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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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기 金明氣

1969년 경북 울진 출생. 2005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등이 있음.

poet1969@daum.net

 

 

 

작약 꽃잎 떼어내는 밤

 

 

오랫동안 풍을 앓던 동생 초상을 치르고

망백이 넘은 누이는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방문요양사만 날마다 드나들었다

 

이레 만에 구급차를 대동한 요양사에게 겨우

부축받으며 문밖을 나서던 삭정이 같은 몸이

무너지듯 마당에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

동네사람들이 모여들어 달래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어마이 아바이 일찍 죽고 핏줄이라고는

지캉 내캉 둘뿐인데 빙신맹키로 살다가

왜 먼저 가노 이노마야 이노마야

내 혼자 살아 머 하겠노 우야겠노”

 

비애의 곡절이 끝나기도 전에 혼절한 그이를 실은

구급차가 황급히 떠나고 사람들이 혀를 차며

돌아서자 철없는 새끼고양이가 봄볕을 쬐며

바닥난 슬픔 위를 뒹굴었다

 

그렇게 떠난 큰 슬픔은 달포째 돌아오지 않고

병문안도 거절한 채 간신히 버티는 중이라 했지만

아무래도 영 못 돌아올 거라고 모두들 수군거렸다

 

이슥한 밤이면 창문에 어룽대던 텔레비전 그림자마저

사라진 빈집 수돗가에 작약이 한창인데 백년을 살아도

다 쓰지 못한 슬픔이 가엽고 가여워 달빛 지고 선 그 집

마당가에 앉아 실없이 꽃잎이나 떼어내는 밤 아무래도

아무래도 그러고야 말 것 같은 봄밤

 

 

 

신발을 버리며

 

 

십년 넘게 신은 신발을 버린다

부리는 대로 몸을 받아내느라

굽은 허리처럼 휘어버린 뒤축과

굵고 깊게 파이고 미어진 상처

비정규적 삶의 몸통을 받치는 동안

재계약하듯 몇번이나 밑창을 갈고

안감을 덧댔지만 도저히 더는

못 버티겠다고 아가리처럼 벌어진

밑창 사이로 늙은 혓바닥같이

늘어난 양말이 흘러나왔다

바닥이 바닥을 밀며 보낸 세월의 전모가

고스란히 드러났으나 뭉클함보다 앞선

난감함이란 갈 곳 잃고 엉망이 되어

돌아온 수취인 불명의 우편물 같았다

비난할 수 없는 비루함처럼

처참한 것이 어디 있을까

축축한 음지 속을 살아내느라

깊숙이 감추어두었던 지독한

냄새까지 토해내며 어둠 끝에서

불구가 되어버린 내 생의 한 귀퉁이는

이제 불명의 발신자로 세간을 떠돌 테지

신발을 버린다 말끔히 닦아 가혹했음을 감추고

돌아오지 못하게 소인(消印) 없는

봉투에 밀봉한 채 더이상 바닥 같은 것은

만나지 말라고 발을 빼고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