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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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미 金慶美

1959년 서울 출생. 19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이기적인 슬픔들을 위하여』 『쉿,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밤의 입국 심사』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등이 있음.

lilac-namu@hanmail.net

 

 

 

그러하다

 

 

이사를 했다

더 멀고 낡은 가장자리 집으로

 

평생 인생경전들 모두 독파한 후배

주위 세가지를 바꾸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한다

공부

장소

인간관계

 

이사를 했다

더 좁고 허름한 구두 뒤축의 집으로

몇몇 명단들 희미해지고

 

갑자기 공부가 늘었다

가령 왜소한 두 페이지짜리 유리창 밖

2월의 새들

메마른 나뭇가지 내려앉아

한참 동안 놀다 가곤 하더니

 

3월 새순 돋자

행여 여린 잎 밟을까

모두들

나무 위 허공에서만 잔뜩 놀다 돌아갔다

 

그 착지법 따라

발뒤꿈치 들고 걷던 낯선 동네

 

모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축하에다가 상금도 있는 큰 전화였다

 

진짜였다

 

둥근 화분 속

축하파티 끝나고

다정한 흰 봉투 품에 안고

멀리 드문드문 돌아오는 밤의 귀갓길

좋은 말투를 가진 별들과도 얼마 만에

다시 인사 나눴는지

 

다음 날 아침 모르는 번호께 예를 갖추려

식사라도 대접하겠다 문자 보냈는데

모르는 번호로부터 딱 잘라 답장이 왔다

‘잊고 얼른 이전으로 복귀하세요’

 

진짜였다

새로운 스승들이 자꾸 생기는 집

 

오늘도 먼지 앉은 두 페이지를 깨끗이 닦자

가랑잎이 몰고 오는

새로운 공부의 계절

좀더 추워서 두툼한 명단의 방향

화분 분갈이 덕분이다

 

다 진짜 그러하다

 

 

 

살구나무 그 집

 

 

그의 집은 가난한 마을에서도

깨진 솥단지 귀퉁이

제일 가난했지만

 

마당에 용케

마을에 없는 아주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한다

 

6월 살구가 익으면 낮은 흙담집 바깥쪽으로도

살구들 무지막지 쏟아져내려

가난을 살구로 메꾸려 어린 그가

그 살구들까지 다 먹고 안고 살구가 되어 마당 들어서면

 

담 안쪽 것만 먹어라

바깥쪽은 이웃들 먹게 놔둬라 그래도 배부르다

말수 적던 어머니

크게 혼냈다 한다

 

얘기 듣고 돌아오는 길

커다랗고 높은 살구나무를 봤다

살구나무인지 자두나무인지 구분 못하고도

나무면 됐다고 생각했던 나무

 

바닥으로 한가득 떨어진 주황색 불빛들

주워 들어 몇개나 먹었다

 

그 어머니의 이웃이 되기 위해

이웃이었다가 가족이 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