하고 다양한 형태의 연결망을 사유해보는 데 있음을 기억”한다면, “지금 필요한 시의 역할은 돌봄이 실현되는 다양한 방식의 공동체와 삶의 연결망을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하면서 돌봄의 상상력을 더없이 증폭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4
2
돌봄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발견하고 사유하도록 하는 대표적인 예로 조온윤의 시를 떠올린다. 『햇볕 쬐기』(창비 2022)는 나와 너, 우리, 그리고 이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동시감각을 부단히 펼쳐낸 시집이다.
처음 조온윤의 화자(들)는 어두운 방 안에 혼자 머문 채다. 마치 존재 이전 하나의 ‘풍경’처럼. “바깥은 모두 깨어 움직이는데/혼자서만 잠들어/먼지가 쌓이는 기분”(「휴일」)으로. 그는 그런 자신을 “세상에 버려진 실패작”이나 “완성되지 않은 얼굴”로 인식하지만, 생명으로서의 본능적 의무 혹은 의지를 저버리지 않는다. “없는 손 하나”로써 “모르는 손을 그리며/공백을 더듬는다”(「토르소」). 흥미로운 점은 그 스스로 끝내 ‘완성’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 “나는 완성되지 않았다/완성되지 않을 것이다” 하는 「토르소」의 선언은 조온윤 시의 움직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스스로의 결핍을 무화하는 방향이 아니라 결핍된 상태 그대로 결핍을 향해 나아간다. 아픈 ‘나’가 아픈 ‘너’의 손을 잡고자 하는 열망, 어쩌면 아픈 ‘나’이기 때문에 비로소 그럴 수 있다는 확신. 손발이 없는 “무족한 것은/넘어지지 않고 살아남아 영원하겠지”만 그런 것은 조온윤의 관심사가 아니다. “넘어진 이들에게 다가가/내밀어볼 수 있는 손이 없다면/영원 따위는 주머니에 넣어두고 꺼내보지 않는/슬픔일 것 같다”(「무족영원」)고 그는 생각한다. 넘어진 내가 넘어진 너를 향해 내미는 손, 그것이 다름 아닌 시인이 그리는 ‘빛’이 아닐까. “맹인에게는 그 개가 빛”(「빛과 산책」)이듯이.
천사는 언제나 맨발이라서
젖은 땅에는 함부로 발을 딛지 않는다
추운 겨울에는 특히 더
그렇게 믿었던 나는 찬 돌계단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언 땅 위를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다
매일 빠짐없이 햇볕 쬐기
근면하고 성실하기
버스에 승차할 땐 기사님께 인사를 하고
걸을 땐 벨을 누르지 않아도 열리는 마음이 되며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
인간을 위할 줄도 아는 것
혹은
자기희생
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
눈을 떠보니 곁에는 낯선 사람들이 있고
겨드랑이가 따뜻했던 이유는
그들의 손이 거기 있었기 때문
—「중심 잡기」 부분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골몰했”던 아웃사이더의 쓸쓸함은 이내 “낯선 사람들”의 온기 속에 스민다. 그리고 그 낯선 사람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는 감각. 나와 같은 ‘맨발’이라는 발견. 이는 자신의 결핍으로부터 서서히 주변의 결핍과 필요를 알아차리는 일과 닿아 있다. 조운 C. 트론토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취약성을 인식하게 되면, 그들 주변 사람의 돌봄 실천을 되돌아볼 필요가 생기게 된다”고 했다. “우리 모두는 돌봄 수혜자다. 이 점은 사람들이 유아일 때, 병약할 때나 고령으로 노쇠해질 때를 생각하면 엄연한 사실이다. 모든 사람은 평생토록 필요를 갖는다. 시민이 기꺼이 그들의 필요를 인정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필요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5 그렇다면 조온윤의 말대로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은 감정으로”도 “인간을 위할 줄” 알게 되지 않을까. “자기희생/거기까지 가닿을 순 없더라도” 말이다.
즉 조온윤이 그리는 선한 의지는 결코 생래적인 것이 아니다. 돌봄은 크나큰 에너지를 요하며, 쉽게 성공하는 일이 아니라는 점을 시인은 익히 깨닫고 있다. 돌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맹목적인 희생이나 믿음이 아니라 도리어 고통에 대한 통렬한 감각이다. 각각의 존재가 어쩔 수 없이 지니는 결핍, 무르고 약한 성질. 이 어쩔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모두가 하나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한다.
