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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정찬 鄭贊

1953년 부산 출생. 1983년 『언어의 세계』로 등단.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베니스에서 죽다』 『희고 둥근 달』 『두 생애』 『정결한 집』 『새의 시선』,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광야』 『유랑자』 『길, 저쪽』 『골짜기에 잠든 자』 『발 없는 새』 등이 있음.

lodem53@hanmail.net

 

 

 

왼쪽 눈

 

 

1

 

2012년 9월, 시인이면서 무용에 관한 글을 쓰는 K는 빔 벤더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를 보려고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의 소재는 피나 바우슈가 창단하고 성장시킨 부퍼탈 탄츠테아터 무용단이었다. 피나 바우슈는 무용과 연극을 결합한 새로운 장르 ‘탄츠테아터’를 창안하여 ‘현대무용의 혁명가’로 불렸다.

K가 무용에 매혹된 것은 무용만이 지닌 독자적 존재성 때문이었다. 문학과 미술, 음악과 영화는 언제든지 읽고 보고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소유까지 할 수 있지만 무용은 공연이 끝나는 순간 사라지기에 그런 모든 것들이 불가능하다. 보존을 목적으로 촬영한다 해도 무용의 입체성을 평면 화면에 재현할 수 없다. 재현은커녕 무용이 지닌 미학을 오히려 훼손한다. 무용은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 예술이다. 사라짐은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K에게 무용은 사라짐과 그리움의 순환과 축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이었다.

2009년 6월 빔 벤더스 감독이 피나 바우슈의 무용세계를 재현하기 위해 3D 촬영 준비작업을 마쳤다는 보도가 나왔을 때 K는 상반된 두 감정에 사로잡혔다. 역사적 현실에 대한 독창적 시선과 영상의 미학적 색채를 갖춘 빔 벤더스가 피나 바우슈 작품을 영화화한다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호기심과, 그 영화가 현장성이라는 무용의 독자적 존재성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힐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빔 벤더스의 영화화 작업은 1985년 피나 바우슈의 작품이 그에게 불러일으킨 예술적 충격에서 싹텄다. 그는 무용의 현장성을 최대한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크린이라는 평면 공간과 무대라는 입체 공간을 잇는 다리를 찾아야 했는데, 무용과 영화 사이에 가로놓인 근원적 벽 때문에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 변화가 온 것은 22년이 지난 2007년 5월, 빔 벤더스가 록밴드 U2의 콘서트 실황을 3D 형식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U2 3D」를 보게 되면서였다. 3D가 평면 공간과 입체 공간을 연결하는 마법의 다리임을 직감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3D 기술은 무용수의 움직임이 단편적으로 끊어지는 부자연스러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빔 벤더스에게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런 곡절을 겪으며 마침내 테스트 촬영 일정이 확정되자 믿을 수 없는 비보가 전해졌다. 피나 바우슈의 돌연한 죽음이었다. 지독한 애연가였던 피나 바우슈는 폐암 진단을 받은 지 5일 후 숨을 거두었다. 테스트 촬영을 이틀 앞둔 2009년 6월 30일이었다. 그녀 없이는 영화를 완성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의미한 작업이라고까지 생각한 빔 벤더스는 제작 중단을 결정했다. 그 결정은 애도를 마친 부퍼탈 탄츠테아터 무용단원들이 빔 벤더스에게 영화를 완성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면서 철회되었다. 무용단원들은 영화가 피나 바우슈의 영전에 바치는 훌륭한 헌정이 되리라 생각했고, 빔 벤더스는 그들의 생각에 공감한 것이었다. 그런 상황의 변화들을 K는 줄곧 양가적 감정으로 지켜보았다.

 

 

2

 

K가 영화관을 나온 것은 영화가 시작된 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라운지 창가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다가 눈을 감거나 시선을 창밖에 두곤 했다. 얼마 후 그곳을 나와 거리에 우두커니 섰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주머니를 뒤적였다. 손에 잡히는 게 없자 가방 안을 살폈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체안경을 찾고 있었다. 관람 후 반환해야 하는데 상영 도중에 나와서인지 회수하는 직원이 없었던데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상태여서 미처 돌려주지 못했다. 라운지 창가 테이블에 두고 왔거나 어딘가에 떨어뜨린 것 같았다.

3D 영화를 보면 눈이 빨리 피곤해지고 심한 경우 두통까지 난다고 들어 영화 시작 직전에 입체안경을 썼다. 조금 후 K는 당황하기 시작했는데, 입체성은커녕 영상이 겹치면서 화면 전체가 흐리게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가 지속되자 안경에 하자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불량품이 하필이면 자신에게 온 것을 원망하면서 객석의 좁은 틈을 비집고 나왔다. 다행히 영화관 직원은 K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다른 안경을 주었다. 급히 자리에 돌아와 설레는 마음으로 새 안경을 썼으나 화면 상태가 달라지지 않아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거리에 우두커니 선 K 앞에 택시 한대가 섰다. 택시를 탄 그는 기사가 목적지를 묻자 우물쭈물했다. 어딘가로 가야만 할 것 같아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채 일단 택시를 탄 것이었다. K는 머뭇거리는 목소리로 앞으로 쭉 가라고 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이었다.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택시가 세번째 교차로를 지날 때였다. K는 도서관에 가자고 말했다. 어떤 도서관이냐는 기사의 물음에 남산도서관이라고 대답했다. 얼마 후 택시는 남산도서관 앞에 섰다. 택시에서 내리니 숲의 싱그러운 공기가 뺨에 닿았다. 도서관 계단을 오를 때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에 나오는 도서관 장면이 생각났다.

천사는 베를린 주립도서관 계단을 힘겹게 오르는 한 노인을 본다. 노인의 이름은 호머다. 서사시인 호머를 표상하는 노인은 계단 난간에 기대어 “말해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세상 끝으로 내몰린 이야기꾼에 대해”라고 중얼거린다. 계단을 다시 오르면서 “한때 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이젠 내 책을 읽게 되어 더이상 모이지 않음으로써 서로를 모르게 되었다”고 읊조리고는 기진한 모습으로 계단 마루의 의자에 앉아 “이젠 난 늙고 목소리마저 시들어 이야기를 해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기도 소리처럼 들린다”고 한탄한다.

천사는 호머 노인의 마음속 말을 듣고 있다. 도서관은 침묵의 공간이지만 천사에게는 소란스러운 공간이다. 책 읽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침묵의 소리가 천사의 귀에는 환히 들리기 때문이다.

