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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김수지 『혁명과 일상』, 후마니타스 2023

혁명이 일상이 되려면

 

 

류진희 柳眞熙

덕성여대 차미리사교양대학 강사 ryujh3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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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는 하지만 아무래도 부분적으로 불쾌한 말 못할 감정을 느끼는가 봐요. …… 불쾌가 아니라 불안을 느끼겠지요. …… 야단이에요. 글쎄 남편이나 부인이나 같이 직장에 나갔다 돌아오는데 왜 나는 미안함을 느끼고 상대편은 미안함을 안 느낄까”(291면).

1946년 12월 북조선민주여성동맹의 직업여성 좌담회에서 한 여성이 늦은 퇴근을 남편이 이해하는지에 대해 이처럼 토로했다. 당시 북조선에서는 이미 ‘남녀평등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어 ‘모든 영역에서 여성들은 남자들과 평등권을 가진다’고 선언됐지만, 여성의 적극적 행위성을 목도하면 남성들은 우선 “불쾌” 혹은 “불안”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한 부대낌에도 불구하고 여성도 혁명기에 제 몫을 해야 하는 상황을 남성 역시 이해할 수밖에 없었음이 짐작되는 대목이다.

김수지의 『혁명과 일상: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Everyday Life in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 2013, 윤철기·안중철 옮김)은 이렇듯 식민이라는 사슬에서 풀려난 ‘보통 사람들’이 혁명의 일상을 어떻게 보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냉전의 전야에서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적대적 공존관계’를 맺게 되는 정치외교적 과정에만 초점을 두지 않는다. 저자는 급진적 개혁은 일상의 균열과 함께 진행되며, 이는 개인을 구성하는 세밀한 영역의 변화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해방 후 북조선, 1945~50년’이라는 시공간은 이를 톺아볼 장으로 조명된다.

북한은 정상국가가 아닌 불량국가, 시간이 멈춰진 캄캄한 땅으로 간주됐다. 그러나 자본주의 근대성이 ‘제국/식민’체제를 기반으로 여러갈래로 나아갔듯, 대항으로 출현한 사회주의 근대성도 나름의 경로를 밟아왔다.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공장을 배경으로 하는 표지의 포스터 속 ‘보라! 빛나는 북반구의 민주건설을’이라는 구호는 당시의 역동에 주목해야 한다는 메시지에 다름없다.

여기에서 저자는 ‘영웅적 모더니즘’을 말하는데, 이는 창조자로서 인간의 노력이 역사적 변화를 추인한다는 믿음이다. 또한 부르주아 개인의 권리보다 집단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적 지향은 근대성에 잠재하는 해방적 측면이다. 이 책은 식민지 근대성이 어떻게 혁명의 불씨를 개인에게 남겨, 전반적인 사회 변화에 빠르게 각자를 연루시키게 하는지를 살펴본다.

이 책에서 혁명기 북조선 역사 서술의 주인공은 유력 정치인 및 명망가 몇몇에서 인구의 대다수를 구성하는 노동자, 농민, 청년, 여성 등으로 교체된다. 서두에 인용한 『조선녀성』(1947년 2월호)의 「직업여성좌담회」 기사와 같이 좁은 의미의 사료(史料)를 뛰어넘는, 매체 기사, 자서전, 이력서, 구술 기록 등 무궁무진한 기록물이 긴요하다. 그러나 북한 일상을 짐작할 만한 자료에 접근 자체가 힘든 상황에서 ‘디아스포라 코리안-아메리칸’ 한국학 연구자로서 저자는 미군 노획 북조선 문서 더미로부터 그 실마리를 찾아낸다.