할머니가 있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처럼
죽어가면서도 시선을 잃지 않아서
아득한 세월의 흔들의자에 앉아 여전히
이승의 장경을 관망하고 있는
아무르강 가에서 늙고 지친 호랑이가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잃은 마지막 호랑이가
수면 위로 얼굴을 비추는 순간
마르고 거친 혓바닥을 내밀어 적시는 순간
늙은 호랑이는 마주하게 되지
마지막 할머니를
초원 위를 뛰어가는 사슴들을 멀리서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 위구르족 여자의 시선을
—「마지막 할머니와 아무르강 가에서」 부분
아무르 강가의 “늙고 지친 호랑이”나 “위구르족 여자” 등 시 속 대상들은 하나같이 쇠락해가고 있다. 사라짐의 참담한 처지에 놓여 있다. 이들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모두 하나의 궤로 엮여 있고, 시인은 흔한 “가판대 위 물고기의 눈알”에서도 그와 동일한 참혹을 읽는다. “세계를/그곳의 공감각을”. 그리고 서로를 관망하는 시선이 얼마나 검질기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헤아린다. 아직은 사라지지 않은 “마지막 할머니”처럼. 말하자면 이는 우리의 광대한 상호의존성을 지시하는 것일 테다. 최근의 팬데믹 사태로도 증명된바, 여러 생명체가 복잡다단하게 얽힌 이 세계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돌보며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다.
‘너’를 보살피는 일이 곧 ‘나’를 보살피는 일임을 조온윤은 「반려식물」에서 이와 같이 드러내고 있다. “간밤의 꿈을 이불 위에 쏟아버린 나의 가여운 반쪽”, 즉 반려식물을 또다른 ‘나’로 인식하며 그 존재가 “시들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내가 사라지지 않고 늘 함께 있음을 이야기해줄 것”이라고. 이 세계 안에서 ‘나’와 또다른 나인 ‘너’가 함께 살아간다는 귀한 발견.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넘어 작고 약한 존재를 돌보는 일, 나아가 자신 역시 그 작은 존재의 일원임을 깨닫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이 조온윤의 시에는 있다. 이제 조온윤의 화자들은 안에서 밖으로, 혼자에서 사람들 속으로 조금 더 힘을 내어 나아갈지도 모르겠다.
3
돌봄의 관계를 확장하고 고통을 통한 결속이라는 키워드를 구체화하는 예로 최재원의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민음사 2021)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도처에서 울음에 가까운 날것의 소리가 쏟아지고, 그 각각을 마치 채록하듯 담아낸 최재원의 시집은 독특한 제목만큼이나 흥미롭다.
첫 시 「모 조」의 전문은 이렇다. “보닛 위에 날개 한쪽/순순히 올려놓고 너는/온 데/간 데”. 이 간명한 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보닛 위”라는 도시적 공간이다. 허물을 보닛 위에 두고 사라진 ‘너’는 누구인가. 짐작대로 ‘매미’인가? 아니면 ‘나’, 혹은 도시를 살아가는 ‘우리’? 시가 ‘너’라는 존재를 특정하지 않아 더욱 알쏭달쏭하다. 모르긴 몰라도 이 도시에서 매미든 인간이든 처지는 그리 다르지 않은 듯하다. “아파트의 내장이 기를 쓰는 소리” “심장 밖에서 뛰는 살아 있는 죽음의 소리”(「시속 40킬로미터의 소리」)가 무성한 속에 “하루 종일 모은 이빨을 새벽배송으로 집에 부쳐 놓고/귓구멍에는 우유를 찰랑찰랑 싣고/물구나무”(「퇴근길」)를 선 채 살아가는 ‘공복’의 존재들로서 우리는 모두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이곳 도시에서는 ‘나’ 자신의 정체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않는다. “도둑 딸이 아니라 대견한 아들로”(「자수」) 오인되는가 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은 나를 보지 못”하고 “흙더미와 나는 구분이 되지 않는”(「곡」) 지경이다. 이따금은 “발꿈치에 뿔이/돋”는(「가시와 뿔」) 기형적 존재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처럼 불안정한 우리 자신의 민낯을 “고장 난 매미”(「고 장」)를 통해 아프게 감각하고 있다.