K가 영화관을 나와 휴대폰에서 검색한 것은 3D 영화의 원리였다.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이유가 안경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왼쪽 눈 때문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 것이었다. 사람은 두개의 눈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 두 눈에 각각 맺히는 상은 서로 위치가 다르다는 것, 뇌는 두개의 시각 정보를 하나로 융합해 대상의 입체감을 높인다는 것, 시각의 이러한 원리를 촬영 편집 영사 관람에 적용해 입체시를 구현하는 것이 3D 영화라고 쓰여 있었다.

K가 왼쪽 눈의 실명을 안 것은 초등학교 입학 후 시력검사를 받으면서였다. 왼쪽 눈을 가렸을 때는 시력검사표가 잘 보였지만 오른쪽 눈을 가리자 앞이 캄캄해졌다. 다음 날 아이는 부모와 함께 안과로 갔다. 의사는 검안기로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더니 눈 수술을 한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아주 어렸을 때 했다는 부모의 대답에 의사는 그때 사고가 난 것 같다면서 왼쪽 눈의 시신경이 끊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날 밤 아이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세상을 한 눈으로 보는 것과 두 눈으로 보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들이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지만 그동안 세상을 반쪽만 보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산술적 생각이었지만, 산술이기에 명료하게 다가왔다. 아이는 슬펐다. 자신이 결핍된 존재라는 사실이 불러일으키는 슬픔이었다. 그 슬픔에 위로가 된 것은 할머니의 말이었다. 할머니는 아이에게 “부처님이 네가 지닌 명대로 살도록 하시려고 왼쪽 눈을 가져가셨다”고 애틋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의 믿음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고, 손자를 위로하려고 지어낸 말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두가지가 섞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왼쪽 눈의 실명을 몰랐던 이유는 실명 당시 불편을 느끼기에 너무 어렸고, 시간이 지나면서 한쪽 눈으로 보는 것에 적응해갔기 때문으로 여겨졌다. 불편은 몇년 후 나타났다. 왼쪽 안구 주변의 근육 신경에 이상이 생기면서 사시가 된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었다. 주위에서 눈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자 아이는 가능한 한 자신의 눈을 숨기려 했다. 눈을 숨긴다는 것은 상대의 시선을 피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음을 나누려면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아이는 고립되면서 내면이 어두워져갔다. 그런 상황에서도 왼쪽 눈의 실명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숨겨야 할 사실이 되어버렸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할머니의 말이 커다란 역할을 한 것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 10월 어느날 K는 도서관 청소를 하게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도서관을 맡고 있어 반 학생들이 청소에 종종 동원되었다. 맡은 청소를 끝내자 딱히 할 일이 없어 책을 뒤적거렸다. 제목과 저자 이름을 본 후 페이지를 설렁설렁 넘기면서 눈에 들어오는 글자들을 쓱 읽고 서가에 다시 꽂았다. 그 사진을 본 것은 아홉번째 뽑은 책에서였다. 표지에 있는 저자 사진이 시선에 들어오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왼쪽 눈동자가 흰자위 중앙에 있음에도 오른쪽 눈동자는 흰자위 오른쪽 끝에 있어 금방이라도 안구 바깥으로 뛰쳐나갈 것 같았다.

도서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잿빛에 싸인 풍경에 색채가 느껴졌다. 사시의 작가가 일으킨 변화였다. 눈동자가 안구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한 과격한 치우침으로 얼굴 전체를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작가의 오른쪽 눈에 비해 K의 왼쪽 눈동자의 치우침은 온건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다.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했다.”

사시의 작가가 쓴 저 문장을 읽었을 때 K는 자신의 왼쪽 눈에 고인 어둠에서 빛의 뒤척임을 느꼈다. 그 느낌은 타인으로부터 영원히 거절당하리라는 예감에 처음으로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세계는 내 발밑에 층층이 겹쳐 있었고, 모든 사물들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청했다. 사물에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 사물을 창조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그것을 소유하는 행위다. 이 근원적 환상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어둠의 심연에서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K는 순간적으로 사물을 창조하고 소유하는 사시의 작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택시 안에서 떠오른 얼굴은 사시의 작가였다.

 

 

3

 

“사시인 사람은 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경우가 많다. 양쪽 눈에 비치는 모습들이 차이가 너무 커 뇌가 하나로 융합할 수 없으므로 한쪽 모습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을 읽던 K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사시의 작가도 자신처럼 한 눈으로만 세상을 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1980년 4월 사시의 작가가 세상을 떠났을 때 K는 육신의 무상함과 언어의 영원성을 생각하며 그에게 외롭고 슬픈 작별인사를 건넸다.

“사람은 입체시를 통해 세상을 깊이있게 바라본다. 한 눈으로만 보면 사물이 갖는 고유한 입체적 공간을 지각할 수 없는데다,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의 부피를 느끼지 못해 세상이 TV 화면처럼 수축된 모습으로 보인다.”

책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보았다. 도서관 창 너머 남산의 푸른 나무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저 풍경이 TV 화면 속 풍경과 다를 바 없다는 책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그동안 한쪽 눈으로만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떤 결함을 짊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고 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충격 속에서 의문이 일었다. 눈에 관한 기초지식인 입체시를 왜 여태껏 몰랐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체시를 배운 기억이 없었다. 실명으로 인한 자의식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외면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바드대학 신경생물학자 마거릿 리빙스턴과 베빌 콘웨이는 2004년 뉴잉글랜드 의학저널 편집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렘브란트 자화상을 조사한 결과 이 화가가 극심한 외사시로 인한 입체맹이었다’고 하면서 ‘어떤 화가에게는 입체맹이 장애가 아니고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썼다.”

K의 눈이 커졌다가 스르르 감겼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노인의 얼굴이었다. 윤곽이 분명치 않아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한 노인의 적황색 얼굴이 어둠에 떠 있었다.

노인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도서관에서 미술도록을 뒤적이면서였다. 기울어진 햇살에 잠긴 창가에 앉아 그림을 들여다보며 몽롱한 공상에 빠져 있었다. 도서관은 고독과 추위에 에워싸인 교실과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책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K에게 고독과 추위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생각으로만 볼 수 있는, 공기의 밀도가 높아 교실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 그리하여 왼쪽 눈의 어둠이 빛으로 채워지는 세계였다.

