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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비평적 대화를 수행하는 섬세한 독해의 힘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문학과 정치’에 대한 단상」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등이 있음.

jwhyi@naver.com

 

 

 

최근 평단은 대화를 향한 열띤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올여름 ‘비평적 대화의 연속과 심화’를 기치로 걸고 혁신호를 꾸린 『자음과모음』은 이어지는 가을호에서도 “비평을 중심에 두고 여러 대화적 시도를 해보자는 방향성”1을 견지할 것임을 재확인했다. 이에 응답하듯 『문학과사회』는 가을호 하이픈 주제를 ‘대화-비평’으로 잡고 열한명의 비평가를 지면으로 초대해 다채로운 대화의 공간을 기획하기도 했다. 모처럼 펼쳐진 비평의 향연을 즐겁게 따라 읽으면서 발견한 의외의 사실이 하나 있다. 그건 오늘날 ‘비평적 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과거처럼 치열한 ‘논쟁’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에 펼쳐진 논쟁의 허와 실에 대한 비평 주체의 평가가 개입된 것일 수 있지만 “모종의 폭력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상을 조심스럽게 대하는”2 소극적 자세가 윤리적 태도로 여겨지면서 발생한 현상일 수도 있다.3

원인이 무엇이든 전통적으로 비평적 대화의 중핵에 놓여 있던 논쟁이 그 중심에서 밀려난 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비평적 대화에의 욕망이 새롭게 겨냥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플랫폼으로서의 문예지’라는 발상에서 드러나듯 그것은 다름 아닌 연결 그 자체이다. 이때 연결은 이메일을 통해 두 평론가 사이의 서신을 교환하는 기획(『자음과모음』의 ‘#시소’)에서 엿볼 수 있듯 일차적으로 비평가 사이의 연결을 의미하지만, 비평적 대화를 재구축하려는 시도가 단지 비평가들끼리의 접속 국면을 늘리는 것으로 시종하고 있는 건 아니다. 그 연결은 ‘메타비평’ 지면(『자음과모음』)의 기획에서 드러나듯 비평문과 비평문 사이의 연결도 상정한다. 그렇지만 하나의 비평문이 무기력한 자기독백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에 발생하는 비평문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앞선 비평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 논의로 끌어오는 또다른 비평가의 능동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결국 거기서도 연결의 노드(node)로서 비평가는 압도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비평적 대화 요청은 당면한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비평 주체의 활성화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익숙한 주관주의적 실천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평이 텍스트와 비평가 사이의 내재적 대화의 산물이라는 점을 떠올려본다면 사실 대화는 비평의 조건으로 언제나 선재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생산되는 텍스트와 비평가-독자가 그 텍스트를 읽고 의미화하는 구체적인 독해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양한 각도에서 초래된 비평의 위기에 맞서기 위해 비평이 마련할 수 있는 유일한 자구책이란 기실 구체적인 텍스트와 깊고 치열한 대화를 나눔으로써 비평을 읽고 쓰는 일의 쓸모를 스스로 입증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때 텍스트는 개별 작품만이 아니라 그것과 접속하고 있는 물리적 세계 일반으로 확장시켜 이해해야 한다.) 최근 출간된 정홍수 평론집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은 “작품과의 대화적 충실성”(564면)에 집중한 독해가 어떻게 비평적 대화를 풍부하게 생산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홍수 『가버릴 것들을 향한 사랑』(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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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수의 이번 평론집에 실린 글들은 서정인 황석영 윤흥길 최윤 같은 원로작가부터 은희경 윤대녕 정지아 등 중진을 거쳐 정지돈 김혜진 이서수와 같은 신진작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폭넓은 시간대를 아우르고 있다. 여기에 김윤식과 김종철의 비평적 의의를 탐사한 글과 필립 로스(Philip Roth)에 대한 문학적 헌사까지 더하면 다루는 주제와 공간의 넓이도 만만치 않은 셈이다. 천착하는 문학적 주제와 즐겨 구사하는 기법은 물론이고 이념과 세계관마저 상이한 작가들의 작품을 그때그때 검토한 글을 묶은 만큼 다소간의 편차와 내적 모순이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을 텐데 의외로 이 책에서는 그런 편차와 모순이 빚어내는 덜컹거림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그의 비평이 작품에 앞서 전제된 모종의 이론적 규준에서 출발하지 않고 유동하고 살아 있는 작품 자체의 활력에서 출발해 그 고유한 생명력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 힘입은 것으로 보인다.