책의 말미에 첨부된 김호철의 자서전은 혁명의 내러티브를 보여주는 사례로 특별히 꼽힌다. 혁명기 당시 그는 세가지 버전의 자서전을 썼다. 유산계급인 양반의 후손으로 혁명적 계급에 속하지 못함에도 그는 자기 가계의 고난을 동학농민운동 및 3·1운동 등 민족적 사건과 동기화하면서 스스로를 사무원(사무직 노동자)으로 자리매김한다. 이러한 자기 내러티브의 과정을 통해 그는 ‘사회주의 신 인간’(socialist new man)으로 변모했다. 자신감있고 안정적인 최종 자서전과 그 맞짝인 정갈한 이력서를 담보로, 마침내 그는 혁명의 일상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내포가 단지 남성(Man)이듯, 여성이 어떻게 혁명적 사건 및 역사적 과정에 자신을 연루시키는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급진적 토지개혁, 최초의 인민위원회 선거, 광범위한 문자보급운동을 거쳐 ‘혁명적 모성’이 사회 전반의 자질로서 상징적으로 강조되기는 했다. 그러나 민족사를 자신의 내러티브로 전유하는 남성의 의지와 노력에 비하면, 기존 모성을 새 시대에 맞게 변형하라는 위로부터의 선전이 여성의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서두에서 보듯, 여성은 일/가정을 함께 돌볼 사회적 요구에 응하면서도 동시에 남편의 불안에 ‘미안’을 느끼는 감정적 곤란에 처해 있다.

이 책의 백미는 결국 이 빈 공간에서 혁명의 기억이 어떻게 젠더화되는지를 도출하는 마지막 장이다. 저자는 과거를 현재적으로 구성하는 기억의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사회주의 근대성을 지향하는 존재들, 즉 남한의 장기수 남성과 빨치산 여성들의 현재 목소리를 참고한다. 이때 민족사로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주형하는 남성들에 비해 여성들은 차라리 자신의 인생 자체를 민족사에 삽입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남성의 서사에서 개인의 이야기는 매끈하게 삭제되지만, 여성의 서사에서 개인의 이야기는 민족사 경계 너머로 미끄러진다. 저자는 이러한 잉여의 이야기들이 여성사로서 주변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식민지에서 해방된 여성이 재차 여성 자신의 해방을 위해 일상에서 무엇을 새롭게 해냈는지 여전히 탐구될 필요가 있다. 사실 38선이 경직되기 전 해방 직후, 여성들은 대표적인 피압박 존재로서 탈식민의 역동을 가장 잘 드러내기도 했다. 조선부녀총동맹을 비롯해 유력 여성단체의 활동은 연일 매체들의 주목을 끌었고, 입센(H.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를 모델로 여성이 집 밖을 나오는 서사가 다시 붐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 조선인 징집을 역설했던 ‘친일’ 작품으로 인용된 여성작가 최정희 역시 해방기에는 전향적으로 여성, 농민, 민족 문제에 대한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결국 혁명이 일상이 되려면 일상이 혁명이 되어야 한다. 앞서 ‘불편’과 ‘미안’이라는 정동까지 포괄하여, 여성사는 대문자 역사가 포괄하지 못한 부분을 드러내고, 역사 서술 그 자체를 심문하는 방식으로 조망될 수 있다. 되돌아보면 이 책이 영어로 출간되었던 당시 한국에서도 식민지 근대성, 근대성 비판 논의와 관련하여 탈식민 해방기 및 사회주의 연구가 봇물을 이뤘다. 그리고 여성사 및 일상사에 이어 여성서사에 대한 연구도 더불어 진행되어, 근대성의 모순까지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주체로서 여성이 주목되었던 것이다.

꼭 10년 만에 번역되어 나온 한국어판이다. 이 책을 계기로 다시 남북 모두에서 혁명이 여성의 일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그리하여 여성 존재가 각각 근대성의 무엇을 문제시하는지에 더불어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저자가 한국어판 서문에서 밝혔듯 강산이 바뀌는 사이, 남북에 불었던 잠깐의 훈풍은 신냉전의 냉기로 바뀌었다. 다시 거울처럼 맞붙은 남북한 근대성의 이면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요청되는 지금, 김수지의 『혁명과 일상』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