공상에서 깨어난 것은 도록에 노인이 나타나면서였다. 어둠을 등지고 구부정한 자세로 고개를 왼쪽으로 약간 틀어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보며 웃음 짓는 노인의 표정이 미묘했는데, K의 시선은 노인의 오른쪽 눈에 쏠려 있었다. 사시인데다 눈빛이 죽어 있어 시력을 상실한 것처럼 보였다. 그 그림이 렘브란트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화상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노인의 주름투성이 얼굴이 추한데다, 도록에 실린 다른 세점의 자화상들과 느낌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그 자화상의 또다른 특이성은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를 그림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점이었다. 그림의 제목이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인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니까 노인은 제욱시스이면서 렘브란트였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노인에게 있는 사시가 도록에 실린 다른 세점의 자화상에는 없다는 사실이었다.

렘브란트가 스물한살 이후 거의 매년 자화상을 그렸음을 알게 된 K는 그날 이후 학교 도서관에서는 볼 수 없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찾으려 다른 도서관들을 돌아다녔다. 사시의 자화상이 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좀처럼 발견되지 않았다. 사시인 듯 보이는 자화상을 찾긴 했지만 누군가가 사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반박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다 찾은 것이 렘브란트가 스물다섯살 때 그린 자화상이었다. 오른쪽 눈동자가 바깥으로 치우쳐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명료한 외사시였다. 그 자화상을 본 순간 K는 렘브란트가 분명 사시임을 직감하면서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에 대한 새로운 질문에 사로잡혔다.

스물다섯살의 자화상은 렘브란트가 화가로서 자신감이 넘쳐흐르던 시기의 작품으로 얼굴에 나타나는 충일한 젊음 때문에 사시가 그다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얼굴을 개성적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의 사시는 전혀 다르다. 렘브란트가 모든 것을 잃고 궁핍과 고독 속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기척을 느끼고 있을 때 그린 자화상으로, 죽음은 오른쪽 눈에서뿐만 아니라 입가의 웃음에도 고여 있다.

어느날 주름투성이 노파가 제욱시스를 찾아와 자신을 모델로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다. 고객의 청을 받아들인 제욱시스는 그림을 그리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고 웃음을 멈추지 못해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 제욱시스를 렘브란트는 왜 자신의 자화상 속으로 끌어들였을까? 제욱시스의 웃음에 깃든 죽음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컸다. 아이 셋과 부인 사스키아의 죽음, 이후 부인 역할을 한 여인의 잇따른 죽음을 겪은 것도 모자라 첫 부인의 아이들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아들 티투스, 렘브란트가 그린 초상화 가운데 유일하게 고요히 빛나는 미소를 지닌 티투스의 죽음까지 겪어야 했던 렘브란트에게 남아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제욱시스의 웃음은 죽음 직전의 웃음이다. 죽음이 이미 스며든 웃음일 수도 있고, 죽음을 직관하고 삶 전체를 향해 짓는 웃음일 수도 있다. 그 웃음은 제욱시스로 변신한 렘브란트의 웃음이기도 하다. 그런 웃음 앞에서 자신의 사시를 숨긴다는 것 자체가 덧없는 행위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K는 렘브란트의 초상화 「호머」를 다시 보았다.

맹인으로 알려진 서사시인 호머의 초상화는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보다 몇년 앞서 그려졌다. 그림 속 호머의 왼쪽 눈은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비교적 명료하게 보이는데, 눈동자에 고인 노란 빛에서 맹인의 눈이 느껴진다. 제욱시스의 오른쪽 눈동자에도 그런 노란빛이 고여 있다. K에게는 호머와 제욱시스의 오른쪽 눈이 똑같이 보였다. 그래서 제욱시스로 변신한 렘브란트가 자신의 오른쪽 눈에 호머의 눈을 집어넣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 속 얼굴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했지만 노란빛이 고인 오른쪽 눈만은 거기에 영원히 붙박여 있을 것 같았다.

 

 

4

 

K가 사시에서 벗어난 것은 대학 입학을 앞둔 겨울이었다. 왼쪽 눈의 근육 수술을 받아 안구가 제대로 움직이게 된 것이었다. 아들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이 사시 탓인 줄 알고 있었던 부모는 궁핍한 살림살이로 오랫동안 수술비 마련에 애를 태워야 했다. 부모의 그런 마음과 달리 K는 수술에 관심이 없었다. 사시의 작가와 마주친 후 고통의 중심이었던 사시가 존재의 중심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시를 견디는 것은 존재의 중심을 견디는 것이었다. 사시의 작가가 평생을 견딘 것처럼 K도 기꺼이 견디리라 다짐했다.

아버지에게 수술 이야기를 들었을 때 K의 첫 감정은 존재의 중심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대한 당혹스러움이었다. 그런 감정에 죄책감이 든 것은 “그동안 네가 겪은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하면서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글썽이는 어머니를 보면서였다. 아버지가 “그동안 의술이 많이 발달해 수술 결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면서 환한 표정을 지었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런 두분에게 ‘사시가 존재의 중심’이라는 말이 얼마나 기이하게 들릴까, 생각하면 입을 뗄 수조차 없었다. K는 수술대에 누워 사시 작가의 영원한 친구 니장을 생각했다. 열여섯살 때 학교에서 만난 두 소년은 똑같이 작가의 꿈을 품고 있었다.

“중키에 검은 머리였던 니장은 나처럼 사팔뜨기였는데 눈동자 방향은 나와 반대였다. 나의 사시는 눈동자가 바깥으로 갈라져 내 얼굴을 황무지처럼 보이게 하는데, 니장의 눈동자는 한곳으로 모여 그가 우리를 주의해 바라볼 때조차도 방심한 듯한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사시의 작가가 쓴 글을 읽었을 때 부러움과 함께 가슴이 쓰라렸다. K는 ‘나에게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수술대에 누워 있다는 게 가능할까?’ 하고 자문했다.

수술은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 짧은 잠을 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수술 결과는 무척 좋았다. 거울에 비친 두 눈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시는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수술을 늦게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말대로 그 세월만큼 의술이 발전했을 테니까.

사시는 사라졌지만 왼쪽 눈의 어둠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시는 왼쪽 눈의 어둠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사시가 존재의 중심을 나타내는 표징이라면 왼쪽 눈의 어둠은 존재의 중심 자체이다. 그러니까 존재의 중심임을 나타내는 표징만 사라졌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사시에서 벗어난 삶에 희망이 움텄다. 하지만 희망 속에 깊은 함정이 있다는 사실을 K는 까맣게 몰랐다. 사시였을 적에는 사람들이 K의 왼쪽 눈에 어떤 결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수술로 눈의 외양이 멀쩡해진 후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됐다. 이 차이를 K는 인식하지 못했다. 그것은 예리한 가시가 무심히 빛나는, 지독히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인 함정이었다.