타악 타악 날다가 갓 떨어진
몇 번의 소리와
몇 번의 날갯짓이 그 안에
아직 남아 있을
풀 볼륨의 그 녀석을
그서석버서석콰직쿠지직끼약꽥콰지지직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우리의
몸이 뒤바뀌고 말았다
—「FULL VOLUME」 부분
시집 전체를 놓고 보자면, “풀 볼륨의 그 녀석”은 분명 매미일 것이다. 화자는 매미가 내지르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지나치지 못한다. “그서석버서석콰직쿠지직끼약꽥콰지지직”으로 표기할 수밖에 없는 고통. 그로부터 “너무 놀라 그 자리에서 우리의/몸이 뒤바뀌고 말았다”고 하는데, 화자는 스스로 울음의 몸이 되어 도시 곳곳 울음의 존재들을 발견하고 그들의 언어에 주목한다. 취기가 서린 “에 누나 에 누나” 하는 말이나 아이코스를 빨며 뜻 없이 내뱉는 “여보세요?? 여보세요??”(「공복」), “아 씨발” “누나, 왜 욕을 하고 그래……. 밥 먹었어요?” “나랑 잘래?”(「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같이 지극히 도시적이고 통속적인 발화는 가장 거친 가장 날것의, 마치 울음과 같은 소리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아니, 들린다.
그가 실없는 소리를 한다. 그건 음악 같은 소리다. 오직 그의 입술에서 나온 소리의 진동, 진동과 진동의 사이, 그 템포, 높낮이, 쉼표만이 의미를 가진다. 그러니까 그는 의미를 밟고 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가 걷는 곳마다 의미가 피어나는 사람인 것이다. 아. 어떻게 그를 가지고 싶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
나랑 잘래?
누가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말했다면 음악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말했다면 그것은 덕지덕지 더러운 말이 되어 부스러기를 잔뜩 남긴 채 바닥에 부서져 있을 것이다. 나는 내려다보기가 두려웠다. 내가 사정하지 못할 것은 뻔했고, 나는 그가 사정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허락되지 않아. 나는 그의 손을 뒤로 묶고 그저 그가 찍어 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그의 목이 앞으로 떨어졌다 귀찮다는 듯 뒤로 젖혀지는 것을, 그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그의 이마에 삼각형으로 떨어지던 해가 점점 늘어지며 긴 삼각형이 코에 음영을 만들고, 얼굴을 붉게 타오르게 만드는 것을, 그가 뱉어 내는 소리의 간격과 빠르기를, 그의 예정된 종류의 아름다움을 즐길 것이었다.
—「나랑 하고 시픈게 뭐에여?」 부분
술집 같은 곳에서 가볍게 만난 듯한 ‘나’와 ‘그’. 그러나 어째서인지 ‘나’는 ‘그’의 “실없는 소리”에서조차 어떤 ‘의미’를 감지한다. ‘그’라는 존재 자체의 의미를. 그러므로 “나랑 잘래?”가 은유하는 것은 성적 쾌락 같은 것이 아니다. 화자는 “그가 사정하기를 원하지 않”으며 다만 “그가 찍어 내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그의 목이 앞으로 떨어졌다 귀찮다는 듯 뒤로 젖혀지는 것을, 그의 손이 꼼지락거리는 것을” 원한다. 본능에 가까운 소리, 그리고 몸짓을. 결핍된 존재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최재원의 시에서 소리와 함께 중요한 또다른 한가지는 바로 ‘몸’이다. 가장 원천적이고 실재적인 것!
「종로 3가에서의 죽음」 속 화자는 우연히 버스 안에서 “앞 의자와 연결된 수직봉을 왼손으로 잡았다 놓았다 하며 비스듬히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 지지하고 있”는, “내 쪽으로 몸을 열고 있는” 미지의 ‘그’를 발견한다. 그는 “발은 보이지 않”고, 때문에 “실제로 거기 서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운 이다. 그러나 화자는 “창밖의 건물들과 걸어가는 사람들, 심지어 내 옆에 앉은, 피부를 맞닿은 사람”보다 훨씬 선명하게 그 존재를 의식한다. “나보다 5~6센티미터 정도 큰 키에 마른 몸에 레몬보다는 조금 더 네온에 가까운 노란 오버사이즈 셔츠를 입고, 빳빳하지도 해지지도 않은, 그러나 여러 번 입은 것이 분명한 회색의 통이 좁고 하늘하늘한 면 트랙 팬츠를 입”은 그의 몸은 더없이 생생하고 구체적이다. 화자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몸’으로서 실존하지만, 마치 화자 자신과 같이 이 도시에서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한 존재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최재원이라고 합니다./혹시 괜찮으시면 핸드폰 번호를 받을 수 있을까요?” 가공되지 않은 이 천진한 발화는 관계를 향한 시인의 몸짓이 얼마나 순정한지, 결속에 이르기까지 시인이 어떤 방법론을 채택하고자 하는지 짐작하게 한다.