작품을 치밀한 고려와 전략에 의해 구성된 대상으로 간주하고 객관적으로 접근하는 정홍수 비평의 특징은 이번 평론집에서도 역력하다. 여기서 그가 작품을 객관적으로 대한다는 말은 기계적인 중립 지대에 서서 주관적 감정을 배제한 채 작품을 바라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작품이 촉발하는 다채로운 감정에 그 자신을 활짝 열어놓고 기꺼이 즐긴다. 다만 자신에게 즐김을 촉발한 요인을 작품의 내적 구성 원리를 통해 객관적으로 해명하는 섬세한 분석을 가동시킨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가 문학에서 얻는 향유의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유와 상상력에 의해 반성된 쾌락의 성격을 띨 것이다.

이와 같은 객관적 거리감은 정홍수가 견지한 소설론의 소산이다. 그는 서정인의 『달궁』(1987~90년 출간, 개정합본판 최측의농간 2017)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평문 「삶, 말, 글의 섞임 그리고 전체를 향하여」에서 이렇게 쓴다. “소설은 자연이 아니며, 세계-현실 그 자체도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특별한 사용, 조직과 관계된 사유와 상상의 방식이며, 세계-현실을 정의하고 설명하는 길이다.”(47면) 언어의 특별한 사용을 근거로 소설을 여타의 에크리뛰르와 구별되는 담론적 구성물로 보는 그의 관점은 소설을 “‘말’이라는 기본 단위로 구성된 장르의 하나”4로 보았던 바흐찐(M. Bakhtin)의 소설론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소설이 곧 언어의 특별한 짜임이라면 작가가 사용하는 바늘과 실의 물성은 물론이고 손놀림의 정확함과 리듬이 빚어내는 효과가 무엇보다 중요해질 터, 그의 비평에서 언제나 시점, 화자, 수사를 둘러싼 세밀한 분석이 동반되는 이유의 일단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현란한 이론적 담론이 유행하는 오늘날 비평 풍경에서 정홍수가 수행하는 세밀한 문장/문체 분석은 얼핏 고루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각을 달리한다면 우리는 언어의 국소 단위에 천착하는 그의 분석을 통해 요즘 비평이 자주 몰각하는 작품에 대한 온전한 존중의 태도가 비평의 내적 깊이를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읽어낼 수도 있다. 김금희의 『경애의 마음』(창비 2018)에 자주 등장하는 “호흡을 길게 가져가는 문장”을 분석하면서 “이러한 긴 호흡의 문장이 잘 재현되지 않고 의미화하기 힘든 마음 혹은 정동의 기술과 관련하여 일정한 효과를 달성한 측면”(438~39면)이 있음을 설득력있게 드러내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문장 단위의 세밀한 분석은 편혜영의 『홀』(문학과지성사 2016)을 비평할 때도 빛을 발한다. 이 작품의 마지막 대목 몇 문장을 꼼꼼하게 읽어내면서 그 안에 “편혜영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와 “우리의 질문을 유발하는 덫”(206면)이 내재해 있음을 날카롭게 드러내는 대목이 그렇다. 작품을 이루는 아주 작은 요소에 착목하는 정홍수의 태도는 작품을 하나의 완결체로 간주하고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락하는 물신적 태도와 다르다. 오히려 그는 “소설의 물리적 한계”(130면)를 소설의 인식론적·존재론적 제약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소설의 한계가 소설이 현실에 대한 부정확하고 열등한 재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무기력한 인식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는 데에 정홍수 비평이 지닌 견실함이 있다. 그는 소설이 스스로를 그 한계 지점까지 밀어붙이는 창조적 작업을 통해 기꺼이 현실을 개방하는 열림의 수행성을 작동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개방성은 현실과 인간에 대한 이해를 확장하는 담론적 장치로서 소설에 내재한 고유한 역능인 동시에 소설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가 획득해내야 하는 실천적인 덕목이다. 작품 내부의 대화는 물론이고 작품 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는 정홍수의 소설론은 여기서 다시 바흐찐과 만난다. 바흐찐은 세계를 완결 짓는 단 하나의 단일한 진리가 있으며 그 자리에서 하나의 언어는 고정된 의미를 전달한다는 식의 생각에 단호히 반대했다. 정홍수에게 그것은 작품의 의미를 일의적으로 고정하는 소설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가 『달궁』의 작가와 「미조의 시대」(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은행나무 2023)의 작가가 공히 자유 간접 화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두 작품에서 “다성과 혼성의 언어”(303면)가 나타나고 있음을 논증할 때, 거기에는 “화자의 특권적 지위”(63면)에 의해 지배되는 소설이란 현실은 물론이고 미래에도 결코 열려 있을 수 없다는 분명한 비판을 품고 있는 것이다.