K가 자신의 왼쪽에 있는 이와 대화하려면 오른쪽 눈으로 그를 보아야 하기에 고개를 왼쪽으로 과도하게 돌려야 한다. 그런 비정상적 시선이 상대에게는 경멸하는 모습으로 비친다는 사실을 K는 몰랐다. 대화 도중 상대가 이유 없이 벌컥 화를 내고, 평소 친밀하게 지내던 이가 갑자기 연락을 끊어버리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그 원인이 왼쪽 눈에 있다는 사실을 K는 너무 오랫동안 깨닫지 못했다.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Q였다. 그렇다고 해서 깨달음이 Q로 인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오래전부터 작고 희미한 인식의 조각들이 조금씩 쌓여 차츰 일정한 형태를 이루면서 깨달음이 형성된 것 같았다. 그런 과정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왼쪽 눈을 향한 마음에 맹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불가능하지만은 않았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누구에게든 마음에 맹점이 있다고 K는 믿었다. 맹점 앞에서 이성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K가 지닌 맹점에서 가장 무서운 점은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를 입힌다는 사실을 모르는 데에 있었다. 그 상처가 가장 깊고 아프게 돌아온 것은 Q에게서였다.

Q를 만나기 전 그의 무용 공연을 먼저 보았다. 베를린의 여러 무용단에서 남자 무용수로 7년간 활동하는 동안 처음 가진 국내 리사이틀 무대였다. 무용계의 관심이 Q에게 쏠린 것은 그의 춤이 독일에서 높이 평가받는데다 남자 무용수의 리사이틀이 여자 무용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드물기 때문이었다.

공연이 끝난 다음 날 무용 전문지가 마련한 자리에서 K는 Q와 대담했다. 대담 내용과 무용평이 실린 잡지가 발행되자 Q의 초대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그 자리에서 Q는 K의 무용평 가운데 ‘몸의 움직임이 조형하는 공간이 회화적이어서 그림으로 응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라는 문장을 읽고 자신의 춤이 그림으로 수렴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고 말했다. Q의 말에 K는 움직임의 예술인 무용을 부동성의 예술인 회화를 보듯이 한다는 빈정거림을 주위에서 더러 듣곤 했는데 오히려 기뻤다고 하니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라고 답했다.

세번째 만남은 국립극장 객석에서 우연히 마주침으로써 이루어졌다. 관람 후 남산을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Q가 남산타워가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베를린 위의 하늘’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아느냐고 물었다. 처음 듣는 영화라고 하자 Q는 독일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6년 전인 1987년에 만든 영화로 독일에서는 그해 10월 개봉했는데, 다음 주 서울에서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제목으로 상영된다고 했다. 6년이나 지나서 상영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는 K의 물음에 Q는 자신도 의아했으나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웠다고 하면서 베를린에서 보았지만 서울에서 한번 더 보고 싶다고 말했다. K는 「파리 텍사스」의 감독이 베를린의 천사를 끌어들여 어떤 영화를 만들었는지 무척 궁금하다면서 빙긋 웃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두 사람은 영화관 앞에서 네번째 만남을 가졌다.

 

 

5

 

영화관을 나오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비에 젖은 거리를 물끄러미 보던 Q가 위스키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비 오는 저녁에 어울릴 듯한 술이라는 K의 대답에 Q는 자신의 숙소에 괜찮은 위스키가 있다고 했다. K가 머뭇거리자 걸어가도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면서 K의 팔을 끌었다. Q의 숙소는 근처의 오래된 상가건물 3층에 있었다. 2층까지 상가이고 3층부터는 거주공간이라 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원룸 구조의 실내가 무척 넓었다. 창에 드리운 검은 커튼과 벽에 걸린 흑백 톤의 사진들, 턴테이블과 LP판,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책장과 크고 길쭉한 원목 책상, 간이침대와 작은 주방이 시선에 들어왔다.

“사진 하는 친구의 작업장입니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쓰라고 내주었지요. 그 친구의 작업장이 다른 데 또 있거든요.”

“언제 돌아가실 건가요?”

“한달 예정으로 왔는데 벌써 반이 지났네요.”

Q의 얼굴에 안타까운 표정이 어렸다.

“오랜만에 오셨으니 한달이 너무 짧겠군요.”

Q는 어렴풋이 웃으며 음식 준비할 동안 사진 구경을 하라면서 주방으로 갔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그가 뜨거운 수프를 식탁에 놓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즐겨 먹는 단호박수프라면서 비가 오거나 몸이 으슬으슬할 때 이걸 먹으면 금방 따뜻해진다고 했다. 수프 옆에는 싱글몰트 위스키와 훈제연어가 있었다.

“걸어오는 동안 생각에 잠겨 계시던데 무얼 생각하셨는지요.”

Q는 위스키를 따르며 물었다.

“도서관을 생각했어요.”

“영화에 나오는 베를린 주립도서관 말이에요?”

“거기가 베를린 주립도서관이에요?”

“몇번 가본 곳이라 금방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왜 도서관이죠?”

“특별한 공간이니까요.”

“왜요?”

“시를 쓰게 했거든요.”

K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군요. 언제부터 특별한 공간이 된 거예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어요. 영화를 보며 도서관 책상에 앉아 있는 열여섯살 소년을 떠올렸지만, 그런 소년을 바라보며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천사를 상상하니 기분이 이상해지더군요. 영화에서는 열여섯살 소년 대신 호머 노인이 나오지만.”

렘브란트의 「호머」가 떠올랐다. 노란빛이 고인 오른쪽 눈이 어렴풋이 보였다.

“선생님의 시에 불빛이 희미하게 배어 있는 이유가 도서관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Q는 중얼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빛이라면……”

“내면의 캄캄한 공간을 밝히는 불빛 말이에요.”

사시의 작가가 쓴 문장을 읽으며 왼쪽 눈에 고인 어둠에서 빛의 뒤척임을 느낀 순간이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마음으로 느꼈던 빛이 Q씨가 말하신 불빛에 해당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비슷하다는 느낌은 드네요. 그 빛이 삶의 어둠을 밝혀주었으니까요.”

“도서관 시작 장면에서 저도 소년 시절을 떠올렸습니다.”

