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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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 등이 있음.

imagine49@hanmail.net

 

 

 

열광을 주입하지 마라

 

 

활어차에 작은 상어나 메기를 함께 넣어두면

싱싱한 상태로 살아 있는 고기를 운반할 수 있다지

 

이런 따위 주장은 반박하기 어려워

믿어버리지, 사람 행동의 이치도 그럴 거라고

 

방어진 어시장 부두에 배를 댄 내 친구

손가락 두개가 없는 고깃배 선장은

없는 손가락 흔들며 이렇게 말하지

고기가 활어차에 실리는 순간 고문이 시작되는데

공포를 조성하고 학대한다고 싱싱해지겠냐?

수족관은 그럼 무슨 휴양지냐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에게 그게 중요하지 않지

어쨌든 무리를 관리할 이론이 필요하니까

아무 일도 안 하면서 개돼지처럼 먹을 거나 찾고

채찍을 들지 않으면 나태하고

처벌하지 않으면 방탕하고

감시가 없으면 드러눕기나 좋아하는 것들에게

 

메기효과는 이미 증명이 된 것이라고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것이라니까!

 

그러면 그럴 게 뭐 있나

그런 과학은 자기 집구석에서나 하지

자기 집에 뱀 한마리 풀어놓지

밥을 먹을 때도 다리를 들고

잠시도 쉬지 않고 주위를 살피고

침대도 공중에 매달아놓고

반걸음 뗄 때마다 바닥을 살피고

긴장과 주의력 열배 높이고, 사람 참 싱싱해지겠군!

그러면 직장 가서도 펄펄 날고 연봉도 몇배 더 받을 것이고

사업도 승승장구할 것이고

 

유튜브에 똑똑한 정치 인플루언서들 참 많아

똑똑하고 지당하고 당연하고 허점 없는

언변가들 너무 많아 너무 당연한 얘기라서

열변을 토하고 욕설을 섞어가며 벌겋게 분노하고

그러면 지지자들 열광하지 퍼 나르고 발광하지

그 똑똑함에 눈을 떼지 못하게 하지

열광하지 않는 자는 허접쓰레기

배신자 적을 돕는 자 불안을 주입하지

지지자들에게 상어 한마리 풀어놓지

그런 똑똑함은 이제 구리와 실리콘이

사람보다 백배 더 잘하는 지능이 있는데

 

이봐 이제 다른 이야기 좀 할 수 없나

플라스틱도 할 수 있는 재능 말고 말이야

사람을 열광시키지 않는 얘기 말이야

질문을 갖게 하는 이야기 같은 거 말이야

너희만 열광해 나는 내가 열광하는 것이고

열광을 주입하는 건 학대라고,

 

 

 

달력

 

 

여전히 깊은 숲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내일이라는 단어가 없는 부족들도 있다는데

내일은 만질 수 없으므로 이름이 없으면

머리에 그려지지도 어디서 굴러올 일도 없을 터인데

 

해가 뜨고 다음 해가 뜰 때까지도 아닌

꽃이 피고 겨울이 깊어질 때까지도 아닌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오늘이라면

뒤도 앞도 없는 세계는 얼마나 경이로운 하루일까

 

하지만 내일이 없는데

오늘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겠지

지금 이곳뿐인 현재가 계속 현재라면

나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지금이라면 그들이 이해하는

영원회귀를 우리는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인간을 가장 많이 변화시킨 책 한권 꼽으라면

주저 없이 나는 달력을 꼽을 것

달력은 시간을 나누는 방식만이 아닌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방식도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도

먼 데 것과 관계 맺는 방식도

사랑하는 방식도 슬픔을 이해하는

방식도 얼마나 많이 바꿔놓았을까

저장 창고도 금고도 달력이 생겨난 후에

만들어지고 착취는 규율과 법이 되고

권력이 탄생했을 것

 

그래서 인간이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돌을 세워 달력을 만든 일

그러나 시간은 광장에 있었고 광장 그 자체였고

광장의 투쟁이 있었으나

하지만 이제 그 책은 팔리지 않는 책

 

광장이 아니라 골목이 되었으므로

골목이 아니라 파이프라인이 되었으므로

이해가 되지 내일을 발명하다 내일이 너무

많아져버려서 내일로 향하는 길만

넘쳐났으므로 시간은 이제 내일이라는

권력이 장악했으므로 불순물이 섞이지 않도록

내일만 갈무리하기 위해

골을 파고 시간은 파이프를 타고

흐르지 먼지처럼

 

옛사람들이 읽던 책력은

숫자가 아니라 구구절절 사연과 사연이었기에

새들처럼 들판에 어제가 다시 찾아와 지저귀었지만

이제 겹겹이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거리에서

아침마다 어제는 수거되므로 그들이 보이지 않네

 

어제의 존재들은 우리보다 먼저 있었고

또 우리보다 나중에 있네

사람 밖의 모든 건 어제의 존재들

멈추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어제

멈추지 않으면 그들은 떠나지

 

훗날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지

옛날 옛날에 어제가 없는 부족이 살았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