 

개방성과 더불어 정홍수의 글에서 주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개념이 전체성이다. 언뜻 두 개념은 대립하는 듯 보인다. 전체성이 현실의 파편들을 하나의 질서 아래 구성하는 구심력을 상기시킨다면 개방성은 그와 같은 구성적 질서화의 힘을 벗어나려는 자유로운 운동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홍수는 현실과 소설의 관계를 되물으며 서로 다른 방향성을 지닌 두 힘을 결합해낸다. 그에 따르면 작가는 즉자적인 현실에 “담론의 힘과 질서를 부여하여 그 힘과 질서 안에서 그 말들이 자신들의 잠재성을 일으켜세우고 살아가도록 돕는”(66면) 존재다. 그 존재가 구성하는 텍스트와 그것을 읽는 독자의 실천에 의해 “현실은 (…) 미세하게나마 새롭게 구조화된다”(379면). 그가 여러차례 강조하듯 소설은 그 자체로 현실이 아니며 다만 현실을 구조화하는 다양한 담론 형식의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의 전체성을 포착해낼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담론 형식과 구별되는 위상을 지닌다. 그가 편혜영의 『홀』과 윤대녕의 『피에로들의 집』(문학동네 2016)이 거둔 일정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구멍과 균열에 내속된 인간 주체의 불안이든 관계나 유대를 통한 인간성의 복원 가능성이든 결국 한 덩어리의 이야기로 탐구되어야 한다”고 비판하는 이유도 소설이 “인간 현실의 덩어리, 그 전체의 미메시스”(217면)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소설이 인간과 세계의 다채로운 측면을 균형있게 담을 때에야 비로소 현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는 그의 전언은 타당하다. 하지만 애초부터 현실의 전체성을 풍부하게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은 작품에도 동일한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지에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철저히 자기들의 이해관계 안에서만 움직”(209~10면)이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애초에 이 작품의 설계 의도가 한국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재현에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정홍수가 타당하게 지적했듯 『홀』에 등장하는 축소된 인간 모형은 분명 단순하게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비극적 ‘하마르티아’(hamartia, 착오)의 드라마가 더욱 또렷하게 전율한다는 점에서 그 모형은 나름의 기능과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근대 장편소설의 인물을 기준으로 본다면 연극적 기능을 수행하는 『홀』의 인물들이 가진 모형성이 도드라질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인물관을 그와 다른 지향을 가진 작품의 성패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도입하는 것은 근대소설이 구성한 “미학적 심급”(120면)을 일반화하는 일일 수 있다.