Q의 말에 K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카메라가 도서관 천장에서 천천히 내려와 책 읽는 사람들을 비추는 동안 그들의 책 읽는 소리들이 들려오지요. 목소리가 여럿이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갑자기 한 여성의 독일어 소리가 또렷이 들려오잖아요.”

“아, 생각나요. 그런데 자막이 안 나와 무슨 소린지 모르겠더군요.”

“발터 벤야민은 1921년 파울 클레의 수채화 「새로운 천사」를 구입했다,라고 했어요. 베를린에서 영화를 보았을 때 그 목소리에 깜짝 놀랐습니다.”

“왜요?”

“당시 저는 벤야민이 「새로운 천사」를 구입한 사실과 「새로운 천사」를 역사의 천사로 해석한 사실은 물론, 벤야민이 탄생시킨 역사의 천사가 「베를린 천사의 시」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벤야민 때문에 놀랄 이유는 없지요. 제가 놀란 건 파울 클레 때문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미술반이었는데, 미술선생님이 파울 클레의 그림을 자주 보여주셨어요. 선생님이 파울 클레를 좋아하셨거든요. 「새로운 천사」도 그때 보았습니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하신 이유가 거기에 있나보군요.”

“미술선생님을 생각하면 늘 그날이 떠올라요. 그날 선생님은 왜 저를 거기로 데려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Q의 얼굴에 슬픔이 비쳤다.

“매섭게 추운 날이었습니다. 선생님이 그림보다 더 재미있는 걸 보러 가자고 하시더군요. 전 무엇을 보는지도 모르고 따라갔는데 피나 바우슈의 첫 한국 무대였습니다.”

“「봄의 제전」을 보셨어요?”

K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Q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난 행운을 누리셨군요.”

1979년 2월 처음 한국을 찾은 피나 바우슈가 세종문화회관 무대로 가져온 작품은 「봄의 제전」이었다. 그 공연이 기념비적이었던 것은 무용가로서 절정의 시기였던 38세의 피나 바우슈가 제전의 제물로 바쳐지는 희생양 역을 맡아 죽음의 춤을 추었기 때문이다.

“붉은 천 위에 잠든 여자 무용수가 깨어나는 시작 장면의 아름다움은 좀처럼 잊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둠 저쪽에서 검은 흙이 깔린 무대로 꿈처럼 나타나는 여자 무용수들의 모습과 움직임은……”

Q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꿈속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느낌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은 「봄의 제전」이 품고 있는 희생제의의 플롯을 감지하면서였습니다. 남자 무용수들이 추는 춤의 목적이 여자 무용수들 가운데 희생양을 고르는 것에 있음을 알게 되자 자연히 희생양의 관점에서 춤을 바라보게 되더군요. 희생양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여자 무용수 모두가 희생양으로 보였습니다. 집단으로 움직이는 남자 무용수와 달리 끊임없이 흩어지면서 작은 집단으로 혹은 홀로 움직이는 여자 무용수의 모습이 눈에 아프게 들어왔습니다. 죽음에 쫓겨 무채색 옷이 검은 흙으로 범벅이 된 그들 가운데 마침내 한 여자 무용수가 희생양으로 선택되면서 새로운 춤이 시작되었습니다. 죽음에 이를 때까지 멈출 수 없는 춤이 말이에요.”

Q의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죽음과 함께 춤을 추는 무용수의 고통이 눈에 환히 보였습니다. 너무나 환히 보여 손으로 만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금 후에는 제가 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숨결이 죽음의 춤을 추고 있는 여자 무용수의 숨결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일종의 몽환이었지요. 몽환 속에서 제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습니다. 무대의 검은 흙 위에서 죽음의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만은 않았습니다. 춤 속에 작은 불이 있었거든요. 죽음의 캄캄함을 밝히는. 그때 전 까맣게 몰랐습니다. 곧 닥쳐올 선생님의 죽음을.”

Q는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그날이 토요일이라 다다음 날 학교에 갔는데 선생님이 결근하셔서 아프신가,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도 안 오셔서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 집을 찾았지요. 가정집 2층 방에 하숙하셨는데 2층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저녁에 몰래 집을 나와 다시 가보았지만 선생님 방의 불은 꺼져 있었어요. 캄캄한 창이 불안하고 무서웠습니다. 선생님이 인근 야산에서 나무에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자살이 알려지면서 학생들 사이로 여러가지 말들이 떠돌았지만 그 내용을 전혀 몰랐습니다. 낮은 목소리로 뭐라고 이야기하다가 제가 나타나면 입을 닫았으니까요. 그 말을 알려준 이는 미술반 학우였습니다. 선생님은 동성애자이며 그래서 저를 자주 선생님의 하숙집으로 불러들였다는 말이었습니다.”

위스키를 마시는 그의 얼굴이 창백했다.

“선생님의 자살로 혼란과 충격에 빠져 있던 저에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선생님과 저의 관계에 대한 비난과 경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사랑이라는 말이 지닌 뜻 그대로 저를 사랑하셨습니다. 저에게는 과분하고 벅찬 사랑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사랑을 통해 그전까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저의 존재 가치를 구체적으로 느꼈거든요. 그것이 얼마나 제 마음을 고양했는지를 생각하면 주위의 비난과 경멸이 너무 터무니없어 제 살을 헤집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이 잘못 알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려 했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입에서 더 큰 비난과 경멸이 쏟아져 나오더군요. 비역질이라는 낯선 말을 들은 것은 그즈음이었습니다. 제가 표현한 사랑이라는 말을 누군가가 비역질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그 뜻을 알게 되자 제 안에서 들끓는 수많은 말들을 토해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사랑하시는 동안 육체적으로 거북하거나 불쾌한 행위를 하신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제가 자퇴한 것은 말에 대한 무서움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이 비역질로 둔갑하는 말이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의 긴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선생님의 죽음 이후 저는 「봄의 제전」을 끊임없이 생각했습니다. 선생님이 어떤 마음으로 저를 공연에 데려가셨는지, 그때 자살을 이미 결심하신 상태인지, 아니면 그후에 하셨는지 저로서는 알 수 없었습니다.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선생님의 죽음이 「봄의 제전」에서 보았던 죽음의 춤으로 섞여들면서 검은 흙 위에서 죽음을 껴안고 춤을 추는 무용수의 모습이 몽환처럼 떠오르곤 했습니다. 무용수가 선생님인 듯하면서 저인 듯했고, 때로는 선생님과 제가 섞인 듯했습니다. 누구처럼 보이든 춤 속에 언제나 작은 불이 있었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 듯 목소리가 잠겼다.