정리하자면 최재원의 화자는 도시라는 결핍의 공간에서 훼손된 존재가 훼손된 존재를 향해 가짜(허물)를 벗고 가장 실재적인 상태로 다가서는 태도를 견지한다. 날것의 소리, 날것의 몸. 날것의 ‘나’가 날것의 ‘너’를 향해 점차로 나아가는 과정은 적잖은 울림을 준다. 고통을 공유한다는 측면에서 나와 너는 다르지 않고, 그러므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 돌봄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내재한다. 최재원이 ‘매미’를 주요 소재로 채택한 이유는 비교적 명료해 보인다. 도시, 소리(울음), 몸(탈피)이라는 세가지 속성이 매미라는 제재로 모아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종(種)의 경계를 넘어 도시라는 광포한 공간 안에서 훼손된 모든 존재를 향한 돌봄의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한다. 돌봄의 관계를 친족 혹은 인간 중심으로 상정하지 않고 가까운 관계에서부터 먼 관계로까지 그 폭을 과감히 넓히는 시인은 우리 각각이, 동시에 우리 모두가 함께 처한 고통을 명확히 인식하며 돌봄의 상상력을 무한히 확장해간다.
+
“우리는 취약함을 극복할 수 있어서 시민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취약함을 공유하기에 시민이다”라는 말을 떠올린다.6 돌봄과 관계에서 핵심은 우리 각자가 스스로의 취약성,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을 감각하고 더불어 타인의 고통에 감응하는 것. 고통은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잠재해 있으므로 그 아픔이라는 감각을 통해 자신을 넘어 타인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돌보는 것.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의 연대적 존재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문학은 이 과정을 기록하고 계승할 수 있다고 믿는다. 최재원의 시를 한편 더 보자.
고통도 없이 햄처럼 잘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
소리가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렇게. 말만이 있다. 소리는 진동시킬 것이 없고 나올 곳도 없어 생성과 동시에 소멸되지만 누군가가 기록하고 있다. 소멸되는 것을 나의 기억만이 기록하고 있다. 엄마한테 알려 줘야 돼. 나 지금 여기 있다고. A에게 말해야만 해. 나 여기 있다고.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 여기에. 있다. 태어나며 집어삼켜지는 소리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놀라움도, 발작적인 당혹스러움도, 모조리 기억 속에만 기록된다. 기록은 존재할 곳이 없는데도 존재한다. 나와 기억은 같은 존재인가? 그러나 나는 새로운 기억을 기록한다.
—「참수」 부분
“고통도 없이”, 고통을 온전히 드러내지도 못한 채 “햄처럼 잘림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면 그것을, 그 소멸된 고통의 소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누구의 몫일까. “나 지금 여기 있다고” 말해줄 이는 누구일까. 앤 보이어는 강조한다. “고통은 언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화시킨다”고. “거의 쉼 없이 지속되고, 종을 초월하고, 보편적인 전달 가능성을 지닌 고통”7을 나누는 방식으로. 그로써 하나 되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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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 보이어 『언다잉』, 양미래 옮김, 플레이타임 2021, 237, 259면.↩
-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 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17~18면.↩
- 조안 C. 트론토 『돌봄 민주주의』, 김희강·나상원 옮김, 아포리아 2014, 277면.↩
- 장은영 「돌봄의 상상력과 평등의 꼬뮌」, 『창작과비평』 2022년 가을호, 393, 412면.↩
- 조안 C. 트론토, 앞의 책 275면.↩
- 전희경 「시민으로서 돌보고 돌봄 받기」 , 김영옥 외 『새벽 세 시의 몸들에게』, 봄날의책 2020, 64면.↩
- 앤 보이어, 앞의 책 235, 237~38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