과거 문학운동이 지향했던 “소설의 총체성이나 객관성”(279면)의 이념이 스러진 오늘날, 소설의 전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더욱 까다로운 작업이 되어가고 있다. 정홍수가 로티(R. Rorty)의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개념에 거듭 착목하는 이유도 총체적 이념이 사라진 상황에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가동함으로써 ‘전체로서의 현실’을 드러낼 수 있는 유연한 태도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에 대한 그의 입장은 양가적이다. 그는 작품 해석에 초월적인 기준으로 작동하는 이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로티의 논의를 수용한다(“소설은 하나의 진리를 향한 경연장이 아니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향한 도정도 아니다. 소설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메타-언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소설의 축복일 테다”, 248면). 하지만 필립 로스의 작품을 독해하는 대목에서는 “로티의 논의 방식”이 “개인성과 자율성의 신화와 관련된 20세기 모더니즘의 변형된 판본일지도 모른다”(142면)는 의구심을 제기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홍수는 로티가 열어놓은 지평(‘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우연적 결속)과 그 한계(‘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독단적 결속’) 사이를 방황하듯 오가면서 전체주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소설의 전체성을 확보하는 독법을 고민한다. 소설의 전체성을 추구하는 정홍수의 비평 방식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경험이 더 넓은 지평과 접속하지 못하고 점점 더 고립된 파편으로 흩어지는 오늘날, 소설이 창조할 수 있는 전체성의 감각을 강조하는 그의 전언은 사뭇 절실하게 다가온다.

그 전체성을 구축하는 선험적인 메타-형식은 아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품이 만들어낸 실감은 물론이고 미처 드러나지 못한 잠재성의 지대까지 구체적으로 읽어내는 독자의 능동적인 활동을 통해서 점검되고 판명될 수밖에 없다. 이 책에는 정홍수가 소설을 “독자의 참여와 도움을 아주 적극적으로 요청하”(66면)는 담론의 형식으로 파악하는 대목이 여럿 등장한다. 소설은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지 않아서 독자의 적극적인 파악 의지 없이 결코 그 자신의 온당한 성취에 도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정홍수에게 있어 비평가는 바로 그러한 성취를 완성하는 최종 심급에 해당하는 독자이며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이미 충실한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저자 자신이 이와 같은 의미의 독자-비평가가 되기 위해 치러야 했던 다양한 고민과 모색의 흔적이다. “문학작품을 납작한 인식론의 영역으로 환원하지 않고 작품에 담긴 존재의 움직임과 목소리를 보고 들으려는 열린 태도”(566면)는 그 치열한 모색의 길에서 마침내 그가 깨달은 유연하면서도 간결한 독법의 핵심일 테다.

 

 

  1. 노태훈 「체크 포인트」,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7면.
  2. 노태훈·심진경·이현석·하재연·황인찬 「한국문학은 여성의 것이 되었나」, 『자음과모음』 2023년 가을호, 25면. 대화 중 황인찬의 발언.
  3. 이은지는 「비평의 오물: 물밑을 휘저으며」(『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가을호)에서 특정 의제에 관한 평론가들 사이의 논쟁을 통해 비평장은 활력을 얻지만 평론가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열패감이나 모멸감, 분노와 적의”(81면)는 오롯이 평론가 개인의 몫으로만 남는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이은지의 말처럼 “비평을 비평이게 하는 수사는 (…) 누군가의 감정을 할퀴는 잔인한 칼”(82면)이라면 그 수사가 극대화되는 논쟁은 지양될 수밖에 없다. 이는 오오쯔까 에이지가 말한 “‘문학’ 내지는 ‘문단’의 컴플라이언스화”(오쓰카 에이지 『감정화하는 사회』, 선정우 옮김, 리시올 2020, 209면)의 한 양상일 수 있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은 다른 지면을 통해 이어갈 예정이다.
  4. 이병훈 「대화적 장르론과 구성적 문체론의 관점에서 본 바흐찐의 소설이론」, 『러시아연구』 31권 1호, 2021, 214면. 이병훈은 바흐찐의 목표가 “소설을 구성하는 최소 물질 즉 소설의 원자(atom)를 규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소설의 장르적 본질을 설명하며 그것의 역사를 문체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는 일”이었다고 정의하는데 소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국소적 활용을 치밀하게 탐구하는 정홍수의 비평은 그 역시 바흐찐처럼 언어를 ‘소설의 원자’로 삼고 있음을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