“베를린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위로가 된 것은 독일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떤 말이 들려와도 뜻을 모르니 상처 입을 일이 없었으니까요. 제가 연극에 빠져든 이유도 배우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뜻을 알지 못하니 목소리 자체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고저와 장단, 색채와 결들이 참으로 다채로웠습니다. 그 다채로움을 즐기다보니 목소리에 따라 변화하는 배우의 얼굴 표정과 몸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일상 속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움직임이 얼마나 억압받고 있는지, 그 억압이 삶과 세상을 얼마나 잿빛으로 만드는지 절로 깨달아졌습니다. 그 깨달음이 불러일으킨 자유의 감각은 제 안에 웅크리고 있던 무용에의 열정을 자극하면서 바깥으로 분출시켰습니다. 그렇게 연극을 보는 동안 언제부터인가 소리의 뜻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하더군요. 무척 기뻤습니다. 목소리에 숨어 있던 작은 씨앗을 본 느낌이라고 할까요. 말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거지요.”

트라우마라고 말할 때 Q의 얼굴에 고통의 표정이 스쳤다.

“무대로 들어가면 일상적 몸과 전혀 다른 예술적 몸으로 변신하는 배우들을 관찰하는 동안 「봄의 제전」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몸의 변화가 자주 떠올랐습니다. 당시 전 무용가도 그런 변신 과정을 겪는다는 걸 제대로 체득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제 춤의 기원이 검은 흙 위에서 추는 죽음의 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는 데 연극이 커다란 역할을 했습니다.”

“연극이 무용과 무척 가까운 예술이긴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네요.”

“제가 추는 모든 춤이 죽음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연극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춤이 죽음에서 자유로운 것은 춤 속에 작은 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Q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그 불이 저에겐……”

K는 Q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춤의 영혼처럼 느껴지는군요.”

그의 말에 Q는 희미하게 웃었다.

 

Q의 숙소에서 나왔을 때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취기로 머릿속이 몽롱했다. 위스키 한병을 다 마시고 맥주까지 마셨으니 그럴 만했다. 불빛 흐릿한 복도의 열린 창으로 빗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복도라는 공간이 일으키는 공명 때문인지 안에서 들었던 소리와 느낌이 달랐다. 마음을 먼 곳으로 끌고 가는 듯한 그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데 왼쪽 어깨에 따뜻한 감촉이 느껴졌다. Q의 손이었다. K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감촉에 따른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Q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황한 K는 주위를 돌아보았으나 복도에는 그들의 그림자밖에 없었다. Q는 한마디 말도 없이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숙소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K는 닫힌 문을 멍하니 보았다.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집히는 것이 없었다. 초인종을 눌러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거절당할 것 같은 두려움에 그러지 못했다. 서로가 맑은 정신에서 이야기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고 애써 생각하며 돌아섰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내내 Q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다음 날 오전 11시 무렵 전화를 했지만 Q는 받지 않았다. 저녁 7시 무렵 다시 전화했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10시 조금 넘어 한 전화에도 벨소리만 들었다. 그날 밤늦게 싱글몰트 위스키 한병을 사들고 Q의 숙소를 찾았다. 초인종을 여러차례 눌렀지만 기척이 없었다. 한동안 망설이다 통화가 되지 않아 숙소를 들렀다는 사실과 연락 바란다고 쓴 메모지를 문틈에 끼우고 돌아섰다. 메모를 남겼으니 연락은 하리라고 기대했으나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연락이 없었다. 불안과 괴로움 속에서 Q가 출국 전 환송행사를 가질 터이니 그때 오해를 풀면 된다고 마음을 달랬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세미나 자리에서 만난 무용계 인사가 Q의 출국을 아느냐고 물었다. 모른다고 하자 Q의 서울 공연에 안무를 맡은 이가 긴요한 일로 Q에게 전화했으나 결번이라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숙소를 찾아가니 다음 날 아침 베를린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출국 이유를 물었지만 납득할 수 있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한달 예정으로 왔는데 벌써 반이 지났다고 하면서 Q가 지었던 표정이 떠올랐다. 세미나가 진행되는 동안 그의 갑작스러운 출국에 대해 갖가지 생각을 다 했다. Q에게 세차례 전화했을 때는 결번이 아니었다. 전화 해지는 그후에 한 것이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무용계 인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동안 자신의 눈이 이상하게 보인 적은 없었느냐고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는 K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오래전부터 무용계 사람들로부터 그런 소리를 심심찮게 들었다면서, 몇몇 이들은 K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이 굳어진다고 했다.

 

 

6

 

K는 도서관을 나와 숲을 걸었다. 가을의 맑은 빛에 잠긴 숲은 고즈넉했다. 조금 전 도서관에서 들여다본 ‘3차원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책을 생각했다. 어린 시절부터 사시로 인해 입체시를 상실한 상태로 오랜 세월을 살아오다 오십대에 이르러 의료의 도움과 훈련으로 입체시를 획득한 미국의 생물학자가 쓴 책으로, 숲에 대한 시각적 느낌을 표현한 부분이 K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무들은 예전에 경험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둘러쌌다. 나무들 사이의 공간이 손에 만져질 듯 느껴졌다. 나무껍질의 무딘 톱니 모양과 이끼의 아플리케는 더 깊었고, 윤곽선은 더 분명했고, 색깔은 더 선명했다. 마치 내가 그전에 관찰했던 어떤 그림 속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았다.”

위의 글에 따르면 K는 숲에 들어와 있음에도 숲의 그림을 보고 있는 형국이 된다. 정말 그러한지 K의 감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책의 저자는 K와 같은 사람을 의식한 듯 “입체적으로 본다는 것은 그것을 경험하기 전까지 상상이 불가능하다”고 썼다. 원근과 명암 같은 단서를 통해 깊이감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는 있지만, 색깔 위치 형태 밝기 등의 다른 시각적 속성에서 입체적 깊이를 합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K는 쎄잔을 떠올렸다.

