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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기성 李起聖
199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 『채식주의자의 식탁』 『사라진 재의 아이』 『동물의 자서전』 등이 있음.
leekisung85@hanmail.net
식인의 세계
쇳소리 날카로운 빛이
적막을 가르며 쏟아지는 순간에도
여자는 신의 처벌을 받은 천사처럼 담담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바닥에 쓰러진 채 무구한 눈을 깜빡였다.
기계에 낀 몸은 신기하게도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것은 커다란 접시에 놓여 있다.
어떤 슬픔도 없이
우리는 조용히 먹는 일에 열중한다.
우리 모두의 애도
시인이 죽은 뒤에 마을에 잠시 고요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시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이는 생각한다. 애도-죽음-애도-죽음의 회로가 돌아가는 것 같다. 공장이 폭발하고 애도하고 기차가 탈선하고 애도하고 죽은 시인을 애도하고…… 어린 새와 아이들…… 그런데 애도가 뭘까요?
아이는 노인에게 묻는다. 노인은 이빨이 빠진 입으로 말라빠진 무를 씹고 있다. 아이는 주머니 속 젤리를 만지작거린다. 애도의 끝은 어디일까요? 애도가 끝나면 파란 하늘을 보고 트램펄린에서 뛰어놀 수 있을 것이다. 동네 아이들은 검은 옷을 벗고 새들도 애도애도 울지는 않을 것이다.
침을 흘리면서 졸던 노인이 애도는 흰 종이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무엇이 쓰여 있든 그걸 오래 씹으면 물렁한 무처럼 검은 비애처럼 달아진다고. 아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의 머릿속은 정말 백지장처럼 하얗고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노인의 주름진 입술이 애도로 검게 물들고 있다. 아이는 노인에게 파란 젤리를 주고 작은 새처럼 명랑하게 학교로 간다. 새로운 애도를 배우기 위해서. 젤리가 목에 걸려 컥컥대며 쓰러지는 노인을 그대로 두고 곧장 앞으로 걷는다.