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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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高炯烈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대청봉 수박밭』 『해청』 『사진리 대설』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오래된 것들을 생각할 때에는』 등이 있음.

snowind123@daum.net

 

 

 

나의 공룡능선

 

 

그곳에 가면 바다가 있다 깊이를 모를 검푸른 바다

 

산의 어스름을 껴안은 파랑이 창밖의 어둠을 때리고 간다

길 건너편에서 수화로 이별한 눈구름의 스카프처럼

바다는,

수많은 기를 손에 든 채 바람이 되었다

 

그곳에 젊은 날의 그대 없는 시가 있고 아무도 구하지 못한

꿈이 뒹군다

지금도 허공을 뿌리치는 달은

세월을 베어 물고 가고 그래서 검은 생명의 기억 같은

먼먼 동해는 더 늙지를 않는다

 

모두 바치고 가는 자정 늦은 밤 산길을 돌아서 돌아서

동해로 가면,

동해는 해가 떠난 서항(西港)이 되는 듯

그대의 신령과 준엄은 모든 수사를 뛰어넘은 밤이 되어

캄캄한 가슴의 나는 점점 도드라져 밝아왔다

 

나여, 지금은 석얼음 같은 그믐,

작은 그녀는 단단히 묶은 맨발로 월인(月印)의 바다를 밟고

언덕 계단을 빛처럼 뛰어 내려온다

언제나 등대가 그곳에서 불을 켰기 때문이다

 

폐허가 부끄럽지 않은 것처럼

모방도 패러디도 필사도 마다 않던 시절이 그에게 있었다

자신을 향한 끝없는 사랑과 관찰의 나날을 지나

서투른 언어가 안개 세상의 모든 의미를 두고 돌아가고 있다

 

도무지 후회가 치받치는 무인도 앞에 다다르면

길이 없이도 푸른 거울의 바다는

한필씩 펼쳐져 내 눈 속의 발치에서 은비늘로 반짝인다

 

어둠이 내린 수평선은 그리움이 끝난 낯선 바다가 되어

새벽 햇무리를 맞는다 할지라도

그는 눈을 열지 않을 것이다

미명 속엔 아직도 다 젊지 못한 그녀가 혼자 살고 있다

이제 바다는

그의 눈을 감추고 다시 그녀를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멀리 흐려지는 그대 목소리만 우리 모두를 혼자씩 남게 하고

검은 달빛의 그림자는 심연을 달려가며

그대 눈가에 아득히 내려설 뿐,

 

눈 내리는 공룡능선을 걷는가 혼자 다 살아도 다 살진 못해서

눈 그친 공룡능선을 밟는가

 

여기서 너는 어둠을 지키고 나가지 말아라

칠흑장막의 눈이 찢어져 너는 올 테니

생이 없는 죽음에겐 저 찰랑이는 자금색 빛도 다시 없다

 

 

 

청미래덩굴 속으로

 

 

다시 잎 도타운 청미래덩굴 숲으로 가고 있다

 

미리 그 밑에 들어가 앉아 집 없는 아이가 되려고

동냥받는 꿈 하나를 못 이루고

천길 벼랑 아래 돌서렁을 밟고 내려서리

 

그 영혼은, 동해 용궁이 보이는 그쯤 언덕에서

얼음이 녹는 손 시린

아침 길이 될지라도

 

기약 없는 초록의 성장(盛粧)을 맞으며

뿌리 뻗고 서 있는 곳까지만 양식으로 삼을 터

지금 너의 마음속으로 걸식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둠을 받아 내 두 눈을 거기 놓고 나오면

눈 시린 동북 파랑과 북새구름에 사나흘 몸살을 앓고

눈 이레씩 와보라,

그 사람들 손과 얼굴 끝내 보고 싶다고

청미래덩굴 하나 허공에 올려줄 수 있을까

 

바람 퉁갈이나 따 먹게 해주고, 나를 잊게 해줄까보다

그래 아니다, 아니다

어쩔 줄 모르게 산 노을 걸린 불이문만 쳐다보게 해줄 테다

 

아침 해로 새 옷 입힌 채

나는 혼자 밤의 끝에 오는 청미래덩굴 아래 한줌의

흙이었을까

 

어디도 가지 않는 길은 없어서

동냥 온 남의 아이를 빗줄기 속에 앞세우고

이제 내 저녁으로 돌아왔으니 아가야, 여기서 우리 둘이

나누어 쉬자

 

서로 다투는 것들 어디서 멈출지 앞서가라 하고

두 손의 온기로라도 네 두 뺨을 잎으로 감싸며

평생 봤어도 인사 한번 못한 슬픔의 이름으로 내 몸은 너의

옷이 되리

 

자신도 모르게

그 단단한 청미래덩굴 잎으로 피어나면

동해 수평선 아기햇살로 다가오듯, 둘이 마주 껴안은 채

줄기 내려간 뿌리에서 흙과 물을 받으리

 

그때, 우리 서로 몸 바꾸고 돌아와 살아도 좋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