쎄잔은 입체적 깊이의 표현에 필수요소인 원근법은 물론 사물의 단일한 윤곽선도 무시하고 그림을 그려 당시 ‘병든 눈을 가진 화가’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쎄잔 사후 그의 그림에 대한 재평가가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는데, K가 주목한 것은 쎄잔의 위대성을 입체적 깊이에서 찾는 움직임이었다. 자꼬메띠는 쎄잔을 ‘입체적 깊이를 평생 추구한 화가’로 평가했다. 입체적 깊이를 두고 생전 평가와 사후 평가가 그렇게 충돌하는 것은 쎄잔의 시선이 3차원 세계 너머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쎄잔은 당대의 다른 화가와 달리 사물의 입체성을 구현하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표현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3차원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표현하려면 3차원을 넘어서는 감각이 요구된다. 이 지점에서 쎄잔이 원근법과 사물의 단일한 윤곽선을 버린 이유가 4차원적 감각을 획득하기 위한 것임을 알게 된다. 쎄잔의 그림 속 사물과 풍경에 나타나는 환영을 보이지 않는 세계의 심연으로 파고드는 4차원적 감각의 산물로 보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Q의 춤을 평하는 글에서 ‘몸의 움직임이 조형하는 공간이 회화적이어서 그림으로 응축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쓴 것은 그의 춤에서 4차원적 감각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K는 자신이 느낀 Q의 4차원적 감각에 대해 쓰고 싶었지만 쓰지 못했다. 무대라는 3차원의 세계에서 4차원의 세계로 도약하는 춤의 영혼 앞에서, 그 영혼이 파고드는 생명체의 심연과 심연이 불러일으키는 환영의 아득함 앞에서 그의 언어는 무력했다. 춤이 끝나는 순간 춤의 모든 것들이 사라진 곳에 유일하게 남은 춤의 기억을 헤집는 동안 언어는 휘어지고 끊어지고 너덜너덜해지고 부풀어 오르다 휘발되었다. 활자화되는 순간 틀 속에 고정되면서 부서지지 않는 물질로 변해버리는 언어로 Q의 4차원적 감각을 재현하려는 행위 자체가 무모하게 느껴졌다.

대담에서 Q가 ‘자신의 춤이 그림으로 수렴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뻤다’고 말했을 때 K는 Q의 4차원적 감각에 대해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나 말하지 못했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사시의 작가가 입체시를 상실했음에도 세계의 심연으로 파고드는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4차원적 감각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K로서는 자신의 언어가 3차원적 감각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Q의 돌연한 출국에 충격받은 K는 Q의 전화번호와 메일 주소, 베를린 거주지를 어렵게 알아냈다. 전화는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깊은 상처를 받은 그가 통화를 거절할 가능성이 있는데다, 통화가 이루어진다 해도 대면 없는 대화로 마음속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기 힘들 것 같았다. 그를 대면하려면 베를린으로 가야 하지만 스케줄 조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서 메일로 보낼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답신이 오지 않을 가능성에 대한 걱정이 고개를 치켜들어 베를린행 비행편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생각을 거듭한 결과 Q의 출국으로 인한 마음의 어둠에서 벗어나려면 베를린행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생각을 바꾸자 일정을 조정하는 어려움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면서 어두웠던 마음이 조금 밝아지는 듯했다. Q를 만나면 왼쪽 눈의 어둠은 물론 부끄러움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Q의 4차원적 감각에 대해 기꺼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Q의 죽음을 들은 것은 베를린행을 사흘 앞둔 날이었다. 아우토반에서 자동차 사고로 즉사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자동차의 길’을 뜻하는 아우토반은 무제한 속도 구간으로 유명한 독일의 고속도로로 추월은 좌측으로만 가능한데, Q는 2차선을 달리다 앞차를 추월하기 위해 1차선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고 했다.

K는 충격과 혼란 속에서 날짜를 되짚어보았다. Q의 출국 예정일이 6월 1일이었음에도 열흘 앞선 5월 22일 출국한 이유가 자신의 왼쪽 눈 때문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Q가 예정대로 6월 1일에 출국했다면 6월 4일 차를 몰고 아우토반으로 들어가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론이 K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 사흘 후 K는 베를린행 비행기를 탔다.

베를린의 화장장에는 가족 대표로 서울에서 온 Q의 사촌동생과 동료 무용단원, 평소 Q와 가까웠던 연극배우와 한인교포들이 참석했다. K는 사촌동생을 통해 Q의 노모가 서울 옥인동에 Q의 여동생이기도 한 딸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동생은 노모 때문에 베를린에 오지 못했다고 했다. K는 화장한 다음 날 유골을 갖고 서울로 떠나는 사촌동생과 동행했다. 공항에 Q의 노모와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동생의 얼굴에 Q의 표정이 보여 가슴이 에였다. 영결식은 노모가 다니는 성당에서 치러졌고, 유골은 Q의 부친이 묻힌 강원도 양구의 선산에 안치되었다. 주택가 근처 산자락에 위치한 선산은 쓸쓸하면서도 아늑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노모의 울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밤늦게 집에 들어온 K는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Q의 죽음을 안 후 열흘 동안 잠을 거의 못 잤다. 몸이 극도로 피로한데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불면은 베를린에서 더 심했다. 열흘 동안 무언가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끌려다니느라 Q의 죽음을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제대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주방 선반에 놓인 싱글몰트 위스키를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Q와 함께 마시려고 산 술이었는데 그의 죽음과 마주 보며 마실 줄은 까맣게 몰랐다.

K가 잠에서 깨어난 것은 갈증 때문이었다. 창으로 스며드는 새벽빛으로 거실이 어렴풋이 보였다. 탁자 위에 덩그렇게 놓인 빈 술병이 시선에 들어왔다. 소파에 쓰러져 잠이 든 것 같았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몸이 마비된 듯 손을 움직이는 것도 힘겨웠다. 이마가 불처럼 뜨거웠고 오한에 전신이 덜덜 떨렸다. 갈증을 참을 수 없어 소파에서 겨우 내려와 엉금엉금 기어 물을 마신 후 다시 엉금엉금 기어 침실로 들어가다 멈칫했다. 옷장 문이 열려 있었고, 옷들이 방바닥 여기저기 떨어져 있었다. 침대에 간신히 누워 어젯밤 일을 기억하려고 애를 썼지만 옷장 상황과 연결되는 일이 생각나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열이 치솟으며 혼수상태로 빠져들었다. 혼수상태가 길어지면서 뼈가 끊어질 듯한 통증과 관자놀이에 못이 박히는 듯한 서로 다른 통증들이 간헐적으로 일었고, 그때마다 몸은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경련으로 흔들렸다. 그런 상태가 엿새 동안 지속되었음에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통증이 끌고 가는 대로 끌려갔다. 이레째 되던 날 몸의 변화가 느껴졌다. 열이 가라앉고 깨어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통증이 둔화되고 있었다. 다음 날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게 되었고, 그다음 날은 과일을 조금 먹었다. 그동안 물 이외 먹은 것이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무척 달았다.

해 질 무렵 옷을 조금 두텁게 입고 처음으로 집 밖으로 나갔다. 어스름이 드리운 벤치에 앉아 저문 하늘을 우두커니 보았다. 어디선가 아이의 투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이상하게도 낯설게 느껴졌다. 새 한마리가 저문 하늘을 비껴 날고 있었다. 적막한 허공을 헤쳐나가는 새를 아득한 눈으로 보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어른거렸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너머 자동차 키를 손에 움켜쥐고 6월임에도 겨울옷을 찾아 옷장을 뒤지는 자신의 모습이 꿈속의 장면처럼 떠올랐다 스르르 사라졌다. 눈을 뜨니 새가 허공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자동차 키를 움켜쥔 이유는 짐작이 갔다. 하지만 겨울옷을 찾은 이유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만취 상태라 겨울로 착각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만취 상태가 불러일으킨 충동, Q의 육신이 차와 함께 으깨졌듯이 자신의 육신도 그렇게 으깨져야 한다는 불꽃같은 충동을 제어하기 위한 무의식적 행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지난 일주일 동안 겪었던 고통에 저항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해되었다. 자신의 왼쪽 눈으로 인해 Q가 겪었을 고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고통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7

 

숲 위의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남산타워가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Q의 모습이 떠올라 K의 가슴이 저렸다. Q가 세상을 떠난 지 19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불빛 흐릿한 복도에서 Q는 작별 혹은 다정함의 표현으로 K의 왼쪽 어깨에 손을 올렸을 뿐이고, K는 따뜻한 감촉에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지극히 일상적인 두 행위가 어떤 법칙의 작용으로 Q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 사무치게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질문을 거듭할수록 눈앞의 세계는 점점 더 캄캄해졌다. 그 캄캄함 속에서 유일한 위안은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을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몸의 일부가 어둠에 묻힌 채, 어둠에 묻히지 않는 몸도 곧 어둠에 묻힐 듯한 제욱시스를, 삶의 상처들로 이루어진 듯한 얼굴의 균열과 주름을,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삶과 죽음 모두를 잊은 듯한 웃음을, 빛이 사라진 사시의 오른쪽 눈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세계의 냉혹함, 그 가차 없는 비정에 대한 감각이 잠시나마 흐려지는 듯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 비가 내렸던 것 같기도 했고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빗소리를 울음소리로 들었거나 울음소리를 빗소리로 들었는지도 모른다. Q의 노모 울음소리는 종종 들려왔다. 꿈속에서, 꿈과 현실 사이에서, 나무 그림자 아래에서, 저문 하늘의 적막에서 귓속으로 가느다랗게 흘러들었다. 빗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들으며 「제욱시스로서의 자화상」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제욱시스의 오른쪽 눈에서 자신의 왼쪽 눈이 느껴졌다. 그 순간 K는 제욱시스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면서 삶을 허물어뜨리는 우연적이며 필연적인 운명의 파편에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제욱시스의 파편이면서 K의 파편이었지만 Q의 파편이기도 했다.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는 운명의 파편은 고통으로 이어져 있었다. Q의 고통은 자신을 경멸하는 K의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K에게 고백한 자신의 생애가 경멸당했으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K는 Q를 경멸하지 않았다. 경멸은커녕 춤의 영혼으로 다가가는 생의 서사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러니 Q의 고통에는 어떤 의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무의미한 고통이 Q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실이었다.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가 죽음이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K의 내면으로 새의 부리처럼 파고든 고통의 실체는 여기에 있었다.

K는 Q의 죽음을 고통을 통해 느꼈다. 고통을 거치지 않고서는 Q의 죽음에 이르지 못했다. 운명의 파편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되지 않듯 고통도 그랬다. Q의 고통인데도 자신의 고통처럼 느껴졌다. 자살충동은 대개 그 순간에 일었다. 자동차 키를 여러차례 손에 움켜쥐었지만 그때마다 주저앉은 것은 자신이 죽으면 자신 안에 숨 쉬고 있는 Q의 춤도 죽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Q는 죽었지만 K 안에 깃든 Q는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K는 춤을 추지 않는 Q를 상상할 수 없었다. 춤의 영혼을 지닌 자가 춤을 추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공연이 끝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춤의 형상들이 일상의 어느 순간 어둠에서 섬광처럼 떠오르곤 했다. 의식 저쪽에 잠겨 있던 기억이 알 수 없는 어떤 작용으로 현전한 것처럼 느껴졌다. 현전의 순간이 지나가면 어둠의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사라진 것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처음 본 Q의 춤이 그랬다. 그 춤이 눈부셨던 것은 현전의 장소가 왼쪽 눈이기 때문이었다. 왼쪽 눈의 어둠에서 Q의 춤은 섬광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지독한 그리움이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보면 춤은 세상 도처에서 끊임없이 피어나고 있음을, 그래서 춤의 무대가 세상 도처에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K 안에 숨 쉬고 있는 Q는 세월이 흐르면서 세상 도처에서 춤을 추는 존재로 변해갔다. 그렇게 변하는 과정에서 간혹 새와 사람 사이의 어떤 존재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럴 때마다 Q에게 하고 싶었던 말, 그가 사라짐으로써 마음에 간직할 수밖에 없었던 말이 야위어갔다.

Q의 죽음 이후 타인과 대화할 때 상대의 왼쪽에 앉으려고 노력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왼쪽에 앉을 수 없는 상황에 종종 맞닥뜨리는데다 다수의 모임에는 어쩔 수 없이 사람 사이에 앉아야 할 때가 잦았다. 그런 경우 왼쪽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고 대화하려고 애를 썼지만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눈의 시선이 상대의 얼굴에 닿곤 했다.

상처는 상처를 입은 사람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처는 에너지여서 다른 사람으로 옮겨가 다른 형태의 상처를 낳고, 그 상처가 또다른 형태의 상처를 낳는다. 그리하여 헤아릴 수 없는 상처들의 고리가 세상을 휘감는다. K는 ‘나도 모르게 저지른 죄가 이토록 크다’고 생각했다. 지난날을 떠올려보면 K의 면전에서 화를 낸 이들은 극소수였다. 그러니까 대부분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표현하지 않았거나 못한 채 K를 경원한 것이었다.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용서를 구할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